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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도시 곤다르로

넓은 타나 호수와 수도원을 구경하고 온 탓인지 마음이 무척 평온해져 깊은 잠을 잤다. 서서히 낯선 여행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배낭여행에서는 3일째가 되면 누구나 베테랑이 되어간다는 말이 실감났다.

말라리아 위험지역인 타나 호수 근처라서 인지 숙소 방안 침대에는 커다란 모기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예방약인 말라리아 약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BRI@타나 호수에서 떠오르는 불덩이 같은 해를 기대하며 아침 일찍 일어났으나 날씨가 흐린 탓에 마치 물감이 번진 색감처럼 흐릿한 해만이 스멀스멀 물 위에서 기어오르고 있었다. 타나 호수를 뒤로하고 4대 유적지 중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성곽도시로 유명한 17세기 때의 옛 수도 곤다르. 바하르다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아 비행기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곤다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데 높은 고지대여서 인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 상쾌한 느낌이 들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언덕 위의 푸른 전원도시이다.

곤다르는 13세기 랄리벨라의 자그웨 왕조 몰락 이후 처음으로 영구적인 수도가 된 곳이다. 그동안 황제들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정착된 수도를 건설하지 않고 수시로 왕의 캠프를 옮기는 '이동궁전' 생활을 해왔던 것이다. 떠돌아다니던 옛날 황제들이 정착의 유혹을 느낄 정도로 곤다르는 아름다웠다.

▲ 홀로된 여성들이 팔라샤 방식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
ⓒ 김성호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들이 떠난 마을에는 폐허만이...

내가 공항에서 바로 찾은 곳은 성곽이 아니라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살고 있다는 웰레카라는 마을이었다.

오래전 에티오피아에도 흑인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책을 통해 읽고서 언젠가 에티오피아를 가면 유대인 마을을 방문하리라 꿈꾸고 있었다. 어떻게 백인 유대인들이 아프리카까지 흘러들어 갔으며, 또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2, 3천년 사이에 외모가 흑인으로 바뀌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시내에서 5km 정도 떨어진 웰레카 마을에 도착했을 때 집들이 몇 채 남아 있지 않아 거의 폐허나 다름없었다. 마을주민 몇 명이 길가에서 도자기나 보자기, 머플러 등 공예품을 팔고 있는데, 여행객들도 발길을 끊었는지 아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난 1984년부터 1991년 사이 마을주민들이 대부분 이스라엘 정부가 주도한 대량 비행기 수송을 통해 이스라엘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아주 일부만이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한다. 당시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람은 무려 2만2000여명에 달한다.

'팔라샤(Falasha)' 또는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이라고 불리는 이들 에티오피아 유대교도들은 4세기에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이후에도 개종하지 않고 1600년 이상을 자신들의 신앙을 꿋꿋이 지켜왔다.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지를 몰수당하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대부분 도자기를 굽는 도공이나 대장장이, 천짜기 기술자 등 장인으로 살아와야 했다. 에티오피아 유대교도들만의 독특한 마을과 문화를 형성해 왔던 것이다.

팔라샤들이 일하던 옛날 도자기 공장이나 실 짜는 작업장은 현재 미혼모 등 홀로된 여성들을 위한 기능훈련장 겸 공동생활체로 사용되고 있었다. 내가 공동생활체를 찾아가자 40대 중반의 여성책임자가 입구에서 오래간만에 찾아온 외국여행객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일일이 공장 등을 소개해 주었다. 도자기 공장에는 5명의 여성이 열심히 흙을 반죽하기도 하고, 술병 도자기를 만들고 있었다.

도자기 공장 앞에는 7, 8명의 여성들이 한 명은 물레를 이용해 실을 짰고, 나머지는 베틀을 이용해 수공업식으로 천을 짜고 있었다. 공장 뒤의 넓은 텃밭에는 채소를 가꾸는 여성들이 열심히 김을 매고 있었다.

