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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겉그림
ⓒ 뜨인돌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무엇보다 많은 교양을 쌓기 위해서 여러 책들을 읽는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도 읽는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위함이 그것이다. 그리고 남들 보는 눈앞에서 때론 멋지게 보이려고 책을 읽는다.

그도 아니라면 그 누군가가 좋은 책을 추천해준 까닭에서다. 학생들은 선생이나 교사가 추천해준 탓에 책을 읽는다. 그것이 때론 과제물이나 성적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직장동료나 상사들, 명사들의 추천으로 읽는 책도 많이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면 자기 스스로 그 깊은 맛을 터득한 까닭에서다.

어찌됐건 책이란 그저 읽으면 좋은 것으로 생각한다. 뭐든 주워담으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정작 쓸데없는 책들도 적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것을 읽느라 괜한 시간을 빼앗겼다거나, 유명한 작가에 비해 글 내용이 한참 쳐진다거나, 읽고 난 뒤 정말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책들이 있다.

거기에는 가끔 거짓 정보도 담겨 있고, 번역이 잘못된 책도 있고, 그저 남의 글을 베끼기에 급급한 책들도 있다. 또 자신이 번역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름만 빌려 펴낸 책들도 있다. 그런 책들을 읽고 난 뒤에는 괜히 분한 마음까지 들기도 한다.

책을 읽는 게 대체로 이럴진대, 그렇다면 진정으로 좋은 독서는 어떤 것일까? 그 길잡이역할을 해 준 책이 나왔다. 헤르만 헤세가 쓴〈독서의 기술〉(김지선 옮김·뜨인돌·2006)이 그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대한 많이 읽고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좋은 작품들을 자유롭게 택해 틈날 때마다 읽으면서 타인들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그 깊고 넓은 세계를 감지하고 인류의 삶과 맥, 아니 그 총체와 더불어 활발하게 공명하는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삶이 그저 최소한의 생리적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닐 진대,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진정한 의미다."(118쪽)

이 책에서 그는 잡다한 책들을 많이 읽는 것보다도 깊이 있는 책에 빠져들 것을 주문한다. 그저 '속독법 훈련'을 위하는 정도라거나, 떠도는 유행문학이 아닌, 대중의 입맛에 맞춘 사탕과자에 불과한 책이 아닌, 보다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이고 치유적인 해답을 스스로 갖게 하는 책을 읽도록 한다.

그것은 극도로 짧은 수명을 지닌 채 사라지는 '반짝 유행시'가 아니다. 한 때 인기상승을 그리다 거품이 빠진 뒤 푹 가라앉는 그런 베스트셀러 류가 아니다. 애정과 경외심이 담긴, 읽고 또 읽어도 결코 물리지 않을 영원한 정수와 같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그런 책을 선택하는 안목이 쉽게 서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책들을 접하고 또 생각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로, 자기만의 문체로, 자기만의 글로 써 볼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곤 누군가의 세심한 비평을 받는 것과 함께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그도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누군가의 도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수많은 책들이 그 길을 열어주는 통로 역할은 했지만 순전히 그 몫은 자기 자신의 발로였다. 그때 처음 접한 게 재미난 삽화가 곁들여진 그랑빌의 〈로빈손 크루소〉와 〈천일야화〉였다. 그리고 나서야 점차 '렌츠'와 '소크라테스', 독일고전의 정수인 '괴테'를 익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독일어권 문학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독일이라는 우물을 벗어나 세계문학을 품기 시작했다. 그 영역이 바로 고대의 인도 세계였다. 그 때문에 그는 여러 인도 관련 서적들을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큰 소득은 얻지 못했다. 이를테면 본 길을 놓친 채 샛길만을 허덕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에 고대 인도세계의 정곡을 찌르는〈바가바드기타〉의 번역본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때야말로 하늘 생수를 맛보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인도세계가 고행과 금욕이라는 극단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금욕적인 지혜에만 집착한 것을 알 때에는 이미 또 다른 세계가 그 안에 들어오고 있었다.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중국의 지혜를 담은 〈도덕경〉과 〈논어〉가 그것이었다.

"인도가 고행과 금욕으로 세상을 버림으로써 고귀하고 감동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면, 중국은 본성과 정신, 종교와 일상이 대립이 아닌 상호보완의 관계로 양자 모두 긍정되는 그러한 정신세계를 일구어냄으로써 인도 못지않게 비범한 경지에 도달했다."(155쪽)

이 책은 분명 책 읽는 이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그렇지만 딱히 '이것이다'고 꼬집어주는 책은 아니다. 무언가를 단정하면 그것만을 강조하게 되고, 그것이 지나치면 분명 어긋난 길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말과 마부의 관계처럼 독자가 저자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사냥꾼처럼 작가를 추적해 가는 것으로부터도 해방되고, 그리고 독자 자신의 개성을 살리는 깊은 맛을 배양하여, 진정 깊이 있는 독서의 기술을 열어나갈 것을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이런 독자는 소설이건 문법책이건, 하다못해 열차시각표나 인쇄소의 활자견본에서조차 원하는 것을 읽어낼 줄 아는 것이다. 상상력과 연상능력이 최고조에 이를 때 우리는 종이 위에 인쇄된 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읽은 것을 타고 떠오르는 충동과 영감의 물결 속을 헤엄쳐 다니게 된다."(189쪽)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뜨인돌(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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