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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 근정전
ⓒ 이정근
태종이 세상을 떠났지만 세상은 양녕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질고도 질긴 줄다리기가 멈추는 듯했지만 그것은 아우 세종에게로 이어졌다. 임금의 형으로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 원초적인 멍에였다. 왕위를 버리고 자유를 쟁취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양녕의 꿈이었다.

태종의 국상을 치른 조정은 서서히 세종 체제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세종에 아부하는 무리는 양녕을 더 멀리 내치라고 아우성이었다. 임금의 두 분 형님, 즉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성내는 물론 한수 이북에 들이지 말라는 태종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양녕을 좇는 무리가 어떠한 흉계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 태종 이방원의 수결
ⓒ 이정근
세종은 형님을 믿었다. 양녕은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양녕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온갖 나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총제 이순몽의 보고를 받은 세종은 양녕의 험담을 퍼뜨린 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직접 추국하며 형을 감싸고 돌았으나 무위에 그쳤다.

형은 죄인, 아우는 임금... 세종대왕의 고민은 깊어지고

마침내 신하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양녕을 청주로 내쳤다. 세종도 가슴이 아팠던지 충청감사에 이르기를 "문은 지키지 말고 잡인들의 출입만 금하라"고 명했다. 형님을 더 멀리 내쫓고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었다. 세종 6년 2월. 마음이 괴로운 세종이 양녕을 다시 이천으로 옮기라고 명했다.

이에 대사헌 하연이 상소문을 올리고 다른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청주로 다시 내려보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형을 믿는 세종은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4월에는 태종의 대상에 참여시켜서는 안 된다는 간언을 물리치고 양녕을 헌릉에 참사하게 했다.

▲ 일월오봉도를 뒤로 한 임금의 자리(경복궁근정전).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은 별칭으로 일월오악병(日月五岳屛) 이라 불리며 조선조 왕권의 상징이다. 병풍에 그려진 오악(五岳)은 금강산, 지리산 등 구체적 산이 아니라 우리나라 산 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 이정근
10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양녕대군이 병권을 장악하여 대궐을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도성에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의 진원지 갑사 지형우를 잡아들여 세종이 직접 추국하자 제조 유정현이 지형우를 거들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양녕에 대한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이때다 싶은 세종은 지형우를 장 100대에 처하라고 명했다.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청주로 이천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형님 양녕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과인이 앉아 있는 이 자리는 형님이 앉아야 할 용상이다. 그 자리에 과인이 잠시 앉아 있을 뿐이다."

▲ 양녕을 서울로 불러들인다는 세종대왕의 말이 기록된 조선실록
ⓒ 이정근
세월은 흘러 세종 17년. 한 해도 다 저물어 가는 섣달 열사흗날. 세종은 사정전에서 교지를 내려 공표했다. 양녕의 이천 유배를 풀고 한양으로 불러들인다는 것이다. 양녕의 유배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실로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당하는 양녕이야 휘둘리어 끌려다니면 그만이지만 국법을 세워야 할 임금으로서 왕과 죄 진자의 군신 간에, 형과 아우의 형제지간에 세종은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끊고자 중대 결심을 한 것이다. 형만한 아우 없다지만 훌륭한 아우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태종께서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여 밖에 내쫓았는데, 그때는 비록 서울에 왕래하지 못하게 했지마는 이것은 곧 세자를 폐하고 세자를 새로 세웠던 초기인 까닭이다. 만약 지금 태종께서 세상에 생존하셨던들 또한 나의 처치(處置)와 같으실 것이다. 서울에 불러 돌아오게 하여 효령(孝寧)과 같이 대접할 것이니, 이 뜻을 전해 개유(開諭)하라." (세종실록 17년 12월 13일)

▲ 세종대왕 동상
ⓒ 이정근
이러한 중대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세종 나름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부자간에는 본디부터 모반(謀反)한 죄가 없었다, 형제간에도 또한 시기하고 싫어하는 일이 없었는데도 의친(懿親)의 장으로서 오랜동안 외방에 쫓겨나서 종친의 반열에 참예하지도 못하였으니, 나의 마음에 항상 미안하였다. 이제는 이미 나이[年齡]도 연로하였으니, 서울 집에 들어와서 살게 하여 때때로 만나보고 우애하는 정을 펴고자 하노라." (세종실록 20년 1월 5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영의정 황희는 물론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태종대왕의 유지를 어기는 일이니 철회하라는 것이다.

