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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가 한국사냐 중국사냐 하는 논쟁이 한·중 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양측 모두를 ‘불쾌하게’ 하는 제3의 논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사는 한국사도 중국사도 아닌 요동사(遼東史)라는 논리다. 이러한 입장의 주인공은 중국 고대사 전공자인 서강대 사학과 김한규 교수다. 참고로, 요동은 만주의 옛 이름이다.

김한규는 전통시대에는 중원-요동(대동강 이북)-삼한(三韓)이 문화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전제 하에, 요동에서 성립하고 요동에서 발전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와 요나라-금나라-원나라-청나라는 한국사나 중국사가 아닌 요동사로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BRI@이러한 파격적 주장에 대해 한·중 양국의 주류적 학자들은 대개 다 ‘경기’(驚氣)를 보이고 있다. “웬 뜬금 없는 주장이냐?”는 게 양국 학자들의 표면적 반응이다. 양국의 주류적 입장과 너무도 판이할 뿐만 아니라 양국 어느 쪽에도 득이 될 것이 없는 주장이기에, 김한규의 주장은 양측 모두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4년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문제가 되었을 때에 한국 학자들은 언론을 통해 김한규를 성토한 적이 있다. 이때 김한규의 입장은 한국사를 빼앗아가려는 중국측에게 동조하는 논리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점에 관한 한 중국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994년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김한규에게 “하이난다오에서 열리는 중국학 국제학술회의에서 논문을 발표해 달라”는 청탁을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발표문 요약본을 받아 본 주최측은 회의 직전에 김한규에게 “발표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해 왔다. 이유는 “그 논문이 회의장에서 발표되면 한·중 우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김한규의 요동사 논리는 현재 한·중 양측에서 모두 배척을 받고 있다. 그 논리가 인정될 경우 한국 고대사가 ‘날아가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중국 중세사 및 근세사가 통째로 ‘날아가 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한규의 요동사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짐작케 해 주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요동사 논리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는 사료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는데, 한국사 혹은 중국사로 짜여진 기존의 틀을 뒤엎고 요동사라는 새로운 독립된 틀을 과연 만들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무엇보다도 현재 요동사를 계승할 만한 역사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김한규의 논리가 직면한 ‘애로사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는 요동사 논리에 대해 학문적 접근을 하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 접근에 매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학자의 학문적 주장이 학문 윤리를 위반하지 않고 또 학문적 연구방법에 따라 도출된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든 간에 일단 학문적 대응을 하는 것이 학자의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 ‘중국측의 주장에 역이용될 위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학문적 주장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또한 그러한 태도는 한국 사회의 발전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요동사를 인정하게 되면 혹 고구려사가 한국사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한국 사회는 요동사 논리에 대해 아예 처음부터 ‘경기’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사안을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설령 요동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고구려사=한국사라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요동사를 인정한다고 하여도, 한국이 고구려사를 빼앗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민족의 범위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정복전쟁이나 분열 혹은 문화적 접촉 등의 과정을 통해 민족의 범위는 확대될 수도 있고 혹은 축소될 수도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전에는 남남이었던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즉 민족의 범위에 포섭될 수 있다. 기업이나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는 전혀 별개였던 A기업과 B기업은 합병을 통해 하나의 기업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합병이 되면, 두 기업의 직원들 간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인든 간에 ‘우리’라는 유대감이 새롭게 형성되기 마련이다.

또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A녀와 B남은 결혼을 통해 하나의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 경우, A와 B 사이에는 서로 남남이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 자녀인 C의 입장에서는 A 및 B의 역사가 모두 자기 부모의 역사가 된다.

만약 동갑내기인 A와 B가 30세에 결혼했다면, 29세 때까지는 A와 B가 남남지간이었지만, 자식인 C의 입장에서는 29세 이전의 A도 자기 어머니이고 29세 이전의 B도 자기 아버지인 것이다. A와 B가 29세 이전까지 남남이었다는 이유만으로 “A와 B는 그 이후에도 남남이었으며 또 A와 B를 C의 부모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와 같은 비유를 생각해 보면, 설령 고구려가 요동 국가‘였’다 해도 고구려가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동 출신의 고구려, 삼한 출신의 백제·신라는 물론 그 당시에는 ‘우리’라는 유대감을 갖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고구려의 계승자인 발해가 고려로 흡수되고 또 후백제·신라 역시 고려로 통합됨에 따라 이 3자 간에는 사실상 ‘결혼’이라고 할 만한 통합현상이 발생했다. 고려를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라고 본다면, 고구려(발해)-백제-신라 사이의 진정한 ‘결혼’은 936년 이후에 발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점부터 고구려(발해)-백제-신라는 ‘남남’의 관계에서 ‘우리’ 즉 하나의 민족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3자가 한때 남남이었다는 점을 근거로 이 3자가 이후에 통합된 사실의 의미를 애써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3자가 한때 남남이었다는 이유를 들어 이 3자가 오늘날 한국인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민족은 최초의 통일국가인 고려의 후손이기 때문에, 고구려(발해)-백제-신라가 한때 남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사이였다고 해도, 그 3자가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을 것이다. 마치 우리의 부모가 한때 남남이었다 해도, 자녀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두 분이 모두 우리의 부모라는 점이 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에, ‘예전의 고구려가 요동문화권에 있었다’는 사실과 ‘고구려는 한민족의 조상’이라는 명제는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는 논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삼한문화권과는 전혀 다른 요동문화권 출신이라고 한다면, 이는 한민족의 문화적 바탕을 그만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한민족이 삼한문화뿐만 아니라 요동문화까지 기반으로 하는 폭넓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립 당시의 고구려가 요동문화권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김한규의 논리를 인정한다 해도, ‘고구려는 우리의 조상’이라는 한국인들의 굳건한 믿음에는 조금의 부정적 영향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우려를 벗어 버리고 ‘보다 폭넓은’ 마음으로 한민족의 원류를 ‘보다 폭넓게’ 파악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적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요동사 논리가 맞든 틀리든 간에, 그것이 일정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면 일단 검토해 보는 것이 지식인의 태도일 것이다. 또 지식인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 해도, 지식인에게 진실을 왜곡할 권한까지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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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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