여성 책임자는 "43명의 홀로된 여성들이 이곳에서 일해 134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팔라샤들이 떠난 빈공간을 여성들을 위한 기능훈련센터이자 공동생활체로 활용하는 것은 훌륭한 계획으로 보였다. 공동생활체 안에는 도자기와 보자기, 스카프 등 공예품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었다. 옛날 팔라샤들이 만들었던 도자기처럼, 여성들이 팔라샤들의 방식대로 만든 도자기에도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의 전설에 따라 솔로몬 왕과 시바의 여왕이 함께 침실에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 여성들이 베틀을 이용해 수공업식으로 천을 짜고 있는 모습
ⓒ 김성호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는 있어도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없다

웰레카 마을을 떠난 에티오피아 유대인과 관련해 흥미있는 사실은 이스라엘 유대인과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유전자(DNA)를 분석한 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 유전인류학자들이 이들의 상관관계를 알아보기 위해 유전자 분석을 해보니 오히려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비유대인 에피오피아인과 유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해 이스라엘로 떠난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들이 유대인과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는 있어도, '에티오티아 유대인'이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것은 유전적, 인종적 분류가 아니라, 유대교를 믿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종교적, 문화적인 개념일 뿐이다.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들이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믿었던 데는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시바의 여왕의 전설처럼 여왕과 솔로몬 왕 사이에 태어난 메넬리크 1세 황제의 후예라는 오래도록 내려온 신화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는 솔로몬 왕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아들 메넬리크 1세가 돌아갈 때 아들의 나라를 돕기 위해 이스라엘 12지족에서 성직자와 학자, 장인 등 1천명씩 모두 1만2000명의 유대인을 골라 에티오피아로 같이 이주시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웰레카 마을에 살던 팔라샤들은 자신들이 바로 메넬리크 1세와 함께 이스라엘에서 건너온 1만 2000천명의 유대인들의 자손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것.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믿는 전 세계 '유대교 신자'들을 '유대인'과 동일시해 선민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이주시킨 것은 아랍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를 만회하기 위한 고도의 정책적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에티오피아 뿐 아니라 인도, 소련 등 전 세계에서 '유대인'들을 불러들여 예루살렘뿐 아니라 요르단강 서안지구나 가자지구 등 중동전쟁을 통해 빼앗은 점령지의 불법적인 정착촌에 이주시켰다.

이스라엘인 보다 팔레스타인의 출생률이 압도적으로 높자 아예 전 세계 유대교 신자들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집단 이주시켜 수적으로 누르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셈이다.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이란 책에서 이스라엘의 이런 유대교 신자 이주정책을 점령국의 고전적 영토약탈 정책인 '타국민 밀어내고 자국민 이주하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 옛날 에티오피아 유대교도들이 일하던 공동생활체 입구
ⓒ 김성호
팔라샤들이 떠나 황폐해진 웰레카 마을을 보면서 쓸쓸함과 허전감이 느껴졌다. 이제는 아무런 특색이 남아 있지 않은 작은 마을에서 여행객은 상상을 통해 옛날의 모습을 그려볼 뿐이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이곳에서 유대교라는 독특한 종교와 생활양식을 지키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꿔갈 수는 없었을까. 물론 에티오피아 정교회와 이슬람이라는 거대 종교 사이에서 유대교라는 소수종교의 설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종교 간 갈등과 인종 간 대립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생명 자체의 위험도 느꼈을 것이다.

유대교 마을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사라진 웰레카 마을을 보면서 역설적으로 다른 종교와 다른 인종의 공존이 얼마나 인류 문명과 역사를 살찌우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나를 태우고 간 택시운전사도 "옛날에 팔라샤들이 많이 살았을 때는 관광객들도 많이 찾았는데, 그들이 떠나고 나서는 관광객들의 발길도 뜸해졌다"고 말했다. 독특한 문화가 사라진 곳에 굳이 여행객들이 찾아갈 일이 없는 법.

서아프리카에서 카리브해와 미국 등으로 끌려간 흑인 노예 출신의 후예들인 라스타파리교 추종자들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기치 아래 인종적으로 상관없는 에티오피아를 종교적 안식처로 삼아 돌아오는데,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온 에티오피아 유대교 신자들은 '아프리카를 탈출하자'는 깃발 아래 역시 인종적으로 상관없는 이스라엘로 떠나는 엇갈리는 행렬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에티오피아를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공존하는 인류 평화의 박물관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종교적 배타와 문화적 배제, 인종적 차별이 문명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웰레카 마을은 보여주고 있었다. 종교적으로 복잡하고 문화적으로 다양한 문명권이 충돌하게 되는 요즘 세계화 시대에 더욱 공존의 미학이 필요할 때라는 것을 깨우쳐준다.

▲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 안의 날개 달린 아이 천사 얼굴 모습의 천장벽화
ⓒ 김성호
날개 달린 둥근 아이 천사가 천장에서 빙긋 웃는데...

다음으로 간 곳은 날개 달린 둥근 아이 천사 머리의 천장벽화로 유명한 데브레 베르한 셀사시에 교회였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조그만 마을 한가운데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데 교회 입구 도로가 막혀 있었다. 아무런 표시 없이 차량이 들어갈 수 없도록 커다란 돌멩이를 도로 가운데에 갖다 놓았다. 도로 공사 중이라는 표시란다.

