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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남 하백원의 생가 앞에 있는 수령 4백년 된 느티나무.
ⓒ 이철영
조선을 개창한 성리학은 4백여 년의 시간을 지나며 오히려 시대의 발목을 붙잡는 족쇄가 되었다. 집권층은 예송논쟁 등 공리공론을 주고받으며 권력장악에 골몰하였고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지식인들과 땅에서 유리된 백성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 시기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으며 명나라를 이어 중원에 새 바람을 불어 넣은 청나라마저 밀려오는 서구열강들 앞에 속수무책인 지경이었다.

▲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규남하선생기념사업회.
ⓒ 이철영
그곳에서 실학이 피어났다. 어떤 이들은 천주학을 내세우며 전통유학의 종언을 선언하고 한편에서는 유학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실학(實學)의 반대는 허학(虛學)이던가. 현실의 문제를 진단, 개혁하지 못하는 당대의 이데올로기와 지배층의 위민(爲民)은 허구임이 분명했다. 실학자들은 실사구시, 경세치용, 이용후생의 길을 제시했다. 그들은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한문서학서>(漢文西學書)를 통해 서학이자 청대의 학술인 천주교, 천문, 역상, 수리, 측량 등의 신학문을 흡수하고 있었다.

▲ 대전에 있는 국립중앙과학관이 하백원의 '자승차도해'를 기초로 복원한 자승차 모형.
ⓒ 국립중앙과학관 제공
권력의 변방이었기에 그들의 정신은 자유로웠고, 자유로운 정신은 인본(人本)과 과학과 새 시대를 열망했다. 나라가 온통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순조 34년, 전라감사 서유구는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라는 책을 보고 화순(옛 동복현)에 묻혀 살던 그 책의 저자인 실학자 규남 하백원(1781~1844)을 찾았다.

자승차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양식 수차의 원리와 같은 신개념의 자동양수기였다. 전라감사는 자승차를 가뭄 극복에 이용해 보고자 제작을 독촉했다. 그러나 실제로 제작되지는 않았던 설계도 만으로 급작스런 실전투입은 어려웠던 탓에 현장에서 이용될 기회는 얻지 못하고 말았다.

▲ <자승차도해> 표지(왼쪽)와 본문 28쪽.
ⓒ 이철영
하지만 이 일로 그는 '이재(理材)'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고 7년이 지난 61세에는 석성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벼슬은 생민(生民)의 이익을 보장하고 빈궁을 구휼하는 일"이라 믿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세금을 탕감해 주는 등 선정을 폈으나 토호, 향리들의 모함을 받아 1년여 귀양살이까지 하게 된다.

▲ <동국지도> 중 전라도 지도.
ⓒ 이철영
그의 발명과 탐구는 자승차에 그치지만 않았다. 나경적이 만든 것을 개량한 자명종은 안에 들어 있는 동자가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며 종소리를 집 바깥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천문도> <동국지도> <만국지도> 등도 제작했다. 그의 <동국지도>(조선전도와 8도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보다 51년 앞선 것이며 <만국지도> 또한 중국에 온 선교사 알레니의 것을 저본으로 한 것으로 한국에는 현존하지 않는 희귀본으로서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의 자승차에 대해 국립중앙과학관은 "세종대에 발명한 자격루 이후 시도된 자동화 기기이며, 강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수차를 회전시키는 것은 수력발전의 원리와 상통한다. 겨레과학의 선구자"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지난해에는 실물 모형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자 과학자이기도 했지만 학자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그의 선조들은 화순(동복)의 물염정을 중심으로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교류했으며 그 또한 시대에 대한 비판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 그의 선조들이 당대의 대학자들과 교류하고 강학이 이루어진 물염정.
ⓒ 이철영
그는 "문장은 진유(眞儒)의 사업이 될 수 없으며 우주의 모든 일을 모두 나의 기량 안에 두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농업, 공업, 상업, 어느 일이든 학문 아닌 것이 없다." "옛 선비는 오직 하나였으니 바로 학문이었고 독서(讀書)만을 지칭하지 않았으니 농공상매(農工商買)가 모두 학문이었다…" "지금의 선비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하나가 학문이요 둘은 문장이며 셋은 과업(科業)이니 소위 학문으로 일등인(一等人)을 자처하는 이름뿐이라…"하며 심성, 이기(理氣)논쟁에 경도되어 현실과 유리된 흐름을 비판하며 실학적 학문태도를 견지했다.

▲ 규남선생의 묘소에서 바라 본 무등산 자락.
ⓒ 이철영
무등산의 3대 절경인 규봉(圭峰)의 남쪽 마을에서 태어나 규남(圭南)의 호를 가졌고 다시 무등산 자락에 묻힌 그는 그가 꿈꾸었던 세상을 고대하며 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다. 규남 하백원은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 이재 황윤석과 함께 호남의 4대 실학자로 불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 사보 4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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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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