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주 추운 겨울이 막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제 꽃샘추위만 한 차례 지나고 나면 겨울은 이제 다음 겨울을 위해 긴 휴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봄의 여신에게는 긴 겨울이 곧 끝나고 새록새록 푸릇푸릇 봄이 올 것이라는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릴 전령이 필요했습니다. 따스한 햇살, 바람 그리고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흙의 마음까지 다 담아 "봄이 왔어요!" 온 몸으로 알려줄 '봄의 전령'이 필요했던 것이죠.

ⓒ 김민수
모든 편지가 그렇듯 "봄이 왔어요!"라는 소식을 제 때 전하기 위해서는 봄이 오기 전에 편지를 써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봄이 아직 저만치 있는 계절, 즉 엄동설한 겨울에 미리 편지를 써놓아야만 추운 계절이 끝나자마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거든요. 이미 봄이 완연한데 "봄이 왔어요!"하는 것은 뒷북치기와 다를 것이 없지요.

봄의 여신은 아주 작은 봄의 기운만 있어도 피어날 수 있는 꽃들을 찾았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꽃들이 봄의 여신에게 왔지만 그 많은 꽃들 중에서 온갖 바람꽃과 이름에 겨울이 들어있는 꽃인 동백(冬柏)과 설중매(雪中梅-梅花)와 얼음새꽃(福壽草)이 선택되었답니다.

봄바람이 한번만 불어오면 살랑거리며 피어나는 온갖 바람꽃들은 숲 속 깊은 곳이나 바위 틈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들은 겨울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났기 때문에 주로 숲 속의 동물들이나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봄소식을 전하는 전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백과 매화와 얼음새꽃은 그들에게는 물론 사람들에게도 봄을 전하는 전령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죠.

많은 꽃들은 그들이 봄의 전령이 된 것에 대해 시샘을 했지만 그들만큼 부지런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추운 겨울 언 땅을 녹이며 피어나는 인내심도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피었다가도 꽃샘추위로 그동안 애써 피운 꽃이나 이파리가 짓물러버리는 아픔 같은 것들도 감내하기는 싫었습니다. 더군다나 동백처럼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자기를 놓아버릴 용기 같은 것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봄의 여신이 어느 날 봄의 전령들을 불러보았습니다.

ⓒ 김민수
"동백아, 너는 지난 봄, 여름, 가을, 겨울 온전히 사계절 꽃봉오리를 품고 있다가 겨울부터 꽃을 피우더구나. 그리 짧은 순간 피었다 너를 놓아버리는 이유는 무엇이냐?"

"언제나 아름답게 기억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언제나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이니?"

"그것은 한결같은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놓아버리려면 아프지 않느냐?"

"아픔이 없는 것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래, 넌 '겸손한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을 주겠다. 너로 인해 봄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겸손한 아름다움이 가득하기를..."

ⓒ 김민수
"설중매야, 너는 꽃도 아름답지만 그 열매로 인해 더 많은 이들을 기쁘게 하는구나. 네 열매에 그리 깊은 향기를 담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냐?"
"한 겨울 추위가 서려있어서 그렇습니다."

"한 겨울 추위는 아픈 것이 아니냐?"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동백처럼 낙화하고 싶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흰눈처럼 꽃잎을 하나씩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꽃잎을 놓아버릴 때마다 내 속에 깊은 향기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놓아버린다는 것은 무엇이니?"
"비운다는 것입니다."

"비우면 허전하지 않느냐?"
"비우지 않고서는 채울 수 없습니다."

"그래, 넌 '인내 혹은 고귀함'이라는 꽃말을 주겠다. 너로 인해 봄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인내함을 통해 고귀한 삶 이뤄지기를..."

ⓒ 김민수
"얼음새꽃아, 너는 꽃이 진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도 끝내 다시 피어나는구나. 그래, 너의 흔적이 사라진 후 잊혀진다는 것이 슬펐을 터인데, 그 슬픔이기고 활짝 웃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
"누군가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이가 있다는 희망 때문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없을 수도 있는 것 아니니?"
"이 세상에 신의 숨결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깊은 땅 속에서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보낼 때 꿈을 꾸게 한 그 분, 그 분이 있어 그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답니다."

"깊은 어둠과 같은 땅 속에서 어떻게 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지? 보이는 것도 없을 터인데."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바람도 그 중 하나겠지요."

"그렇겠구나. 그래 넌 '영원한 행복'이라는 꽃말을 주겠다. 너로 인해 봄소식을 듣는 이들마다 영원히 행복하기를..."

이렇게 봄의 여신은 봄의 전령이 될 꽃들의 꽃말을 붙여주고는 그들의 이파리와 꽃잎이나 꽃술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 끝날 것이니 부지런히 봄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바람꽃들아, 이리로 와서 도와주렴."

저 멀리 제주에서 세바람꽃, 변산반도에서 변산바람꽃, 만주땅에서 만주바람꽃, 설악산 깊은 숲 속에서 나도바람꽃, 나도바람꽃의 친구 너도바람꽃, 숲 깊은 곳에서 숲바람꽃,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홀아비바람꽃, 어디든지 맘껏 날아다닐 수 있는 꿩의바람꽃이 봄의 여신의 정원으로 날아왔습니다.

"너희들이 편지 쓰는 일을 도와줘야겠다."

ⓒ 김민수
바람꽃들은 그 마음이 바람을 닮아 바위틈이나 깊은 산골짝 혹은 햇살 한줌 잠시 비추었다 이내 사라지는 그 곳까지라도 구석구석 갈 수 있었습니다. 아직 겨울은 끝나지 않았지만 바람꽃들의 바람이 한번 스치고 지나가면 세차게 불던 겨울바람도 이내 따스한 봄바람이 되어 그들의 날개가 되어주었습니다. 바람꽃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새싹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아직 수줍은 듯 꼭 다물고 있는 꽃봉오리마다 봄의 여신이 붙여준 꽃말들을 소곤소곤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편지 쓰는 방식이지요.

바람꽃들이 소곤소곤 들려주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숲에서 잠자던 것들이 하나 둘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봄이 깨어나면 지난 겨울 잘 지냈느냐고 인사를 나눕니다. 그들 모두 자기들 속에 새겨진 마음들을 담아 인사를 나누죠.

봄의 전령들, 그들에게 봄의 여신이 붙여준 꽃말들은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서 꽃 이름과 함께 불려지고 있답니다. 그들이 있어 봄이 온다고 믿는 사람들은 겨울이 지나갈 무렵이면 어느 누구보다 그들을 가장 먼저 만나는 꿈을 꾼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동화는 한국가스안전공사 사보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