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오마이뉴스 한은희
▲ 중국 공산당사에서 빼놓은 수 없는 1935년 '준이'회의 터.
ⓒ 조창완

1935년 1월 8일 천신만고 끝에 주더가 이끄는 홍군이 준이에 도착한다. 위지앙에서의 타격 이후 거의 야간만을 이동해 험한 길을 이동해 온 것이다.

하지만 몸의 피로보다 무서운 것은 이렇게 가다가는 얼마되지 않아 홍군이 전멸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12일 민중대회에서 마오는 문제를 지적했다.

관련
기사
[장정 70년 1] "이 정도면 혁명도 할 만"

준이 길을 지나 중국공산당은 자랐다

15일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렸다.

마오쩌둥·주더·천윈·저우언라이·뤄푸·보구 등 정치국 위원과 왕지아샹·덩파·류샤오치·카이펑 등 후보위원이 여기에 참석했다. 류보청·리푸춘·린비아오·니에롱전·펑더화이·양상쿤·리쭈오란 등 홍군 군단장, 덩샤오핑 중공중앙비서장, 군사고문 리더(오토 브라운)와 그의 통역 우슈췐도 참석했다.

▲ '준이'회의가 열렸던 회의장 내부 모습.
ⓒ 조창완
이 회의에서 마오는 리더·보구가 이끄는 지도부의 문제를 제기했고, 참가자들 대부분이 찬동했다.

17일 마오쩌둥은 정치국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보구와 리더의 군사지휘권을 취소했다. 물론 가장 큰 정치적 이슈는 왕밍이 이끄는 급진좌경 모험주의 노선의 철회였다.

이전까지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 등 서구에서 파견한 이론가들이나 군사고문에 의해 움직였다. 그러나 이 때부터 중국공산당은 자국 출신의 마오쩌둥을 위시한 지도자들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준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이 유아기를 넘어 성장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준이는 지금도 중국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길 가운데 하나다.

2000년 1월 준이를 찾았다. 충칭과 구이양 사이의 협곡에 있기에 그다지 발전한 도시는 아니었다. 충칭처럼 역 앞에는 구두닦이 하는 이들이 진을 치는 특이한 모습의 중국 도시다.

준이 회의장 주변에는 당시에 지도부들이 기거하던 곳들이 있다. 가끔씩 개들이 짖는 작은 골목 사이에서 중국 지도부가 19일까지 짧은 휴식을 취했다.

죽음을 건 발걸음... 강 건너고 협곡 지나

▲ 따두허 도강 기념비.
ⓒ 조창완
▲ 쇠줄에 의지해 상대의 참호를 뚫어야 했던 '루딩치아오'.
ⓒ 조창완
이후 홍군 장정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진격을 시작한다.

1차 목표는 비교적 험준한 지형의 쓰촨성 서북쪽이었다. 국민당은 창지앙으로 가는 길목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었다. 홍군으로서는 군벌과 국민당이 합친 방어벽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따라서 다시 구이양의 외곽을 거쳐서 윈난성 쿤밍 방향으로 진격했다.

1군 지휘부는 시창 등을 지나 안순창을 경유해 유명한 루딩치아오를 건넜다. 사실 전투에서 강을 건너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 가운데 하나다. 안순창에서 따두허(5월25일), 캉딩에서 루딩치아오를 건너는 일은 사활을 건 최악의 전투일 수밖에 없다.

특히 이 곳은 중앙으로 진입을 시도하던 태평천국군이 도강에 실패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곳이었기 때문에 홍군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다. 국민당 역시 도강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전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홍군은 하룻밤 사이에 도하 위치를 100km 이상 옮기는 등의 전술로 무사히 따두허와 루딩치아오를 건널 수 있었다, 물론 몇 줄기 안되는 철선을 타고 국민당의 방어선을 뚫는 전사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반면 홍 2·6군은 윈난의 서북부인 추시옹·리지앙·중디옌을 거쳐 쓰촨의 서북부로 접어들었다.

이 길은 상대적으로 소수민족 지역이어서 정규군의 저항은 적었지만 거리상으로 멀고, 대협곡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 길을 이끈 이는 허룡이었는데 지금도 중디옌에서 더친으로 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을 딴 허롱치아오가 있다.

하룻밤에 180리, 눈대중으로 전함 명중... 빛났던 한국 전사들

▲ 중국 군대에 포병의 개념을 잡은 인물인 '무정'
ⓒ 조창완
▲ 중국신문에 소개된 '양림'
ⓒ 조창완
따두허·루딩치아오·진사지앙을 건너는 과정에는 한국의 영웅들도 참가했다.

장정의 과정에서도 빛난 두 명의 한국인 전사들이 있었다. 양림(원명 김훈)과 무정(원명 김무정)이다.

양주평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 양림은 1898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1919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입학한 후 만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다 실패했고 윈난 강무학교로 옮겨가 군사학을 배웠다. 1924년에는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으며 공산당에 입당한다. 1927년에는 모스크바 보병학교를 유학한 후 돌아와 1930년부터는 중국공산당 만주성군사위원회 서기를 맡는다.

