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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이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 사건 이제 판결할 때가 되었어요."

지난주였다. 평소 친분있는 한 판사를 만나서 새해인사를 나누는데 갑자기 '그 사건' 얘기를 꺼냈다. 밑도 끝도 없이 그 사건이라니 무슨 말일까. 판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해직된 교수 사건 있잖아요. 재임용에서 탈락되어서 억울하다고 소송낸 분 말이에요. 재판도 할 만큼 했고,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어요. 그 사건 판결쓰는 데 연말부터 하루종일 매달리다시피 합니다."

설마, 설마, 설마했는데...

그제서야 나는 어느 해직 교수를 떠올렸다. 그는 재임용을 놓고 대학 측과 10년 넘게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1심에서 패소 판결을 받은 뒤로는 대학이 아닌 법원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는 작년부터 거의 매일 대법원으로 '출근'하여 자신이 억울하다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서초동에 근무하는 판사나 법원직원 중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판사는 그 사건의 항소심(고등법원) 재판부 소속이었고, 더구나 판결문 작성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주심 판사였던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고심의 흔적이 역력했다. 보통 판사들은 평범한 사건 수십 건보다 이렇게 해묵은 감정이 담긴 한 건을 더 부담스러워 한다. 판결문을 쓰기 어려울 뿐 아니라 판사는 감정이 아닌 증거로 재판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2일 드디어 판결문이 나왔다. 사실관계가 구구절절 기록된 34장 짜리 판결의 결론은 원고 패소였다. 그 교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대법원에 상고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어제(15일) 밤늦게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당사자 한 명이 판결에 불만을 품고, 재판장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것이다. 설마 그럴까 싶었다. 그러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인터넷을 보니 바로 '그 사건'이었다.

뭐라고 그를 위로해야 하나

▲ 판결에 앙심을 품고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우 부장판사를 피습한 전직 교수 김모씨(사진뒤편 오른쪽)와 범행에 사용한 석궁을 15일 밤 경찰이 공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지난주 만났던 주심 판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판사는 재판장이 입원한 병원에 있었다. 퇴근 후 재판장의 피습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왔다고 했다.

"재판장님이 다행히 크게 다치시지는 않았는데, 충격을 좀 받으신 것 같아요. 안정을 찾으셔야죠. 그동안 열심히 일하셨으니 좀 쉬실 때도 되었죠."

차분한 말투였지만, 그 판사도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나는 "그만하기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그 정도로 위로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판사님도 조심하시라"고 하자 그 판사는 "걱정말라"고 답했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교수는 인터넷 상에서 판사들과 법원을 비난해 왔다. 그러다가 패소 판결을 받자 자신의 감정을 결국 폭력으로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사실 판사를 향한 '테러'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법정과 판사실에서 크고 작은 폭력이 발생해왔다.

패소판결을 받은 민사사건의 당사자는 물론이고, 형사 피고인은 자신의 형량이 높다고, 피해자는 피고인의 처벌이 약하다며 판사를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판사의 집 앞에서 준비된 무기로 저지른 테러라는 점에서 우발적이라고 보기 힘들다.

법관 판결이 진리는 아니지만

판결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하지만 법관의 판결을 기본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판결은 '정의의 승리'로 치켜세우고,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사법부는 썩었다'고 쉽게 말한다. 물론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법원이 뼈아픈 자성을 해야 할 대목도 있다. 하지만 폭력은 비판의 방법이 아니다. 폭력은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아내려고 힘으로 법원을 굴복시키려는 것이다.

그 교수는 자신의 억울함을 이런 방법으로 표시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이대로 나가다간 판사 임용할 때 '강심장', '무술유단자'와 같은 자격조건이 붙을 지도 모르겠다.

만일 판사가 여론에 흔들린다면, 폭력에 굴복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 이번 폭력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우리가 바라는 판사는 유무형의 압력과 폭력 앞에 당당한 판사가 아니겠는가.

판사에게는 특별한 권한이 없다. 다만, 헌법(103조)에서 말하듯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판사가 양심에 따라 재판하지 않는다면 비판하라. 하지만 폭력에 굴복하라고 협박하지는 말라.

▲ 지난해 8월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전국 법원장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부장판사 피습 김모씨 누구인가
96년 재임용탈락 후 소송에 패소... 판사 비난 명예훼손 혐의도

15일 부장판사를 피습한 김모씨는 1991년 성균관대 수학과 조교수로 신규 임용되어 근무했다.

그가 대학측, 다른 교수들과 갈등을 빚게 된 것은 지난 1995년이다. 그해 김씨는 대학별 고사 수학과목의 출제에 오류가 있다며 시정을 촉구했고, 교수와 학교측은 "잘못된 사실을 외부에 유포하여 학교를 곤경에 빠뜨렸다"고 그를 비난했다.

같은 해 그는 교수들의 징계청원으로 ▲공정하지 못한 학점부여 ▲동료교수 비방 ▲직무태만 등의 사유로 '견책'의 징계를 받게 된다. 또한 부교수 승진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결국 96년 3월 재임용심사에서 탈락했다.

김모씨는 1995년 10월 법원에 '부교수직 직위확인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 김씨는 2005년 재차 성균관대를 상대로 교수지위확인 소송을 냈으나 같은 해 9월 패소판결을 받고,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김씨는 작년부터 거의 매일 서울 서초동 소재 대법원에서 1인 시위를 벌이며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사법부를 비난해왔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2일 "김씨는 임용기간 중 연구실적 및 전문영역의 학회활동에는 적합한 요건을 갖추었으나, 학생 지도 능력·교육관계법 준수·교원 품위유지 등의 기준에는 미달되어서 성대의 재임용거부 결정은 적법하다"는 취지로 항소를 기각했다.

한편 김씨는 지금까지 자신의 재판에 관여했던 판사들과 대법원장 등을 사이버 상에서 명예훼손한 혐의(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 김용국

태그:#석궁, #석궁 습격, #법원 공무원, #판사,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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