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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보통 우리의 생각으로 노인들이라고 하면 힘없고 약하고 사회에서 보호해야 하는 계층을 떠올린다. 물론 대다수의 노인들이 그런 것도 사실이지만 드물게 청년기의 파워를 그대로 간직하고 정정하게 늙어가는 분들도 계시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 연륜의 깊이까지 더해져 눈에서 광선검을 쏘시는 우리 배추도사와 같은 분도 있지 않은가.

소녀들 패싸움에 다 큰 어른들 날 새는 줄 모르더라

그 날은 친구들이 술과 고기를 사들고 좀 더 추워지기 전에 평상파티를 열어보자며 찾아왔다. 세렝게티 옆에는 남자 고등학교가 있는데 밤이 되면 복도 너머로 야자 중인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자 친구들은 장난끼가 발동을 했는지 술잔을 교실 쪽으로 향하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BRI@"자식들, 고생하네."
"음핫핫… 조금만 버텨라. 불쌍한 것들."
"캬… 고생하는 동생들 바라보며 한잔 하려니 술 맛이 이슬과 같구나."


물론 우리들끼리 한 이야기라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저 10여 년 전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배들의 위로주(?) 정도라고 해야 할까.

그때 학교 뒤 골목 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야이, xxx야!!"

우리는 일제히 옥상 난간에 고개를 내민 채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거렸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은 옥상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남학교 뒤쪽 소운동장이었고, 어찌된 영문인지 소년이 아닌 소녀 4명 가량이 다투는 것이 아닌가.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닭싸움을 보는 듯했다. 오! 무서운 치킨소녀들.

일단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의 싸움 구경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일단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나 구경하기 위해 일렬로 쪼로록 옥상 난간에 매달린 채 관람을 시작했다.

"맞짱 뜰까? 맞짱 떠?"
"그래, 꼬라보지 말고 맞짱 뜨자, 맞짱 떠!"


[주1: 맞짱 - 청소년들 사이의 은어로 '1:1 결투를 하자'는 의미이다. 비슷한 말로 '다이다이' 등이 있으며, 현재 소녀들은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편 소녀들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요청하는 것이다.

주2: 꼬라보다 - '째려보거나 기분 나쁘게 쳐다 본다'의 은어로써 비슷한 말로 '야리다' 등이 있다. 이 소녀들은 현재 서로 바라보기만 하면서 말다툼을 할 것이 아니라 주먹다짐으로 승부를 내고 싶다는 강한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 달려라, 배추!
ⓒ 박봄이
아, 이 얼마만에 들어보는 청소년들의 언어인가 싶어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참, 물색없는 것들. 스물여덟이나 된 것들이 십대들 싸움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하지만 어쩌랴. 재미있는 걸.

"너 xx, 잠만 기다려, 체육복 입고!"

푸핫! 그 살벌한 와중에 교복 치마 안에 체육복을 입어야 한다니…. 소녀는 소녀구나. 드디어 체육복을 갈아입은 치킨소녀들이 마주보고 섰고 그 긴장감에 우리도 마른 침을 삼켰다.

"선빵 날려."
"니가 선빵 날려."
"됐거든? 니가 선빵 치라고!"
"먼저 치지도 못하는 x이…."
"뭐랏!"


[주3 : 선빵 - 결투에서 먼저 상대에게 첫 공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강함을 알아보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야 적합하다.]

소녀들은 정말로 머리끄덩이를 붙잡고 싸우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우리는 사태가 생각보다 커질 수 있음에 신고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죽어!!!!!"
"싸가지 없는 x!!"
"xxx, xxxx, xx, xxxx!!"
"abcdefg!!"


그때!

"조용히 안혀!! 너거들 뭐여!"

치킨소녀 vs 배추도사

철망으로 된 학교 담벼락 사이로 지팡이를 푹푹 쑤시며 소리를 지르는 노인. 배추도사였다. 밤만 되면 동네 사방팔방으로 뭘 이리저리 줍고 배회하시는 배추도사.

그날도 한가득 뭔가를 잔뜩 주워 돌아오시는 길이었나 보다. 세렝게티 주변을 모두 자신의 영역이라 여기시는 배추도사에게 이런 야밤 소녀들의 결투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됐거든요? 할아버진 그냥 가시면 되거든요?"
"뭐셔? 이것들이!"
"그냥 가시라고요! 남의 일에 꼽사리끼지 마시라고요!"


[주4 : 꼽사리 - 끼어들거나 참견, 들러리를 서는 행위. 조금 더 순화된 표현으로 '묻어가다'도 포함된다. 즉, 배추도사가 현재 눈치 없이 결투에 참견하는 것을 나무라는 소녀들의 표현이다.]

전혀 굽힐 줄 모르는 치킨소녀들의 당돌함에 배추도사 급기야 불켜진 교실 쪽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다.

"선생들 뭐 하는 겨! 여기 이런 것들 안 잡고!!! 선생들 나와! 나오란 말여!!"

소녀들은 급작스러운 사태에 놀랐는지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타앗!'

그 순간 배추도사,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이들이 도망가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 스피드는 도저히 노인의 스피드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세렝게티의 치타와도 같았다.

'역시, 저 노인은 인간계가 아니라 신선계임이 분명해.'

▲ 오늘도 무사히 보낸 하루에 감사, 또 감사.
ⓒ 박봄이
온 동네 개들이 짖고 소녀들을 쫓는 배추도사의 외침과 은둔고수를 몰라본 소녀들의 비명이 세레나데처럼 울려 퍼졌다.

"너 여기서 어떻게 사냐?"

걱정 어린 친구의 물음.

"괜찮아, 원래 세렝게티의 맹수도 자기 배부르면 다른 동물 안 잡아먹는다잖아. 저 영감 굶고 사는 것 같진 않아."
"고기 좀 갖다 드려라, 그게 니 살길이지 싶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새삼 충만하는 꼬냥이, 그렇게 세렝게티 옥탑의 밤은 어허야 둥기둥기∼ 평화롭게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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