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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렷 경네!"

일제히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히 계시우."

아마 세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을 게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종례를 마치고 다들 집으로 갔다. 남자 애들은 축구공을 차며 운동장에 남아 있었지만 가시내들은 다들 집으로 곧장 갔다.

그 시각 나는 원치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 영희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친구와 무슨 뽀뽀라도 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작년 3학년 때도 그랬지만 올 해도 마찬가지다. 이젠 글자도 뗄 때가 되었건만 이 아이는 도통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깡통도 보통 깡통이 아닌지라 4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떼지 못하고 있다.

당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글자를 못 뗀 동무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교실에서 실례를 하는 바람에 창문을 죄다 열어야 했던 사고가 어디 한두 번이었는가. 그 즐겁던 학교가 늘 이런 식이니 방과 후 1시간이 싫어 학교 가기가 싫어지기도 했지만 도리가 없었다.

선생님께서 시킨 일이니 안 하겠다고 하면 그 또한 말씀을 거역하는 중죄에 해당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3학년 내내 아이들이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도 나는 학교에 남아 있었다.

무슨 원수라도 진 건지 선생님은 가장 공부를 못하는 영희를 또 내 짝꿍으로 정하셨다. 악연이 된 건 급장인 육남이는 열외로 하고 그 다음으로 공부를 잘 하는 나부터 배정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같은 마을이라 머리를 쥐어박을 수도 없다.

▲ 우리 학년 중에 3할은 그랬지만 유독 못하는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그래도 6학년을 마칠 때는 한글을 다 익혔다.
ⓒ sigoli 고향-맛객
카랑카랑 목소리만 큰, 지 아부지가 행여 내가 구박한 걸 아신다면 어떻게든 우리집에 와서 따질 것 아닌가. 도리 없이 선생님께서 맺어준 인연에 순응하며 방과 후 그날 배운 걸 다 터득할 때까지 거드는 수밖에 없다.

"영희야, 오늘은 잘 헐 수 있지?"
"…."
"그려 알았응께 열심히 허자."
"…."

자존심이 있을 턱이 없는 아이가 부끄러워서라기보단 입에 풀칠을 한 듯 늘 묵묵부답이다.

"야, 알았응께 얼렁 하고 가자. 니도 집에 빨랑 가야잖녀?"
"잉."
"자 읽어봐."
"이…."
"그 다음?"
"……."
"읽어보라니까."
"……."

복장이 터지지 않으면 다행이다. '순'자에 막혀서 이순신을 읽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머니가 만드신 가갸거겨 가나다라 표로 쉽게 한글을 깨친 나지만 이렇게까지 까막눈은 정도가 심하지 않는가. 30여 분을 골방 고리한 냄새가 나는 여학생 옆에서 애간장을 녹이며 글눈이 트이길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야, 영희야 그럼 내가 읽는 걸 따라서 해봐."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하여 읽었다.

"그럼 인자 니가 읽어봐라. 아까 선상님이랑 한번 읽었고 나랑 또 시번 읽었응께 괜찮을 것이여. 틀려도 괜잖당께. 찬찬히 읽어봐."

여지없이 내 기대를 저버리고 만다. 이제 운동장은 조용하다. 아이들은 각자 집으로 가서 뭘 하고 있을까? 꼴도 베어야 하고 어른들 일을 거들어야 하는 금쪽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웠다. 아마도 아이들 몇은 집으로 가는 정지동 잔디밭에 누워 나른한 봄을 즐기고 있을 텐데….

책상과 걸상이랬자 다 합쳐도 서른 대여섯 개다. 해가 유리창에 발그레 걸렸다. 어제는 산수 구구단 중 4단을 일주일째 외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던가.

복습이 어느 정도 되어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도록 선생님께 검사를 맡아야만 둘 다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늘은 도저히 해볼 방법이 없다. 영희에게 책보를 싸라고 하고는 교무실에 계신 선생님께 갔다.

"슨상니임."
"왜?"
"딴 게 아니구라우 공부 끝마쳤습니다."
"그래?"

철끈으로 서류철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는 박천환 선생님이다. 선생님이 "그래?"라고 했던 건 순전히 나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까마득히 잊고 계셨기 때문이다.

"슨상님 끝냈습니다."
"그래? 알았다. 집에 가그라."

선생님의 그런 태도에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화가 났지만 애써 참았다.

"야, 영희야 집에 가자."

마치 내가 무슨 죄를 지은 듯 기분이 나빠 책보자기를 손에 들고 학교 뒷길로 뛰어 집으로 갔다. 그 뒤론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때우다가 학교를 도망치듯 빠져 나갔다.

이튿날 아침, 조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아이들은 병주가 사온 무른 고무 축구공을 차며 진땀을 뺐다. 우리는 하루 여섯 시간 동안 공부라곤 두 시간 정도밖에 가르치지 않은 축구광 박천환 선생님을 오백환짜리 두 장이라 했다. 아이들은 선생님께 땀이 식기도 전에 또 제의를 했다.

