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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유니씨의 미니홈피. 그녀가 악플에 상처 받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악플러의 활동은 여전하다.

미모의 젊은 여가수가 새 앨범 발표를 앞두고 자살을 했다. 세상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 꽃다운 청춘의 자살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네티즌들의 추모 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는 가운데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간 이유로 악성 댓글이 지목되고 있는 모양이다. 죽은 자야 말이 없으니 누구도 자살 이유를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말 악성 댓글이 중요한 원인이었는지 아니면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자살 원인이 실제로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악성 댓글 문제는 매우 심각한 지경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과 그녀의 미니홈피에는 그녀의 죽음을 조롱하는 악의적인 댓글들이 간간이 올라오고 있다. 얼마 전 개그우먼 김형은씨가 사망했을 때도 악플러(악성 댓글을 올리는 네티즌)들의 행패는 우리 사회의 윤리의식이 얼마나 비루한 수준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도 거침없이 험담을 내뱉을 수 있는 파렴치한 의식 구조를 가진 자들이 인터넷 공간에 엄연히 존재하는 한 악성 댓글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 같다.

@BRI@이번 사건을 계기로 네티즌들 사이에서 악성 댓글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여러 블로그에서 악성 댓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들이 잇달아 올라오고, 포털 게시판에 악성 댓글이 올라오면 여지없이 달려 들어가 악플러의 도덕성을 지탄하는 또 다른 댓글들을 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터넷 문화에 대한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보여준다.

일단 그녀의 자살에 대해 뚜렷한 근거도 없이 악성 댓글을 주범이라 간단히 단정짓고, 여기에 언론이 동조하는 기사를 남발하는 지금의 여론몰이식 분위기는 악성 댓글의 폐해 못지않게 또 다른 우려스러운 현상이라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네티즌들이 악플러를 추방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을 본격화했다는 점에서 비로소 사이버 공간의 자율정화 의지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 같아 반갑기도 하다.

인터넷 실명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그동안 악성 댓글의 문제를 둘러싸고 자율정화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자유주의적 입장과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규제주의적 입장이 팽팽히 맞서왔다. 그런데 자유주의적 입장의 목소리는 당장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당위적 명제에만 머물러 있는 바람에 날로 극심해져가는 악플러들의 행패 속에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규제주의적 입장에 대한 지지 여론으로 이어지면서 급기야 지난해 12월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골자로 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기에 이르렀다.

이 법안에 따르면 공공기관을 비롯해 포털 및 인터넷언론 등 하루 평균 이용자수가 일정 기준에 해당하는 게시판을 설치 운영하는 경우,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가 이용자에 대한 본인확인 조치를 의무화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실명확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에 대해 정보통신부장관이 시정명령을 내리고, 불이행시 3천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토록 강제하고 있다. 그리고 정보통신부는 하루 평균 이용자수 10만 명 이상의 포털ㆍ미디어의 게시판과 기사의 댓글에 실명제를 적용케 하는 시행령을 마련하여 오는 7월부터 적용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 자유를 위축하고 프라이버시 침해 등 또 다른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지금까지 수없이 제기되어 왔던 사항이기에 새삼 여기서 또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보다는 당장 인터넷 실명제를 통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악성 댓글의 폐해를 줄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인터넷 실명제는 별다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당장 가수 유니씨와 개그우먼 김형은씨의 죽음을 둘러싼 악성 댓글들이 실제로 어떤 공간에서 벌어졌는가만 살펴봐도 바로 해답이 나온다. 완벽한 실명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는 싸이월드 미니홈피, 그리고 로그인을 통해 본인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댓글을 쓸 수 있는 포털뉴스와 언론사 사이트의 게시판이 악성 댓글의 주 무대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임수경씨 악성 댓글 사건, 황우석 파동 당시 벌어졌던 MBC PD수첩에 대한 사이버 폭력, 가수 클론의 강원래씨를 겨냥한 장애인 비하발언 사건 등 최근 악성 댓글로 인해 빚어진 각종 사건들은 한결같이 실명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미 수많은 악성 댓글들이 사실상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는 공간에서 양산되고 있는 마당에, 익명성을 거세하는 실명제 법안 하나 도입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너무나도 어리석은 발상이라 하겠다.

▲ 고 김형은의 미니홈피에 악성댓글을 달았던 네티즌 A는 비난이 빗발치자, 자신의 미니홈피와 고인의 미니홈피에 사죄의 글을 올렸다.

악성 댓글의 원인은 '익명성'보다는 '비대면성'과 '집단성'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재 실명제 도입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최우선 논리로 채택되고 있는 "익명성이 사이버 언어폭력의 주요 원인이다"라는 명제는 아직까지 그 어디에서도 실증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또한 실명제가 사이버 언어폭력 근절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는가에 대한 실증적인 검토 역시 단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그저 선험적인 추론에 입각하여 익명성에게 악성 댓글의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이를 기반으로 실명제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만들어 놓고 사태의 해결을 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일하고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악성 댓글의 원인은 '익명성'보다는 인터넷 공간에서의 '비대면성'과 '집단성'이라는 측면으로부터 답을 찾는 것이 맞을 듯싶다.

