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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출판 창비
사들고 온 지 아주 오래도록 읽지 않고, 아니 선뜻 읽지 못하고 서가에 꽂아두기만 하던 소설을 작심하고 읽었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과 마주치기를 저어한 까닭은 아마도 그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든 내 젊은 날의 초상과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이 들면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할 때, 문학(특히 소설)은 내 삶의 나침반 같은 것이었다. 그 어떤 이념 서적보다, 어떤 철학적 사유를 설명한 글보다도 세상과 그 안의 가치 있는 것들에 대해 알게 해준 것이 바로 소설이었다.

소설은 픽션을 다루는 허구의 예술양식임에도 그 안에 담긴 사건과 인물은 늘 당대의 전형을 드러내고 그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거침없이 내게 말해주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늘 그 시대가 풀고 가야할 숙제를 떠안은 채 갈등하고 고뇌하고 좌절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좌절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미완인 채로 다시 시작해야할 역사의 과업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세계와 내가 관계하는 방법을 배웠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눈을 키웠다.

까뮈의 부조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황석영이 전해주는 삶과 세상의 모순들, 그 어긋난 숙명의 피울음은 들을 수 있었다. 이를 테면 '삼포 가는 길'이며 '객지' 등을 통해 개발 지상주의로 일컬어지는 60, 70년대 산업화 사회로의 이행 속에서 철저히 유리되고 피폐해진 기층 민중들의 망가진 삶을 보았다.

산업화의 구호 속에서 제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 빈민으로 편입되어 죽지도 못하는 기구한 삶을 연명하거나 떠돌이로 공사판과 막일 터를 전전해야 했다. 그들의 딸들은 '영자'(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와 '백화'(소설 '삼포 가는 길')가 되어 술을 따르고 젓가락을 두드리다, 밤이면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남자 품에 얼싸 안겨'(가요 '댄서의 순정') 속으로 피눈물을 훔쳐야했다. 영희 네처럼 난쟁이(소설 '난쏘공')가 되어 하늘 가까운 동네에서만 살아야했다.

80년대의 시간과 마주하다

총성과 함께 무등천이 핏물로 흐르며 80년대는 밝아왔다. '유신(維新)'이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함을 믿어 의심치 않던 까까머리 학생은 대학생이 되었다. 막걸리 냄새와 백화 같은 누나들의 서글픈 웃음소리가 질펀한 시골 선술집의 아들내미가 대처의 상업학교에 가더니 대학생까지 되었다고 골목이 시끄러웠다. 어머니는 술을 내고 아버지는 이웃 술꾼들의 공치사에 얼큰했다. 이모들은 가슴께에 꽂혀있던 구겨진 지폐를 꺼내 피 섞이지 않은 조카에게 용돈을 주었다.

소설을 다 읽고 서평을 쓰기 위해 일어난 새벽, 나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한다. 거기에는 미리 예감했듯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어깨를 잔뜩 움츠린 '내 젊은 날의 초상'(이문열)이 있다. 글자의 조합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문열을 그 때에는 너무 좋아했다. 삶의 전반(全般)에서 통과의례를 치러야 하는 젊은이의 방황과 방기가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 소설 또한 내 청춘의 지침서 같은 것이었다.

영화관의 '대한 뉘우스'에서 보여주는 맹호와 청룡의 혁혁한 전과에 덩달아 뭉클했던 청년은 '무기의 그늘'(황석영)과 '황색인'(이상문)을 읽으며, 우리의 군대가 절대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버렸다. '머나먼 쏭바강'(박영한)이 베트남의 정글에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한강에서도 미제의 군인들이 그들의 군화를 씻고 있다는 사실에 명치끝이 아파왔다. 울화로 치민 숨은 목젖을 트고 나오지 못하고 그 밑에서 터질 듯 팽팽하였다.

예술이니 절망이니 하는 이문열의 젊음은 이제 빛나는 젊음의 순수를 빙자한 자기 분열에 지나지 않았다. 햇빛은 더 이상 골고루 이 땅을 비추지 않았다. 어둡고 눅눅한 구석 자리가 더 많음을 알았고 그 그림자 짙은 진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웃들이 더 많다는 슬픔에 청춘은 우울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잘못과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감시하는 사악한 악마 탓이라니, 분노에 치를 떨었다.

▲ 2007년 1월 개봉한 바 있는 영화 <오래된 정원>의 포스터
ⓒ theoldgarden.co.kr
그러나 나는 오현우가 되지 못했다. 송영태도 되지 못했다. 최미경이 될 수도 없었다. 다만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고 가짜에게 속지 않으려는 일말의 양심에 따라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천막학교에서 나보다 더 가난하고 나보다 더 가지지 못한 그네들에게 얄팍한 지식을 나눠주는 것이 겨우 내가 한 양심적 행동의 전부였다.

