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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옥탑의 평일은 한산하다.

옥상에 빨래를 널거나 광합성 작용을 위해 찾는 이도 없고 '개털' 꼬냥이가 홈쇼핑으로 물건을 살 일도 없고 배추도사는 열쇠로 그냥 따고 들어와 먼지 닦고 내려간다. 즉, 세렝게티 옥탑 경비 생활 6개월의 경험상 평일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의 주인공은 반가운 인물이 없다는 것.

가장 많은 득표수로 옥탑방 불청객 1위가 된 이들은 옥탑까지 올라와 '예수 믿으면 천국가요' 라는 아줌마, 어차피 신은 산동네와 옥탑, 반지하, 이 삼종세트에는 재림치 않으시는 것을 알기에 난 대답했다.

"소새끼만한 개 풉니다."
효과음 - "크르릉!! 으릉~! 월월월!" (복댕) "켁, 켁, 켁! 크엑!" (삼식)

이거 하나면 대부분의 불청객은 도망을 간다. 물론 야박하게 군다 할 수도 있으나…. 삼일 밤낮으로 찾아오는 덕에 꼬냥이는 이 순간만큼은 '개조심'을 내걸기로 했다.

산삼아, 산삼아,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어느 한산한 월요일,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미레 미레 미시레도 라~ 도미라시 미솔 시도..♪' (전편을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 쉭쉭쉭~)

이번엔 무엇이더냐! 보험이냐, 신문이냐, 아니면 다시 천국행 티켓이더냐!

"누구쎄요!"

앙칼지게 외쳤다.

"누나~ 나야, 산삼이."

오! 이런…. 지난 일요일 빨래 널고 내려가서 기약없던 백년산삼이었다. 녀석이 평일 대낮에 또 빨래라도 한 것인가 싶어 문을 여니 산삼이는 무언가를 소중히 손에 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진도도 빠르지, 뭔 벌써부터 선물공세를 니 얼굴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란다.

"누나, 이거~."
"뭐냐."

그렇다, 꼬냥이는 아무리 멋있는 남자가 나타나도, 아무리 좋아하는 남자가 앞에 있어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나만의 작업 스킬로 지금껏 버텨왔다. 영악한 것이 남자라, 남자는 조금만 잘해주면 금방 잘난 척 대마왕이 된다는 것, 지금까지의 노하우로 이미 터득한 터였다.

"으응, 우리 엄마랑 같이 겉절이 좀 했어. 누나 먹으라고."

오… 자식, 살림 잘하는 것은 알았지만 음식도 잘하나보네. 내심 기특한 마음에 평상에 앉아 커피라도 한잔 주려 했다.

"기다려, 커피 타올게."

휙 돌아서는 내 등뒤로 산삼이가 흘린 한마디.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이힛~ 고마웡, 누낭~ 오홋."

쟤 뭐래니? '오홋?'

뭔가 찜찜했다. 애가 생긴 건 백년산삼인데 목소리부터 말투가 내심 도라지인 것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였던 터라 '그딴 건 중요치 않아!' 했던 것.

그.러.나….

▲ 삼진이라 하옵니다.
ⓒ 박봄이
꼬냥이의 예리한 레이더망에 걸린 그 '오홋'은 예사 '오홋'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보통 순정만화에서 여자 주인공 괴롭히는 악녀 캐릭터들이 여자 주인공을 골탕 먹인 후, 혹은 삼각관계인 '머째이' 남자 주인공 앞에서나 새끼 손가락 90도로 꺾어 입을 가리며 쓰는 그 '오홋', 그건 아무나 실생활에서 남발할 수 있는, 그것도 멀쩡히 생긴 사내녀석이 흘릴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던 것이란 말이다!

고만 좀 불러, 누나 닳겠다!

그럼 그렇지, 산삼이는 하루에도 댓번씩 전화를 걸어 하루의 소소한 일상의 보고, 인터넷 어디 쇼핑몰에 싸더라부터 시작해서 장보러 갔다가 아주 싼 값에 건져 올린 등푸른 생선 이야기, 나도 모르는 드라마 스토리까지 줄줄줄 풀어놓는 것이 아닌가.

"누나, 누나, 누나~ 나 뭐 샀게, 뭐 샀게?"
"오늘은 고등어 두 마리 천원이든?"
"틀렸지롱, 틀렸지롱~ 글쎄, 바나나 세 뭉치를 천원에 산 거야, 꺄~."

'~지롱'에 '꺄~' 라니…. 가슴 저 밑, 십이지장 근처에서 무언가 갑갑~~ 함이 밀려 올라왔다.

"누나, 누나, 누나~ 바나나가 피부에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좋다잖아, 누나도 갖다 줄게."
"아냐, 내 피부는 이미 재생불량성이고 몸매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어. 너나 먹으렴."
"헉! 누나 미워! 안 놀아!"

어우…. 저걸 씨….

속으로 '이건 아이자네~ 이건 아이자네~'를 외쳐보았으나 산삼이는 이미 내게 '연인 이상의 정' 바로 '누나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었다. 누나면 다행이지, 저거 언니로 느끼는 거 아냐?

문제는 나 또한 산삼이에 대한 이성적 호감은 일요일 빨래 털던 그 등짝 이후로 불가능해졌다는 것이었다. 이건 뭔, 중딩 때 초콜릿 '쎄리' 날리며 달려들던 학교 여자 후배들처럼 느껴지니…. 뭐가 발전이 되겠느냐고.

이쯤되니 꼬냥이 가슴 속 깊은 십이지장에서는 '그는 너의 산삼이 아니다'라는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등 뒤에선 복댕이와 삼식이가 '누나, 누나 예~ 누나, 누나 예~ 누나 누나 누나 예~' 하고 '와뚜와리와리~' 합창을 하는 듯했다.

물론 좋다 이거지. 뭐 좀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를 선호하는 여인들도 많은 것. 뭐 어떠랴. 마초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러나 꼬냥이의 이상형은 전편에서도 밝혔듯이 정상적인 남자보다 조금 더 까칠한 수준이었기에 살랑살랑 버들가지같은 산삼이는 꼬냥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던 것. 남자친구랑 나란히 화장품 샘플 얻어와서 "꺄~" 이러긴 싫다 이거지.

그래, 니가 황진이 해라, 내가 벽계수 하마

그리고 그날 밤, 드라마 <황진이>를 보고 전화했다는 산삼이. 황진이의 일생이 너무나 애처롭다며 마치 지가 황진이라도 된 냥 한숨까지 푹푹 내쉬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꼬냥이와 산삼이 사이에는 저 바다가 태평양이기에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산삼이는 꼬냥이의 십이지장에 마지막 도라지 위스키를 갈겨버린다.

"누나, 황진이의 마음을 담은 그 시 알아? 들어봐.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에혀….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산삼이의 낭랑한 시 낭송을 들으며 창문 사이로 떠오른 밝은 달을 바라보니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일요일 빨래 널던 산삼이는 어디갔소가 절로 나오더라는 슬픈 세렝게티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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