그는 1932년부터는 노동과 전쟁동원위원회 참모장을 맏는다. 1934년 장정의 초기부터 참가해 간부단(홍군대학의 개명) 참모장이라는 중책을 수행한다. 특히 홍군이 진사지앙을 건널 때는 전위 부대를 이끌고 하룻밤에 180리를 행군해 도하구를 장악하고 홍군이 최대의 위험지를 건너게 한 공로가 있다.

1935년 가을 샨베이에 도착한 후 홍15군단 75사단참모장을 맡았다가,다음해 2월 황허전투에서 38세의 나이에 희생된다.

특히 이 전투는 마오쩌둥의 길을 여는 전투였기 때문에 중요했는데, 이로 인해 마오쩌둥 등 지도부가 도강에 성공할 수 있었다. 때문에 마오는 "중국의 찬란한 오성홍기 위에는 조선혁명열사의 선혈이 물들어 있다"(中華人民共和國燦爛的五星紅旗上,染有朝線革命烈士的鮮血)고 말했다.

무정은 서울 출신이다. 1923년 중앙고보를 퇴학하고, 만주를 경유해 베이징에 온다. 다음해 바오딩 강무당 포병과에서 공부하고, 1929년에는 루이진 소비에트로 가 홍3군에 들어간다. 1930년 펑더화이가 홍3군단을 지휘할 때 둥팅후에서 각국의 배들이 만날 때가 있었는데, 무정은 측정계기가 없는 상태에서 눈대중으로 적함을 명중해 승리를 이끌었다. 장정의 출발부터 제1 방면군 3대대의 간부였다.

그는 초기 홍3군과 홍1군을 연결하는 중요임무를 맡아서 성공적으로 업무를 추진한다. 리핑 회의 후에 홍3군단 포병대 대장을 맡는다. 장정이 끝난 후 그는 중국인민해방군의 포병단을 만들어 전투력을 배가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해방 후 그는 북한에서 연안파의 중심인물이 되는데,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병사했다. 물론 김일성과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만남, 그리고 조용한 갈라짐

▲ 홍군 2방면군이 건너갔던 쓰촨대협곡.
ⓒ 조창완
▲ 마오콩 만남 이후 조용히 북진하던 1방면군을 형상화한 모습.
ⓒ 조창완
1935년 6월 12일, 장정군의 주력이던 중앙홍군 선봉부대인 1군단2사4단과 홍4방면군 선봉부대인 9군25사74단이 쓰촨 마오콩따웨이 지역에서 만났다.

이후 장정군이 속속 모여들었는데, 중앙홍군은 거친 과정 속에서 2만명으로 준 반면 장궈다오가 이끄는 4방면은 8만명이었다. 장궈다오는 마오쩌둥의 정치적 선배인데, 그는 준이회의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었다.

결국 자신의 근거지인 쓰촨과 샨시의 경계지인 촨쌴으로 가자는 장궈다오와 좀 더 험한 산을 거쳐 샨베이으로 가야한다는 의견이 맞물렸다. 1935년 6월 26일 회의에서 장궈다오와 의견이 갈랐지만 중앙홍군은 조용히 출발해 민지앙의 상류를 타고 갔다.

역사와 상관없이 윈난이나 쓰촨 등지는 인상적인 곳이다. 중국의 중요약재가 대부분 생산되는 곳이니 만큼 땅의 기운도 그만큼 좋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도 그만큼 강해 보인다. 이 곳의 주인은 물론 한족이 아니다. 윈난은 물론이고 청두를 제외한 쓰촨은 골짜기 골짜기마다 주인이 있다.

한나절 쯤은 죽어라 달려도 다음 목적지에 도달하기 힘든 윈난의 골짜기는 그 고생의 보람을 주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펼쳐진다.

스린이나 지우샹 같은 기이한 경관, 평안한 땅인 따리, 도시의 가운데 맑은 물이 흐르는 리지앙, 샹그리라로 불리는 중뎬이나 매리설산의 황홀함이 있는 더친 등이 인상적인 여행지기도 하다.

물론 시창, 캉딩으로 이어지는 길도 인상적일 것이다. 기자는 아직 캉딩라인을 가보지 못했다. 다만 청두에서 깐난으로 향하는 민지앙 줄기로 그 가파름을 예측해볼 뿐이다.

오지 원주민들과의 교류... '민심은 천심'

장정군은 자연스럽게 오지에 가까운 이 지역에 사는 이들을 만났다. 기존의 군대가 약탈과 무력으로 일관했던 반면 홍군의 질서를 지키는 군대였다. 이전에 군벌과 합작하던 국민당군과는 뭔가 다른 모습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민족들은 설득됐다. 자연스럽게 원주민들 가운데 홍군의 지원자가 생겨났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그른 것이 없었다. 장정의 가장 큰 기능 중 하나인 선무공작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홍군은 강희제와 건륭제가 정비했던 지역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각 지역의 원주민들에게 고통스러울 수 있었지만 거대한 중국의 영토는 이런 계기들을 통해 만들어져 갔다.

▲ 전진하는 홍군을 형상화한 석상. 쓰촨 추안주스(川主寺).
ⓒ 조창완
▲ 진사지앙 도강구에 있는 동상. 홍군과 현지인의 만남을 형상화했다.
ⓒ 조창완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