학살로 그 박명을 튼 80년대의 중반, 그 사이 나는 학생에서 군인으로 다시 학생으로 저들의 규율에 의해 신분의 변화를 경험해야만 했다. 소설 속의 오현우가 컴컴한 독방에서 여전히 광주의 시간과 씨름하고 있을 때, 송영태가 그 광주를 반도 전역에 세우려 할 때, 최미경이 현장에 광주를 들여놓으려할 때, 한윤희가 끝 모를 기다림 속에서 “그림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리는 사람”으로 시간을 버텨내고 있을 때, 그의 딸 은결이가 자라 듯 세상 또한 스스로 자라났다.

민중은 참지 않았고 시간은 무상하지만은 않았다. 거리에서 해방은 실재하는 생물처럼 꿈틀대었다. 그 뿐이었다. 소위 6·29 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제복들의 잘 짜여진 각본 한 편에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에서 여전히 신음해야 했다. 거기까지였다. 아직 해방은 오지 않았고,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적당히'라는 낱말을 유난히 좋아하는 우리의 습성으로 인해 거리는 한산해졌고 집으로 돌아간 우리들은 착각 속에서 모처럼 편안했다.

한 뼘의 정원조차 가지지 못한 나

그 해 6월을 생각하면, 도무지 부끄러워 낯을 들 수가 없다. 목 뒤에서 자라 그 아래까지 온통 퍼진 수포를 찢고 소금물을 붓는 일과가 이제는 지겨웠다. 뙤약볕 밑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설쳐대다 도망치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도망갈 핑계가 없을까 궁리하던 날에 제복들이 그 길을 터주었다. 거리의 시민들보다 더 약삭빠르게, 마치 텔레토비처럼 '이제 그마~안'하며 연애의 골목길로 숨어 들어가 버렸다.

나에게 한윤희는 없었다. 그저 코앞에 닥친 졸업과 그 후의 먹고 살 준비에 무능한 나를 신랄하게 꾸중하는 현실의 여자가 있었고 잔소리만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그게 포도를 튕기는 사과탄의 날카로운 반동음보다, 타타타탁 최루가스를 뿜어내는 대포차의 굉음보다 듣기에 나았다. 그렇게 나의 6월은 갔다.

영악한 그 선택 덕분으로 나의 높은 담장 구경은 아주 짧은 이벤트로 끝이 났고 그 해의 경험은 한 때의 젊음을 추억하기에 좋은 에피소드로 막을 내렸다. 오현우가 18년의 긴 시간을 고독과 자기 확신의 경계에서 무참한 시간과 사투를 벌이던 시간에, 나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하다며 경제적 인간으로 사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적당한 쾌락과 일탈을 즐기며 기성의 틀과 가치에 스스로 길들여져 갔다.

내가 구독하던 일간지에 소설이 연재되던 그 시기에도 나는 아주 가끔씩만 황석영을 만났다. 부끄럽다는 가치판단의 사고조차 귀찮아진 한 기성세대의 눈으로 일상의 부피만큼만 읽었다. 토막토막 끊긴 80년대의 실루엣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는 심정으로 활자를 보았다. 거기에는 소설에서 시대를 찾기보다 일상을 누리고픈 사십대의 한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오현우를 추억한다. 한윤희와 그의 아름다운 사랑에 눈가에 습기가 고인다. 시쳇말로 '안습'이다. 오늘에야 고백하건데, 내게 있어 5월과 6월은 잔인하다. 어느 시인이 예언했듯이 봄은 잔인하다. 지키고 견딘 무엇이 없는 까닭이다. 양심상 위로 받기 위해 거리로 나섰던 젊은 내게 오현우가, 한윤희가 찾았던 '오래된 정원'은 없다.

다만 그들처럼 나 역시 그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 때문에 운동을 팔아 유익을 구하는 짓만큼은 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아이들이 은결이 만큼 자라도록 곁에 있었다는 것으로 내 부끄러움을 변명하며 나는 책을 덮는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 <오래된 정원>은?

80년대의 광주사태에서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던 90년대의 말까지 거의 20년을 사상범으로 옥중에 갇혀 지내야 했던 오현우(지진희)와 그에게 도피처를 제공한 것을 계기로 운명처럼 그를 사랑했고 그를 기다리다 자궁경부암으로 연인의 출소도 보지 못하고 죽은 한윤희(염정아)의 절절하고 아름다운 사랑, 그 시대에 혁명의 순수를 꿈꾸었던 청춘들의 이야기다.

소설적 공간이자 영화적 공간인 갈뫼에서의 추억을 더듬으며 때로는 오현우의 시선으로, 때로는 한윤희의 시선으로, 일기로 낙서로 메모로 뜨거웠던 80년대의 사회와 운동과 사랑을 넘치지 않는 잔잔함으로 그리고 있다.

단, 영화에서는 그 줄거리의 전개상 작가가 동유럽의 붕괴와 변혁의 세상을 나타내기 위해 삽화로 선택한 듯이 보이는 한윤희의 독일유학생활과 이 교수와의 짧은 사랑 등은 생략되어 있다. / 임흥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창비(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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