"양녕대군 이제(李禔)는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고 종사에 의(義)가 끊어졌으니, 종척(宗戚)으로서 대우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전하께서는 종사의 만년(萬年)의 계책을 생각하고 한때의 우애의 인정을 끊어서, 삼가 태종의 밝으신 훈계에 따라 빨리 사제(私第)로 돌아가도록 명하소서."

비록 이러한 일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이천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형 양녕을 한양에 불러들여 연회에 참석시키거나 궁내에 하룻밤 묵어가게 하면 종사를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들고 일어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때마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으며, 아예 양녕의 일이라면 간원들로 하여금 대성(臺省)에서 간(諫)하지도 말고 도승지 신인손에게 계달(啓達) 하지도 말라고 명하였다.

▲ 양녕대군의 친필 편액이 걸려있는 숭례문
ⓒ 이정근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랄까. 자신들의 목소리가 왕에게 아예 전달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간원들이 승정원을 몰아세웠다. 이에 승정원에서 답하기를 "'양녕대군에게 관련된 소장(疏章)은 올리지 말라'는 교지가 있었기 때문에 올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소장은 올렸으며, 임금 또한 모르지 않았다. 이렇게 올리지 못한 척하는 것은 대개 간관(諫官)의 극성스러움을 막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하들도 물러서지 않았다. 삼사가 직무를 전폐하고 합사(合司)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이조판서 하연이 형제의 정은 좋은데 양녕의 서울살이는 불가하다고 아뢰자,

"경이 우애하는 정이라 하니 내 실로 부끄럽다. 만약 나의 우애하는 정이 지극히 정성스러워 남을 감동케 하였다면 경등이 어찌 이와 같이 시끄럽게 하는가. 내가 경등의 뜻을 억지로 따라서 전일에 비록 교지는 내렸으나 상시로 집에 살지 못하게 한다면 짐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경등이 비록 청하여도 나의 뜻이 결정되었으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

▲ 세종20년 1월 5일 실록
ⓒ 이정근
참으로 훌륭한 아우이고 현군이다. 세종에게는 형 양녕에 대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것을 착착 진행하였을 뿐이다. 형 양녕에 대한 아우 세종의 속내를 조선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양녕이 내침을 당한 뒤, 내가 접견하는 데에 다섯 가지 절목이 있었으니, 첫째는 성문 밖에서 접견하는 것이요, 둘째는 서울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궐내에서 접견하는 것이요, 넷째는 호종(扈從)하도록 한 것이며, 다섯째는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것이니, 무릇 이 다섯 가지 절목에 대해 대간뿐만 아니라, 온 나라 신하 중에 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되, 나는 지성껏 타일러 끝내 윤허하지 않았노라." (세종 20년 1월 5일)

▲ 경복궁 경회루
ⓒ 이정근
양녕대군이 한양으로 돌아왔다. 세종 20년 1월 9일 내려진 세종의 교지는 양녕의 서울살이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실로 20여 년간의 유배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양녕은 감회가 새로웠다. 눈물로 건너던 한강수도 그대로이고 구중궁궐 뒤 병풍처럼 펼쳐진 삼각산도 그대로였건만 세상은 변해 있었다. 하지만 양녕의 콧속을 드나드는 도성의 바람은 싱그러웠다.

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멍에와 세자이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한 죄. 그리고 그 죄업으로 씌워졌던 유배생활을 청산한 양녕은 홀가분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제까지의 삶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는 타의의 삶이었고 이제부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자의의 삶을 살아가는 자연인이 되었다.

세종 20년 3월 7일. 대군과 종친들을 불러 잔치를 베푼 세종이 양녕에게 다가와 말했다.

"형님,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니, 별 말씀을요. 모두가 주상전하의 성은이지요."
"이제 만사의 시름 놓으시고 팔도 유람이나 다녀오십시오."
"헤아려 주시니 망극하옵니다."

이렇게 하여 형제지간에 내밀한 약조가 이루어졌다.

(* 3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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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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