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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화산(지금의 미륵산)에서 바라본 미륵사지 전경.
ⓒ 이철영
설화의 내용대로 백제 무왕은 천한 신분이었을까, 아니면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한' 사람이었을까, 정말 선화공주와 더불어 신분과 국경을 넘은 '찐한' 사랑을 했을까?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홀로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면서 못 속의 용과 관계를 맺어 장을 낳았다. 어릴 때의 이름은 서동이며,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항상 마를 캐다가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은 이로 이름을 삼았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가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짝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삼국유사 '무왕조'-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 복원한 미륵사 미니어처. 미륵사는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과 목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그 좌우 동원과 서원에 각각 석탑과 금당을 배치한 '3탑 3금당' 양식으로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 가람배치와 차이를 보인다.
ⓒ 이철영
무왕은 서기 600년에 즉위했다. 무왕 즉위 50여 년 전에 신라 진흥왕과 전쟁을 벌이던 '성왕'은 목이 잘린 채 머리만 신라의 저자거리에 묻혔고, 가야지역과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눈치를 보며 겨우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지경이었다.

국내적으로도 신라와의 전쟁에 진 뒤 왕권은 약화되어 좌평을 중심으로 한 대성8족(大姓八族)이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더욱이 무왕 즉위 전의 혜왕과 법왕은 재위 기간이 2년을 넘지 못하는 정국의 불안이 지속되고 있었다.

▲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는 1만 9천 3백여 점의 출토유물 중 4백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대형 토기.
ⓒ 이철영
이 시기 무왕의 즉위는 조선조 말 무소불위의 안동 김씨 권력이 강화도에서 땔나무 하던 철종을 선택한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상갓집 개'로 불리며 목숨을 보존했던 흥선 대원군이 고종 즉위 이후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 과정과도 오버랩된다.

무왕이 왕위에 오르게 된 사연을 보자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의 '서동요' 퍼트리기 공작과 그녀의 내쫓김, 그리고 둘의 극적인 만남과 사랑, 진평왕이 황금뇌물을 받고 기뻐하여 사위로 맞아들이는 과정뿐이다. 그러나 즉위 이후 무왕의 행보는 이전의 설화와는 판이하다.

▲ 무쇠솥.
ⓒ 이철영
그는 즉위 이후 신라를 12번이나 침공하였고 황룡사보다 두 배는 큰 미륵사를 세워 신라 공격의 정치, 군사적 전초기지로 삼았다. 설화라지만 그렇게 애틋한 사랑을 해놓고 장인 나라를 그렇게 공격할 수 있을지 궁금한 일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 이전에도 신라와 백제는 전쟁의 와중에 왕실간 혼인을 한 사례가 있었다. 그렇지만 무왕만큼 신라를 끈덕지게 공격한 왕은 없었다.

▲ 청동보살손.
ⓒ 이철영
그는 왕이 되기 힘든 조건에서 출발했으나 왕위에 올랐고 국운이 다해가는 백제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 임금이었다. 그는 의도적이던 아니던 간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한미한 계층의 사람도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주었으며 또한 미륵사 창건을 통해 자신이 미륵 세상의 통치자인 '전륜성왕'임을 암시했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행차하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도착하니 미륵삼존이 못 속에서 나와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왕비가 왕에게 말하였다. "이 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제 간곡한 소원 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 메우는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허물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중략) 절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삼국유사 무왕조-


▲ 1992년에 복원하여 세운 미륵사지 동원 9층석탑(높이 27.8m).
ⓒ 이철영
▲ 미륵사지 당간지주(4m, 통일신라시대).
ⓒ 이철영
그는 이를 통해 오랜 기득권 세력인 귀족들을 견제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효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무력 이외에도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적극 활용한 전략가이자 대중선동가로서의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그 중심에 금마(지금의 익산)와 미륵사가 있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금마(익산)가 무왕의 별도(別都)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왕의 또 다른 거처이기도 하거니와 유사시에는 임시수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음을 뜻한다.

▲ 금당지(동금당).
ⓒ 이철영
익산은 그의 든든한 정치적 지지 기반이자 신라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전략요충지였다. 이는 훗날 조선의 정조 임금이 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운 수원 화성의 정치적 의미와도 상통한다. 그러나 웅장했던 미륵사의 위용은 모두 세월 속에 흩어지고 닳고 닳은 몇 개의 돌덩이만이 남아 무왕의 야망과 사랑 이야기를 바람결에 전해준다.

옛날의 크나큰 절 이제는 황폐했네/외로이 피어난 꽃 가련하게 보이도다/기준왕 남하하여 즐겨 놀던 옛터건만 /석양에 방초만 무성하구나/옛일이 감회 깊어 가던 걸음 멈추고/서러워 우는 두견 쫓아 버렸네 /당간지주 망주인 양 헛되이 솟아 있고 /석양의 구름 아래 저물음도 잊었어라

-조선시대의 문인 소동명(1590~1673년)의 '미륵사를 지나며'-


▲ 미륵사지 인근 백제 왕궁터의 5층석탑(8.5m. 국보 제289호).
ⓒ 이철영
1400년의 세월 속에도 살아남아 미륵사를 상징하던 미륵사지석탑은 지금 복원을 위한 해체작업에 들어가 있어, 무왕과 백제의 꿈이 어린 그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당분간은 볼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 사보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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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재했던지가 10년이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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