"슨생님, 우리 축구차요?"
"맞아요. 축구차게 해주세요."

평소라면 "그래 오늘 축구하자"라며 아이들보다 먼저 가죽 공을 들고 밖으로 나가시던 분이지만 오늘 따라 아무 반응이 없으시더니 버럭 화를 내셨다.

"급장! 앞으로 갖고 오니라."
"예."
"야 이놈들아 축구를 어떻게 차냐? 내가 너희들 같은 학생들은 처음 본다. 공을 차든가 볼을 차면 모를까 어떻게 축구를 차느냐 이 말이야. 다들 운동장으로 모엿!"

▲ 초등학교 4학년도 우리에겐 천국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축구가 반 학과 공부 절반이었다.
ⓒ sigoli 고향-맛객
후다닥 교실을 박차고 나가 구령대 앞에 엎드려 있었다. 잔뜩 화가 나신 축구 선생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우린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엎드려 바쳐'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어서! 똑바로 들어.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공을 차는 거다. 축구는 하는 거지 차는 게 아니야. 알았냐?"
"……."

"예" 라고 했다면 그냥 끝날 일이었다. 누구도 선생님 본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우리는 뜬금없는 선생님 불호령에 어안이 벙벙하여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요놈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엎드려. 안 되겠다. 맞아야 정신을 차릴랑가 보네."

아래로 내려오신 선생님께서 여섯 때 씩을 때렸다. 그 뒤 생애 처음으로 20여 분간 제식훈련을 받았다.

"자, 그럼 오늘은 축구를 한다. 당번이 창고에 가서 축구공 꺼내 오거라."

수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이 시간은 음악시간이지만 선생님 재량에 따라 축구 강의로 시작하여 실전을 반복하는 지옥훈련 시간으로 바뀌었다. 몸소 선생님께서 공을 어떻게 다루고 상대를 어떻게 젖히는지 시범을 보인다.

"자, 축구로 말할 것 같으면 펠레 선수처럼 해야 된다. 신동이야. 신에 가깝지. 앞에 다섯 명이 있어도 펠레는 거침이 없거든. 부라질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웅이야. 선생님 잘 따라서 하면 너희들도 할 수 있다. 공을 바짝 몸에 붙이고 떨어지게 하면 안 되는 거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몰랐다. 축구라면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면 되고 키가 큰 아이가 무조건 더 잘하게 되었다는 상식밖에 모르고 있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자신의 해박한 축구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때 아닌 선진축구를 주입하고 있었다.

남녀학생을 뒤섞어 두 패로 나눴다. 선생님은 밀리는 편이었으니 수시로 바뀌었다. 40대 중반이었던 선생님은 체육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대단한 몸집에 현란한 몸짓, 상대의 기를 제압하는 거대한 목소리로 주눅이 들게 하다가 골대 앞에서 사사삭 빠져나가 슬쩍 밀어 넣었다.

"꼬링!"

펠레가 날고 뛴다기로서니 이보다 축구를 잘 하는 사람을 없을 듯 대단했다. 종이 땡땡 울려도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10:9로 양편이 거의 비슷했지만 점수는 중요하지 않다. 쉬는 시간을 포함해 두 시간째 이어지다가 세 시간으로 접어들어도 시합은 계속되었다.

"슨생님 정심시간인디요."
"그러냐? 밥들 먹어라."

온 몸이 흥건하게 적실 때까지 하고도 밥을 먹자마자 아이들끼리 축구가 이어졌다. 녹초가 되었지만 이제 애들은 신들린 듯 빠져 있었다. 남녀 구분이 없던 때라 서로 축구공을 잡고 상대방 골대 앞에까지 달려가 던져서 넣는 육박전으로 바뀌었다.

축구가 아니라 상대방 머리채를 잡아채기도 하고 몸으로 부딪히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 터에 수도 없이 남자애들의 고추를 구경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우리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는 길에 신작로에 누워 한참 동안 있다가 겨우 집에 갈 수 있었다.

4월 어느 날 시작된 광란의 축구 경기 후 우린 선생님과 나머지 1년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축구에 빠져 살았다. 또한 남학생들끼리 남아서 공을 차다가 교실 유리창을 몇 개나 깨트렸는지 모른다. 고희에 가까워진 선생님은 지금도 축구를 즐기실까?

덧붙이는 글 | 김규환 기자는 시민기자, 농민과 함께 <고향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련한 추억과 어머니 손맛, 시골집이 그립거든  시골아이고향☜ 에 놀러 오시기 바랍니다. 

이 기사는 월간 <여행스케치> 5월호에 실릴 예정이며 SBS 유포터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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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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