'익명성'과 '비대면성'은 얼핏 유사한 개념 같지만 사실은 매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익명성'이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을 숨기려는 속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면, '비대면성'은 반대로 상대방이 직접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살아있는 인격체로 간주하지 않게 만드는 속성을 말한다. 앞의 주요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사람들은 굳이 익명성의 베일 뒤에 숨지 않고서도 거침없이 실명으로 사이버 언어폭력을 휘두른다. 특히 자신의 행동이 정당한 것이라고 스스로 간주하고 있을 때, 그리고 이러한 행동에 동조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존재할 경우에는 실명이 공개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사이버상의 폭도로 돌변하는 확신범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대다수가 원래 평상시에도 공격적인 성향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이들이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이 실제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고 있다면 이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폭도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자신과 공격 대상과의 비대면적인 관계가 이들로 하여금 사이버 언어폭력을 행사하게 만드는 요인인 것이다.

한편 악성 댓글의 또 다른 요인이라 할 수 있는 '집단성'은 네티즌들을 익명의 베일 뒤에 숨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군중들 속의 일원으로 숨게 만드는 속성을 의미한다. 실명의 공간에서 자기 혼자 버젓이 이름 석자를 내걸고 악성 댓글을 달만큼 배짱 좋은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수십 명, 수백 명의 악플러들이 북적거리는 공간이라면 거기에 자기 이름 하나쯤 올려놓는 것에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자신이 올린 악성 댓글에 대한 죄책감도 악플러들의 숫자만큼 분산되어 줄어드는 심리적 효과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악성 댓글은 익명성보다도 다른 이유로 인해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익명성 탓만 하면서 만병통치약처럼 실명제 도입에 모든 기대를 거는 지금의 분위기를 바라보노라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 인터넷 예절을 다룬 한국방송광고공사의 공익광고 장면.
ⓒ 한국방송광고공사

네티즌의 공동 대응이 가장 효과적인 규제 방안

그렇다면 악성 댓글을 해소하기 위한 처방책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 것인가? 일단 악성 댓글이 진정 위험스러운 것은 개개의 글들이 나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글들이 한데 모여지고 널리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여론으로 둔갑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악성 댓글에 대한 처방은 실명제처럼 글쓰기 단계에서 네티즌을 규제하는 것보다는 문제의 글들이 인터넷 공간에 유포되고 증폭되는 길목을 차단하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포털 사이트들의 댓글 정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물론 지금도 포털 사이트들은 모니터 요원들을 통해 나름대로 게시판 관리를 하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또한 한정된 모니터 요원들만으로는 시시각각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댓글들을 일일이 확인하여 신속한 조치를 취하기가 어렵고, 자칫 댓글을 삭제했다가는 심한 항의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애로사항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네티즌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정화 노력이 여기에 힘을 보태줘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을에 폭설이 내려 길이 얼어붙게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구청이나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알아서 눈을 치워주겠지 하고 그냥 방치해두면 빙판에 미끄러져 다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반면 내 집 앞 눈 쓸기에 적극 동참하는 마을에서는 이런 피해가 빚어지지 않는다. 댓글 게시판도 마찬가지다. 댓글 게시판은 인터넷 이용자들 모두의 공동 공간이다. 정부의 규제나 업체의 관리에만 마냥 맡겨둘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 예상치 못했던 악성 댓글들이 자신을 향해 쏟아질지 아무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소수의 악플러들을 향해 다수의 네티즌들이 보여주는 강력한 대응이야말로 악성 댓글 퇴치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규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네티즌들은 포털 업체들에게도 게시판 정화를 위해 더욱 체계적이고 철저한 노력을 기울이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포털 사이트에서 악성 댓글의 분류 기준을 마련토록 하거나 댓글 게시판 관리 규정을 제정하여 공표토록 요구하고, 이를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를 감시하는 움직임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끝으로 악성 댓글 문제가 터질 때마다 의례 제기되는 '인터넷 윤리'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겠다. 악성 댓글은 단지 인터넷 윤리의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다. 이것을 인터넷 윤리라는 틀 안에서만 재단하는 것은, 마치 인터넷 바깥 오프라인 세상에서 혼탁한 인터넷 세상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것 같은 왜곡된 인식을 형성시킨다. 솔직히 우리 사회의 윤리 의식이란 것이 인터넷 윤리를 향해 자신 있게 손가락질 할 만큼 제대로 되어 있는지 묻고 싶다.

인터넷은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의 반영일 뿐이다. 현실세계에서 윤리 의식이 바로 서지 못한 상태에서 인터넷 윤리가 바로 서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악성 댓글 역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모르고 무절제한 공격 성향만 높아지고 있는 현실 세계의 혼탁한 풍조가 만들어낸 배설물일 뿐이다. 악성 댓글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결국 현실 세계에서의 윤리 의식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태그:#악성댓글, #악플, #네티즌, #집단성, #비대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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