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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 아저씨랑 무슨 말 했어?"
"어엉… 나보고 그래마 스쿨 다니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랬더니?"
"공부 열심히 하래요. 자기처럼 페인트 일 같은 거 안하려면…."
"설마… 정말 그랬단 말이야?"
"네, 그러면서 자기도 캔버라 그래머 스쿨 나왔대요. 근데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좋은 직장을 못 다니고 이렇게 고생한다는 말도 했어요."

집수리를 겸해서 내부 페인트칠을 새로 했던 두 주 전쯤, 인부 네 명 가운데 며칠 후에 합류한 사람 하나가 하루는 학교에서 막 돌아온 아들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물 한 잔, 차 한 잔을 내놔도 더없이 깍듯하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미루어 일 역시나 책임감 있고 성실하게 할 거라는 믿음이 가던 차에 아들애와 그런 의외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호주 사람들 가운데 자기 직업과 관련해 그런 식의 '자격지심' 내지는 자조어린 속내를 드러내는 일을 일찍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 우리 눈에 비치는 호주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높고 낮고를 떠나 그야말로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 실천하며 사는 듯이 보인다.

적당한 예가 될지는 모르지만 가령 쓰레기를 치거나 잔디를 깎고, 청소를 하는 이른바 막노동자라 할지라도 육체의 피로에서 오는 고단함은 있을지언정 사회적 인식이나 직업에 대한 편견과 냉대, 차별로 인한 심적 고달픔이나 설움은 당하지 않는 곳이 바로 호주가 아니던가.

우리 집 일을 해 준 사람들만 해도 얼굴에 여유만만한 표정이 흐르고, 잡담을 주고받으면서 작업시간 내내 흥겹게 일하다가 오후 세 시가 되면 딱 일손을 놓고는 '우리는 이제부터 맥주를 마시러 가노라' 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호탕하게 내뱉지 않았던가.

속된 말로 오후 세 시면 다른 일을 한 탕 더 뛸 수도 있으련만 '하루의 일은 이것으로 족하다'며 금복주 같이 불쑥 나온 배를 슬슬 문지르며 '술통(배)을 채우는 것도 일생에서 일만큼 중요하다'며 유쾌한 농담을 건네던 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사는 일에 찌든 구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대부분 호주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와 같고, 수직상승욕구와 무한경쟁심을 부채질해대는 사회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자기 일에 자부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기 멸시감을 조장하지는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원조 오지'의 입에서 그런 투의 한탄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라웠던 것이다.

물론 어린 애와 주고받은 말 한마디를 통해 섣부른 평가와 내 식의 결론을 내릴 일은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대접받는 이런 좋은 나라에서 직업에 대한 불만족으로 자기 비하적인 발언을 할 정도라면 짐작컨대 그가 가진 내면의 고통이 적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수도 캔버라에서 세칭 명문 사립 고등학교를 나와 나이 40이 될 때까지 이런저런 인생항로를 거치는 동안 이 먼 타운스빌까지 허드렛일을 찾아와야 했던 자신의 신세가, 자신이 나온 그래마 스쿨을 다니는 우리 아들을 보자 일순간 한심하게 느껴져 무심코 뱉어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인부 네 사람 중에서 가장 공손하고 조심성 있게 내 일처럼 마무리를 하는 모습이 고맙던 차에 그런 아픔과 좌절을 품고 있었다면 일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도 모르게 불쑥불쑥 짜증이 났을 법도 하건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봐도 아들애에게 훈계삼아 한 소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제도와 시스템 이상의 존재인 법이니, 아무리 사회가 평등하고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 해도 개개인의 꿈과 이상, 좌절과 회한이라는 다중적이고 결 깊은 스펙트럼을 총체적으로 여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 것도 자명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잘난 자와 못난 자의 사정을 최대한 감안하여 사회 구성원 대다수를 되도록이면 차별 없이, 서러움 없이, 한 맺힘 없이 한 세상을 평탄하게 살게 하려는 최선의 사회적, 제도적 배려에도 불구하고 마땅치 않은 자신의 삶에 지친 영혼이 이 나라라고 해서 없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모자란 생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방황하는 영혼이 절대다수인 사회는 분명 병든 사회일 것이다. 우리 애와 대화를 나눈 그 사람의 상황이 극히 예외적으로 인식되는 그 자체가 바로 건강한 사회에 대한 반증적 예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가 어떤 삶의 길을 걸어왔는지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 사는 한 그는 여전히 기회가 있고 선택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만약 호주인으로서 현재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고쳐 살 수 있는 결단을 하는 일에 사회가 도움이 되지 못하고 거치적거리는 일은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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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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