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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시장 풍경 2
ⓒ 인권위 김윤섭
새벽 5시. 모텔을 나서지만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언 몸을 녹이는 사람들로 붐비던 인력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한때 잘 나갔다는 양동, 쌍촌동, 유동네거리도 이젠 옛이야기다. 용봉초등학교 육교 밑 '일일근로자 대기소'로 들어서자 '목수, 용접, 아시바, 조적, 철근, 비계, 사포, 건물청소'라고 씌어 있는 입간판이 불을 밝히고 있는 바깥 풍경과는 달리 대기소 안은 썰렁하다.

"이곳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가정을 위해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술값을 벌기 위해 나오는 사람도 있고, 성격장애로 직장생활을 할 수 없거나 노숙자가 되기 직전인 사람도 있습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와 내밀던 근로자대기소 소장 배장인(가명)씨의 말이다.

모닥불도 사라져 더욱 초라해진 인력시장

바뀐 건 그것만이 아니다. 신용불량자는 흔한 존재가 돼 버렸고, 사업하다 망해 도피 중인 사람, 보증 잘못 섰다가 사직서 내고 찾아온 사람, 자녀들 교육하느라 새벽예배 인도하고 나온 개척교회 목사, 사양길로 접어들어 빚만 늘어난다는 모텔 주인, 아르바이트 대학생 등등 그 사연들이 진풍경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력시장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있다. 20~30대 청년실업자들이 대거 인력시장으로 몰려들면서 50~60대들은 설 자리를 잃었다.

경기의 흐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다는 인력시장은 이렇듯 옷깃을 바싹 여민 채다. 청년 실업자까지 가세한 터라 임금도 예전 같지 않다. 제법 호황을 누리던 1994~1995년만 해도 잡부 일당이 7만5000원에서 8만5000원에 거래됐으나 지금은 기능공이건 보조건 1만원씩 내렸다.

"이쑤시개, 못 하나까지 중국에서 들여오는데 방법이 있겠습니까.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고 상가들이 생겨나야 경기가 살아나는데 주택들 개보수는 물론이고 하루에도 수십 개의 점포들이 문을 닫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느끼는 체감온도를 말하라면 IMF 때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다는 겁니다."

하필이면 비까지 내려 다급해진 소장의 마음이 한눈에 읽힌다. 일용근로 대기소도 그 생명성이 일간신문과 같아서 앞으로 1시간만 더 지나면 파장이다. 그 점을 알고 있다는 듯 소장은 어디론가 부지런히 전화를 건다.

▲ 새벽풍경 4
ⓒ 인권위 김윤섭
근로자들이 얼굴을 내민 건 6시가 넘어서였다. 아차하면 공치는 날씨 탓인지 어기적거리며 대기소로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반신반의다. 마흔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는 비도 오고 해서 하루 쉬려고 했는데 마누라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마지못해 나왔다며 오늘의 운세로 화투 패를 놓는가 하면, 또 어떤 사내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문다.

그때, 수화기를 내려놓던 소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오늘 누가 질통 벽돌이나 모래를 나를 때 짊어지는 통 한번 멜래? 아파트 2층 수리다."
"거리가 어쩌요? 여기서 가찹소?"
"장성 가는 길목이다."

순간, 대기소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거리도 거리지만 왕복차비를 염두에 둔다면 내키지 않은 현장이다.

"그러지 말고 소장님, 한 번 더 전화해서 이리 델러 오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러면 상명이 니가 갈래?"

감 잡았다는 듯 전화를 다시 건 소장은 현장 오너와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더니 택시비 5000원을 건넨다.

"오야지 작업 책임자, 소사장한테 말해놨으니까 일 끝나면 택시비 만원은 현장에서 받아와야 한다."

소장의 말마따나 그날은 전화를 걸어 일을 붙이는 곳마다 장성이라느니, 담양이라느니 거리가 멀었다. 때 아닌 비가 말썽을 부린 탓이었다. 그렇다고 더운 밥 찬밥 가릴 때는 아니었다. 머잖아 다가올 비수기(12~3월)를 생각한다면 그마저 감지덕지한 일이다.

노가다 인생 노가다 설움

▲ 새벽시장 풍경 1
ⓒ 인권위 김윤섭
13명이 대기소를 찾아와 11명이 현장으로 나가고 2명이 남은 인력시장의 아침. 김양문씨와 이준호(가명·40)씨를 앞세워 식당으로 향한 건 아침 8시가 넘어서였다. 소주부터 시켜 잔을 건네자 주방기기 사업에 손을 댔다가 어음 두 장을 막지 못해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준호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땐 막막했습니다. 나는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도망을 다녀야 했으니까요. 통장을 하나 갖고 싶어도 신용불량자 신세라 그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을 마치면 현금을 쥘 수 있는 새벽시장으로 나섰다.

"처음엔 두세 달만 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이 바닥이 그렇습니다. 마약 성분이 있습니다. 발을 내디뎠다 하면 빼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대를 졸업한 그에게 첫 사업 실패는 그만큼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아내와도 별거 중이라는 그는 한 번의 실패에 세상의 바닥을 보아 버렸다며 연거푸 술잔을 비웠다.

"대기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일주일형, 보름형, 만땅형으로 구분되는데 저 사람이 가정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출근시간을 보면 압니다. 아침에 일찍 나오는 사람이면 십중팔구 가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준호씨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1990년 일본의 일용근로자들을 찾아갔을 때가 생각났다. 일반인에겐 출입금지 구역이나 다름없는 근로자합숙소를 찾아가 한국의 일용근로자들은 대부분 가정을 갖고 있으며, 출퇴근을 하고 있다고 하자 동경의 우에노와 오사카의 이쿠노쿠에서 일하는 그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그만큼 일본의 자본주의가 낳은 일용근로자들의 현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는 것 자체가 꿈같은 것이었다.