택시 운전사가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데, 지나가던 어린이가 빙 돌아서 가라며 손으로 차량이 갈 수 있는 우회도로를 가리켜 준다. 아이의 말대로 돌아가니 교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미리 알고서 누군가에게 먼저 도움을 주려고 한다.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아프리카 아이들의 동심이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니 정원 한가운데에 4각형의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가 서 있었다. 남자 수도자가 교회 관리자 겸 안내자로서 여행객들의 신발을 모두 벗게 한 뒤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교회 안에서는 절대 카메라 플래시를 사용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다. 교회에 들어가자 인도인으로 보이는 남녀 7, 8명의 여행객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타나 호수의 케브란 가브리엘 수도원과 달리 여성들의 출입이 허용되고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일부 수도원이나 교회가 여성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전통적 남성중심주의와 종교적 여성차별 교리의 잘못된 만남이 빚어낸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발을 들여놓자마자 교회 안은 천정과 4면의 벽이 모두 다양한 색상의 벽화들로 가득 찼다. 천장에는 미술책 등에서 본 적이 있는 바로 그 유명한 날개 달린 아기 천사 머리를 한 둥근 얼굴의 그림이 온통 도배를 하고 있었다. 천장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나는 그 천사 머리 얼굴이 너무 귀엽고 재미있어서 그 숫자를 자세히 세워보았다. 모두 16줄이고, 한 줄에는 7개씩의 얼굴을 그렸는데, 앞쪽 줄 3번째까지는 세월이 오래 흐르다 보니 몇 개씩 그림이 지워지고 천장이 떨어져 나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쳐들고 천장의 벽화를 자세히 세다 보니 고개가 뻐근할 정도이다. 아기 천사들은 커다란 눈에 검은 머리의 둥근 얼굴을 하고 있고, 얼굴 뒤에는 해바라기 같은 날개를 그려 놓았는데 천장에 그려진 수십 개의 얼굴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것. 웃는 모습과 당황한 모습, 시무룩한 모습 등 표정도 다양한 데 같은 표정 중에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로 조금씩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동그란 얼굴에 큼직한 눈, 오뚝한 코는 바로 에티오피아 어린아이들의 전형적인 얼굴이다.

▲ 데브레 베르한 셀라시에 교회의 정면 모습
ⓒ 김성호
마호메트가 악마가 끄는 낙타를 타고 끌려가는 장면이 교회 벽화에...

정면의 벽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목 박혀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다른 벽에는 에티오피아 성인과 순교자들이 그려져 있다. 천장화와 벽화는 모두 하일레 메스켈이라는 화가가 그렸다고 한다. 17세기에 이 교회를 처음 설립한 이야수1세 황제의 초상화도 그려져 있다.

황제 이름인 암하릭어 이야수(Iyasu)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조슈아(Joshua. 우리나라에서는 여호수아라고 부르기도 함)를 의미하는 데, 에피오피아 역대 왕이나 황제 이름 가운데는 구약성서나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암하릭식으로 딴 경우가 많다.

칼렙(kaleb)왕은 역시 구약성서의 갈렙(Caleb)을 의미하고, 요하네스(Yohannes) 황제는 신약성서의 세레요한(John)을 의미하는 등 자신들의 뿌리를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Jesus)는 암하릭어로 예수스(Yesus)라고 부르고, 메스켈(Meskel)은 십자가(cross)를 의미한다.

특히 벽에 그려진 지옥의 그림은 15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악마적이고 풍자적인 묘사와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눈길을 끄는 또 다른 그림은 뒤쪽 천장의 맨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장면이다. 위치상으로 천장인데다 맨 오른쪽 귀퉁이 쪽에 치우쳐 있어 강한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경우에는 보일 듯 말듯 희미하게 비친다. 바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마호메트(무하마드)의 그림이다.

마호메트가 머리에 뿔이 달린 악마가 끌고 가는 낙타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낙타 위에 마호메트가 올라타 있고, 낙타의 목에 매달은 끈을 악마가 잡고서 앞에서 끌고 가는 것. 아마도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 만든 이단종교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곤다르 지역은 지난 1880년대에 수단의 이슬람교 마흐디파 광신자들에게 약탈당했는데, 그 이후에 이슬람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곤다르 지역에서는 이 교회가 마흐디파 광신자들에 의해 약탈당하기 직전 때마침 벌떼들이 날아와 가까스로 파괴되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이다. 곤다르에 가면 꼭 가 볼만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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