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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희 시인
ⓒ 또 하나의 문화
"카르페 디움(현재를 즐겨라!)."

이 땅의 문학청년들이 한 번쯤 외쳐 봤을 키팅 선생의 명대사다. 그러나 여성작가들에게는 이 말이 쉽게 적용되기 어려운 것 같다. 한 여성작가가 몇 번 결혼했고 몇 번 이혼을 했는지 늘 관심거리다.

여성적 글쓰기를 말했던 또 다른 시인은 "아프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잠시 떠나야 했다. 그는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사회는 여성의 발언에 대해 공적인 성격을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모욕함으로써 발언의 의미를 희석시킨다."

이 땅의 문학소녀에게는 좀 다른 슬로건이 필요할 듯하다. 여자인 우리, 맘 놓고 글 써도 되는 거야? 현재를 즐겨도 되는 거야? 이 대목에서 한 시인의 발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20년 전 고정희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벙어리 삼년 세월 봇물을 트자/.../할머니는 밥이 아니어라/어머니는 떡이 아니어라"(<봇물을 트자> 중에서, <또 하나의 문화> 1987년)

고정희. 그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1948년 출생했으며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총 1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남도굿의 가락을 민중시에 담아 광주의 오월을 노래했던 민중 시인이기도 하다.

또한 <여성신문>의 초대주간이자 1980년대 초부터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 참가했던 여성주의 활동가다. 혹자는 고정희를 '운동가의 강인함과 시인의 섬세함을 동시에 갖췄다'고 평하기도 한다.

죽은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 이정표가 놓였다

자매여
이제는 우리가 길이고 빛이다
이제는 우리가 밥이고 희망이다
이제는 우리가 사랑이고 살림이다 <여성신문> 1989.12.1


죽은 시인이 낸 길을 따라 해남 문학 기행을 떠난 자매들이 있었다. 대안문화운동단체 '또 하나의 문화'는 1992년도부터 매년 6월 고정희 시인의 생가와 묘소를 찾았다. '또 하나의 문화' 동인이자 페미니즘 문학의 실천적 전범인 시인을 기리고, 해남의 정취를 느끼고자 했다.

2003년부터는 땅끝소녀백일장을 시작해 후세대 여성 시인을 양성하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2004년부터 고정희 백일장을 전국 단위 규모로 확대했으며, 2006년부터는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대회를 새롭게 단장했다.

2006년 제3회 예선에는 167명의 청소년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7명의 여학생들은 '다이어트, 고장난 컴퓨터, 네모난 수박, 이효리와 강금실 그리고 힐러리'라는 시제를 가지고 해남 지역의 미황사 누각에서 본선을 치뤘다.

주최측은 죽은 시인과의 만남을 통해 소녀들이 영감과 힘을 얻기를, 그래서 '고정희 시인의 우산 아래서' 문학 활동을 해나가기를 바라고 있다.

"우선은 고정희 시인을 계속 기억을 하자는 거였죠, 여성문제를 고민했었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좋은 역할 모델이 될 수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는 장이 열렸으면 하는 바람이죠. 여성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때에 여성의 몸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문학적 통과 지점의 하나니까."

'또 하나의 문화' 대학에서 강좌를 수강하며 고정희 시인과 인연을 맺은 김현아씨의 설명이다. 현재 작가로 활동 중인 김현아씨는 지난해부터 고정희 문학상 기획에 참여하고 있다.

제4회 문학상 예선 통과자는 문학기행 참가

▲ 2006년 고정희 문학기행
ⓒ 또 하나의 문화
올해의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은 벌써 4회째다. 4월 23일부터 30일까지 이메일로 참가신청(http://www.tomoon.org, http://www.peeum.org)
을 받는다. 예선은 5월 5일 토요일 오후 1시 한신대 수유캠퍼스 신한전문학대학원 본관 2층에서 실시한다. 한신대는 고정희 시인의 모교이기도 하다.