일본의 일용근로자들과 두어 날을 함께 지내며 목격했던 그곳 이야기를 들려주자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으로 준호씨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바닥이 그래요. 노가다 인생한테 시집오겠다는 여자도 없겠지만 가정을 꾸리기엔 불안해요. 인부는 30명이어도 일이 없어서 하늘만 쳐다볼 때가 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인부가 모자라서 발을 동동 구를 때가 있거든요."

된장국처럼 구수하게 우러나는 사람들

실제 나이는 마흔다섯이지만 얼굴에 나타난 나이로 본다면 쉰이 훨씬 넘어 보이는 양문씨. 도계로, 삼척으로 탄광을 전전하다 폐광과 함께 이 바닥으로 흘러들었다는 그는 술잔을 비울 때마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논산에 사는 아내가 아동복 가게를 한다고 했다가 술 한 잔 더 들어가면 젓갈공장 사원으로 바뀌곤 했다.

술잔을 비우다말고 이것이 내 마누라고, 이것이 대학교 다니는 딸이라며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 주던 그가 대뜸 '슬라개'의 뜻을 아느냐고 물었다.

"슬라개 슬라개, 마개 마개가 뭔 말인 줄 아셔유? 서서히 서서히 빨리 빨리라는 뜻이여유. 일당 받고 사는 노가다 인생이 그래유. 빗자루 들고 잡일하다가도 공구리 콘크리트 칠 때면 쏘나기 퍼붓듯 일해유. 그래도 한잔 걸치고 노래방에 갔을 때가 가장 살맛나유.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한 곡 때리면 딱입니다, 딱!"

밥값보다 술값이 더 많이 나온 식당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오자 며칠 전 대기소 소장한테 돈을 빌려 방을 얻었다는 양문씨가 손을 흔들어대며 한마디를 남긴다.

"그래도유, 술을 마심스로 이야기를 해보면 된장국처럼 구수하게 우러나는 사람이 있어유. 나는 그런 사람이 좋아유."

준호씨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술잔을 내밀듯 이런 말을 들려준다.

"다른 건 다 이해하겠는데요, 연봉 팔천 받는 사람들이 이천 더 올려 일억 받고자 데모하대요. 그런데요, 일당 7만원 받으려다 그것마저 못 받고 쫓겨나는 사람도 있대요. 한 사람은 비행기를 타고 한 사람은 비계 건축공사 때에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가설물 로프를 타는데, 대한민국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 말은 듣지 말아야 했던 모양이다. 하루해가 참으로 길게 느껴졌다. 대기소를 찾아갔던 새벽 5시부터 식당을 나온 오전 10시까지가 1년처럼 느껴졌다.

▲ 새벽풍경 3
ⓒ 인권위 김윤섭
다음날 새벽, 대기소를 다시 찾아갔다. 소장의 말처럼 광주에만도 300여 개의 대기소가 난립해 있다고 하니 한 대기소에 20명만 잡아도 광주의 인력시장은 6000여 명이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영광원자력발전소에서 배관과 전기, 페인트, 프레싱 관 청소하는 일 으로 12년을 일하다 후배의 권유로 인력시장에 발을 내디뎠다는 김삼룡(57)씨. 대기소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축에 드는 그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봐요. 현장에 일을 나가면 퇴짜 맞을 때가 많아요."

하지만 김삼룡씨는 소장이나 동료의 말을 빌리자면 대기소에서 가장 성실한 사람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사람이다. 물론 소장도 그가 처음 찾아왔을 때 돌려보내려고 했다. 한눈에 보아도 몸이 허약한 데다 나이마저 쉰을 넘겨 인부를 하기엔 조건이 바닥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루만 일을 시켜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음날 일 나간 현장에서 전화가 걸려온 모양입니다. 어제 일 나온 사람 다시 보내 달라고."

일당이 조금 낮더라도 대기소를 옮기지 않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구조조정의 여파가 일용근로자들에게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그는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나이가 많다 보니까 귀만 열어 놓고 삽니다. 입을 놀렸다간 밥을 벌어먹을 수가 없어요. 7만원 주면 7만원 받고 8만원 주면 8만원 받습니다. 잡부일을 하더라도 6만5000원 이하로는 아직 안 떨어지니까 기능공들이 스무날 해서 벌 것을 나는 한 달 일해서 법니다."

하지만 다섯 식구가 살기엔 턱없는 액수다. 거기에다 삼룡씨는 두 딸이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꼬박 한 달을 일해도 20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노가다 일이야 힘들어도 좋지만 교육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고등학생 둘이면 동료들한테 술 한 잔 사는 일이 겁이 납니다. 그래서 술도 혼자 마실 때가 많습니다. 겨울이 다 돼가는데도 우리 집이 보일러를 때지 않는 것도 그래섭니다. 지금부터 틀어버리면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는 일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어제처럼 새벽 6시를 넘어서자 인부들을 데려갈 현장의 차들이 육교 밑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빌딩청소부로 일을 나간다는 삼룡씨를 따라가 볼 요량으로 육교 밑에서 차를 기다렸으나 현장 소장은 "만약 당신이 따라오면 이 인부를 받지 않겠다"라며 손사래를 쳤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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