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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옛 산성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남북 양쪽기슭에 무너져 내려 쌓인 돌덩이들이 이런 느낌에 부채질했다. 생각 밖으로 다닥친 바위산, 바윗돌들 풍경이라 미처 예비지식을 갖추지 못한 나로서는 한식경이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하긴 부질 없는 느낌만이 아니었다. 몇 리나 뻗어나간 바위산, 바윗돌 산등성이 구간을 지나니 가파른 산등성이가 사라지면서 아득한 산정벌이 이어 선다. 리경호씨는 여기를 평봉산이라 부른다고 했는데 그 말과 같이 사방에 눈 주어도 나무숲으로 덮인 평탄한 산정벌이고 이 산정벌 남쪽은 여러 군데가 등골이 오싹해 나는 낭떠러지 절벽이다.

산정벌을 또 몇 리 줄이다가 산봉을 이룬 두 낭떠러지 사이 홈을 따라 나무숲을 내리 헤치는데 가로지르며 무너져 내린 바윗돌들이 앞을 막아섰다. 눈에 묻혀버린 세계라 별 생각이 없이 바윗돌 위를 걸어 지나는데 김삼씨가 소리 질렀다.

"리 선생, 그저 지나칠 돌무지가 아닌데요?!"
"…?"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필자는 와뜰 놀랐다. 정말이지 순간적으로 숨이 척 멈추어서는 기분이었다. 아래쪽을 보니 인위적 축조가 선명히 안겨들었으니 말이다.

"아니, 이거 고구려시기 석성(石城)으로 알려지는 고구려 옛 장성이 아닌가!"

급기야 여기저기를 살펴보니 돌무지는 모두가 무너져 내린 채 좌우로 수십m나 뻗었는데 석성의 너비는 2m를 넘기지 않아 보이였다. 나무숲 속에 잔나무가 꽉 서린 데서 그 이상 더 나가보지는 못했지만 북동쪽으로 뻗은 석성은 두 산 사이 골 안 물홈에 이르러 동강났다.

다시 돌아와 그 높이가 1m도 넘는 석성-돌성벽 아래구간에서 제각기 기념사진을 남기는 필자와 김삼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동행한 리경호씨도 그 흥분 속에 젖어들었다. 역사 속에 깊숙이 빠져들며 자연과 하나 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우리 일행이 이미 산기슭 아래로 사라진 데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민가의 점심참이 기다리는 판이라 산을 내려야 했지만 생각은 저 위쪽 두 바위산 사이 석성에로 가 있었다. 때는 점심 12시와 1시 사이었다.

귀가 후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연변문물휘편>(한어문)을 펼쳐든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만 싶은 심경이었다. 고대문물편 제5장 고구려시기 제2절 제5부분에는 과연 "옛 '장성' 유적" 조목이 적혀있었는데 고구려장성이라 일컫는 장성은 화룡시 팔가지진 구세동에서 시작하여 화룡시 서성, 용문 구간을 거쳐 용정시 세린하, 로투구, 동불사, 팔도 그리고 연길시의 연집, 도문시의 장안진 계림북산에 이르면서 지금의 연길시 북쪽 산등성이에 수백m 구간의 석성을 남겨놓았다니 그럴 만도 했다. 다른 자료들에서는 하나 같이 옛 장성의 시발점을 화룡시 원 토산진 동산촌 동산구간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었다.

필자는 다시 대학동창인 류연산씨가 쓴 기행문 <연변의 고구려 산성>을 펼쳐들었다. 2003년 <연변문학> 5호와 6호에 실린 연속기행인데 고구려장성에 관한 해당 자료연구와 현지답사를 결부하여 쓴 기행이여서 신빙성이 있어보였다. 그중 한 단락은 이러했다.

"연집 대암촌에서 북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는 장성을 대암 옛 장성이라고 한다. 지금도 병풍산 동쪽 끝에서부터 동쪽의 돌벼랑사이의 산어구의 남측에는 300메터(m) 길이의 석성이 있다. 그 넓이는 1.8메터, 남아있는 높이는 0.7~0.8메터이다. 돌벼랑의 동쪽으로부터 동남으로 방향을 꺾어서 소연길하골의 서쪽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은 대개 흙으로 쌓은 것인데 그 길이는 5리나 되는데 보이는 곳도 있고 전혀 흔적이 없는 곳도 있다."

그럼 이 장성은 고대 어느 시기의 창조물인가, 이를 두고 <연변문물휘편>은 옛 장성의 연대 문제는 학계의 설법이 서로 다르다면서 고구려시기 설, 발해시기 설, 동하국시기 설, 고려조시기 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편집진은 '고구려 통치시기'로 잡는다면서 그 근거들을 내놓았다.

또, 이 책에서는 옛 장성은 화룡시 원 토산진 구간부터 도문사 장안진 구간까지 길이 100여km고 훈춘시 경내의 옛 장성과 이어졌는지는 보다 더 깊은 조사와 연구가 있어야겠다고 했다. 1988년까지의 연구결과이다, 했으나 류연산씨는 화룡시, 연길시, 도문시 구간의 옛 장성이 훈춘시 옛 장성과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옛 장성에 관계되는 해당 자료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현지답사를 거쳐 내린 주장이었다.

역사학자인 필자는 류연산씨의 주장에 동조되었다. 전공이 고대역사분야는 아니더라도 이 면에도 흥취를 갖고 많은 책과 자료들을 보며, 현지답사를 하며 일가견을 가진 필자였다.

연길시 북쪽외곽으로 되는 대암의 서북쪽 산등성이를 따라 걷노라면 사방이 환히 펼쳐진다. 산구인 서북쪽과 북동쪽 구간은 그만두고라도 구릉지대로 되어있는 동서 남쪽구간에 시선을 던지면 옛 장성의 좌우 양측에 수십 자리의 돈대(墩坮)가 세워져 료망대나 봉화대로 쓰이었다는 것이 실감나게 안기여 든다.

대암 서북쪽 산등성이에서 보이는 돈대만 해도 연길시 주변의 구릉지대에 우뚝 솟은 동쪽 저 멀리의 청차관(清茶馆)돈대, 모아산 돈대, 의란진 동흥촌 구간의 대돈대를 들 수 있는데 연길시 공원의 서쪽 정자자리 소돈대는 직접 한 눈에 볼 수 없을 뿐이다.

필자 일행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시는 이렇듯 고구려 시기 옛 장성과 그에 속한 옛 돈대도 갖고 있는 역사와 문화가 유구한 고장이다. 누군가 중국의 명산—태산에서는 살아 움직이는 역사를 만날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 연길시 외곽산들인 평봉산은 물론 곳곳에 두루 2000년을 자랑하며 살아 숨쉬는 역사를 만날 수 있으니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그 시각이 좋았다. 인간은 항상 자연 속에 존재해왔다는 것을 느끼는 그 시각 시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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