문학상은 성별에 관계없이 16세에서 18세의 청소년들에게 모두 열려있다. 참가비도 없다. 대안학교나 집을 나와 쉼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도 참가 자격이 주어진다. 제도교육에서 소외된 청소년들이 문학상에서 다시 한 번 소외되지 않도록 고려한 것.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에 얼마나 공감을 하고 어떻게 표현했는지가 주요한 심사 기준이다. 그러나 김현아씨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작가가 여성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요. 여성주의는 살면서 체험적으로 부딪치는 거니까. '얼마나 자기를 잘 표현할 수 있느냐'가 문학상의 주요 심사기준입니다. 여성주의는 세계를 보는 하나의 창이죠, 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이 40대쯤 되어야 보통 가능하지 않을까요?"

예선통과자에게는 고정희 문학기행과 문학학교의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지난해 문학기행에서 참가자들은 고정희 시인이 누구인지 충분한 설명에 목말라했다. 이에 힘입어 올해부터 개최하는 '문학학교'에는 총 5회의 강좌를 마련했다.

고정희 시인이 대체 누구인지, 왜 우리가 이걸 하는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하는 기본적인 취지와 허난설헌, 매창 등의 과거 문인들, 젠더와 역사, 고정희 시인의 시읽기 강좌가 포함된다.

지난해 고정희 문학상을 수상한 문학소녀들도 올해 다시 만난다. 강릉의 지역예산에는 이은선(20), 서울에서는 금강산(19), 김예인(18), 문이슬(20)이 기획단으로 활약한다. 고정희 문학상은 단발적인 행사가 아니라 '고정희'의 이름으로 예비 작가들과 지속적으로 만나는 장인 셈이다.

"불안한 나이, 좋은 기회를 잡으세요"
[인터뷰] 지난해 수상자, 금강산·김예인

▲ 지난해 수상자인 금강산, 김예인(오른쪽)

"네모난 수박이 수박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때처럼 나는 엄마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중략) 이제서야 우리 엄마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강산 <까만 수박, 불투명한 수박 우리 엄마>중에서)

강산이(19)는 재능이 많다.하자작업장 3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작년 고정희 청소년 문학상에 참가해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엄마에게 느꼈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한 글로 심사위원을 사로잡았다.

그는 고정희 문학상을 계기로 '글쓰기'에 대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통신하자'라는 학교신문과 '불한당' 이라는 교지 제작에도 참여했다. 마포 FM에서는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PD이기도 하다.

"저에게 글쓰기는 치유의 과정이예요. 나이가 나이다보니까 불안한 게 많거든요. 밥 먹는 것도 불안하고, 학교에 가는 것도 불안하고, 살찌는 것도 불안하고…."

또래의 소녀들에게 불안은 공통분모다. 인터뷰 내내 강산이와 함께 앉아 꺄르륵 웃던 김예인(18)도 내면의 불안을 담는 날카로운 글을 쓰고 있었다.

"넘쳐나는 여성잡지와 수많은 옷가게들의 마네킹은 우리에게, 나에게 끊임없이 살을 빼라고 요구한다. 아득해진다. 세상에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소녀들은 무슨 장단에 맞춰 춤추라는 소리냐." (김예인 <고민> 중에서)

예인이의 글쓰기에 대한 자세는 사뭇 진지하다. 작년 전태일 문학상에서도 은상을 수상한 재능있는 예비 작가다. 고정희 문학상 4회 참가자들에게는 이렇게 당부한다

"뇌(머리)가 있는 사람이 있고 우연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죠. (나처럼) 우연을 잘 잡아서 고정희 문학상에서 좋은 성과를 냈으면 좋겠어요" / 김홍주선

덧붙이는 글 | 문의 : 또 하나의 문화(02-322-7946(교환 201) 이메일 gohjunghee@hanmail.net)  

김홍주선 기자는 기획취재기자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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