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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해 10월 13일 진실화해위원회가 국민보도연맹 사건 직권조사 결정과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긴급조치 판결 판사 명단을 대통령 보고 전에 유출시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 진실화해위

[기사 보강 : 30일 오후 2시 20분]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를 공개할 것인가, 비공개할 것인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이하 진실화해위)는 30일 아침 매우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했다. 송기인 위원장은 이날 오전 9시 30분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 공개여부를 둘러싼 오후 2시 전원위원회 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상임위원 및 실무회의에 돌입했다. 이날 열리는 전원위원회 임시회의는 위원회 출범 이후 단일 안건으로는 처음 열리는 회의다.

평소 자유롭게 드나들던 상임위원-위원장실 출입구도 오전 10시를 기해 굳게 닫혀 있다. 기자 등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몇몇 기자들은 오전부터 위원장실 출입구 앞에서 취재수첩과 볼펜을 들고 위원장의 모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진실화해위 운영지원팀 직원들도 평소와 다른 위원회 내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진실화해위가 이처럼 '평소와 다른' 분위기로 상황대응에 임하게 된 것은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 유출 때문. <한겨레>가 지난 24일 진실화해위로부터 단독 입수해 보도한 이 보고서는 대통령과 국회 보고에 앞서 언론에 흘러 들어가 말썽이 됐다.

언론에 '보고서'가 미리 유출되면서 진실화해위는 위원회의 모든 출입구를 봉쇄하고 기자들의 출입을 막는가 하면 질문에 대해 일체 응답하지 않는 등 '원천봉쇄'로 일관하고 있으나 이같은 조치는 사후약방문 식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이미 언론을 통해 공개된 '보고서'의 '공개여부'를 결정하는 임시 전원위원회를 연다는 것도 사실상 위원회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위원회측은 관련법규상 전원위원회 회의를 통해 모든 사건의 공개 여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같은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블랙코미디'같은 상황인 것이다.

진실화해위, 7일간의 언론대전쟁

<한겨레>가 보도한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에는 지난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가 선포된 뒤 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제9호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 동안 벌어진 사법부 차원의 인권탄압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 내용이 담겨 있다.

당초 진실화해위는 이 달 말 일경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하고 언론에 공개할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한겨레> 보도 이후 MBC가 27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전한 뒤 <중앙일보>가 판사 실명공개 논란으로 보도했고, 잇따라 <한겨레>는 30일자로 '긴급조치 판결 판사 492명 명단'은 물론 '현직 법원 고위직만 12명' 등 당시 판사들의 심경토로를 담은 내용까지 상세히 보도했다.

<한겨레>의 보도 이후 신문과 방송, 인터넷 등 대부분의 언론이 이 뉴스를 주요기사로 다루면서 '긴급조치 판결 판사들의 실명공개' 찬반양론으로 기사의 날을 세웠다. 보수적인 언론들은 앞 다퉈 '판사 감싸기'에 나서면서 실명공개는 옳지 않다는 방향으로 각을 잡고 사설까지 썼다.

<세계일보>는 30일자 사설을 통해 "19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맡았던 판사들의 실명을 공개키로 한 방침은 과연 이 나라에 법이 살아있는가를 의심케 하는 충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며 "민주주의의 밑받침인 법치주의의 근간을 유린하는 헌법파괴적인 발상이며 사법부의 권능을 위축시키고 종국적으로는 사법부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한국일보>도 "누구나 재판기록을 열람하고 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데도 굳이 이를 모아 발표하겠다는 것은 자칫 다른 의도성을 의심받게 할 수 있다"며 "판사들의 실명은 애당초 은폐된 진실도 아니며, 그 공개는 화해를 통한 국민통합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또한 "우리가 부끄러운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앞으로의 경계를 삼고자 하는 것"이라며 "상처를 후벼내 고통을 되살리고 갈등과 반목을 재생산하기 위한 것은 분명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실화해위는 이 과정에서 속수무책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70년대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대해 재판부가 어떻게 판결했는지 그 진실을 밝히고, 화해에 이르는 길로 가기 위한 방법을 찾기도 전에 언론에 휘둘려 정신없는 공방전만 치르는 형편이 된 것이다.

▲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에 참여한 판사 명단을 공개한 <한겨레신문> 1월 30일자.

국민들은 다 아는 내용을 대통령만 모른다고?

무엇보다 진실화해위 내부에서는 70년대 유신정권 아래에서 '긴급조치' 형태로 사법부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했는지 그 실태를 낱낱이 밝히고 부끄러운 사법사에 대한 진실고백을 끌어내기도 전에 '판사 실명공개'가 사회적 논란을 야기하면서 찬반양론으로 갈리게 되자 당초 의도했던 방향타마저 상실한 것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진실화해위의 핵심 관계자는 이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29일 뒤늦게 <한겨레>가 입수한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요청했다. <한겨레>로 유출된 보고서는 진실화해위가 도로 찾아왔으나 '긴급조치 판결판사 실명공개'는 이미 전 언론을 통해 국민에게 공개됐다. 정작 대통령과 국회보고는 30일 오후 전원위원회 이후 최종 인쇄를 거쳐 각각 10부와 300부가 31일 공식 전달될 예정이다.

진실화해위의 핵심관계자는 "누가 이 보고서를 언론에 유출했는지 관련내용을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면서도 "정작 사건 발생 7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가 언론에 유출했는지 최종 결과를 보고 받지 못하고 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이 과정을 접한 한 관계자는 "진실화해위의 좌충우돌이 볼만하다"면서 "보수단체와 보수언론들은 어떻게든 과거사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려고 하는 때에 정작 중요한 과거사건을 얼치기로 정리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현직 판사들의 실명공개로 사법부 권위 실추 운운할 게 아니라 유신시절 이같은 재판관행이 존재했다는 것을 사법부가 인정하고 반성해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진실화해위도 보수여론에 짓눌려 공개여부에 대해 갈팡질팡 갈짓자 행보를 걷지 말고 무조건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진실화해위가 보수언론 눈치 보느라 '판사 실명 공개'를 비공개 결정한다면 스스로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는 길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자명하다고 비난했다.

진실화해위는 30일 오후 임시 전원위원회 회의를 통해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분석 보고서' 유출에 따른 <한겨레> 보도에 대한 공식 입장과 이 보고서의 공개여부를 담은 최종 입장을 공식 발표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미 사회적 논란이 돼버린 마당에 이 보고서의 공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차원에서 이 보고서의 공개를 아예 생략하자는 의견부터 이미 언론에 다 알려진 보고서를 굳이 비공개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까지 갖가지 다양한 입장이 진실화해위 내부에 존재한다.

진실화해위가 이날 오후 2시 임시 전원위원회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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