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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자는 같은 세대 한국 여성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 캐서린 H.S 문(웨슬리 대학 정치학과 학과장)
▲ 당신은 어쩌면 김연자의 넘치는 매력에 넋을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 공선옥(소설가)
▲ 김연자의 사랑과 열정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감동과 무한한 에너지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 이미경(국회의원)
▲ 특유의 걸출한 입담과 유머로 생생한 삶의 역사, 기지촌 현장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 장필화(이대 여성학과 교수)


기지촌으로 간 언니, 다시 기지촌에 들어가다

ⓒ 삼인출판사
김연자, 제 발로 기지촌에 들어갔다가 25년 동안 기지촌 클럽에서 미군들을 상대한 여자. 최초로 기지촌의 현실과 자신의 삶을 한국 사회에 커밍아웃한 여자. 기지촌에는 떠나고 싶고 지우고 싶은 기억이 많기도 했으련만, 그는 여전히 기지촌에서 살아가며 10년이 넘게 기록해온 자신의 삶, 그 역사와 기억을 되살려 책 한 권에 담아냈다.

이 책에 담긴 김연자의 삶에는 우리 역사, 근대화가 빚어낸 생채기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거기에는 가난한 모녀를 죽음으로 몰아붙인 전쟁이 있고,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유당의 부패가 있고, 상경한 소녀들을 버스 안내양으로 착취하는 개발 시대의 서곡이 있다. 또 미군을 위해 국가가 앞장서 만든 기지촌이 있고, 작은 외침도 빨갱이로 몰아가는 유신 시절이 있다.

김연자는 매끈하고 고상하지는 않지만, 기지촌에서 나눈 얘기들과 기지촌에서 쓰던 욕들로 이 책을 써나갔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뒤 성폭행을 당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스스로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과 상처, 분노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또 기지촌에서 동료들과 함께 울고 분노했던 역사, 노래하고 웃으며 기쁨과 가능성을 나누었던 삶, 공동체를 꾸려서 서로 뭉치고 서로를 돌보았던 강한 생명력의 힘 등, 절망과 고통을 견디며 피어난 기지촌 여성들의 희망과 열정의 세월을 감동적으로 전해준다.

1950년대의 김연자는 당시의 여고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고 자유분방했으며, 모든 일에 주도적인 소녀였다. 여성의 전형성을 날려버리는 그의 강한 기질과 열정적인 에너지는 어디에서나 두각을 나타낸다. 졸업 후에는 서울신문사 여수 지사에서 일 년여간 신문기자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방황을 거듭하다 스무 살에 고향을 떠난다.

버스 안내양, 구두닦이, 식모, 호스테스, 양공주…. 1960, 1970년대에 한국전쟁, 베트남전, 농촌의 붕괴와 급속한 산업화의 물결 속에 일자리를 찾아 도시에 온 가난한 언니가 돈을 벌고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이들에게 매매춘의 세계는 살인적인 저임금과 경제적인 고립 속에서 언제나 내몰릴 수 있었던 막다른 길이었다.

김연자 또한 서울에 올라와 반창고 공장, 책 외판원, 버스 안내양, 구두닦이 등을 전전하다가 기술을 배우려고 서울시립부녀보호소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그곳에는 성매매를 하다가 잡혀온 여성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김연자는 이곳에서 매매춘의 세계를 접하게 된다.

자신은 왜 기지촌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남아 있었는가, 그곳에서는 무슨 일들이 벌어졌는가, 기지촌을 떠났지만, 왜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갔는가. 이 책에서 그는 자기 삶의 고통이 뿌리내린 자리를 더듬어 마침내 그 자리를 보듬어 안고 화해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자신이 걸어온 길, 알려지지 않은 그 많은 여성들의 행렬을 발굴해내면서 '정상적인' 한국 사회의 도덕적 편견을 물리치고, 의도된 무지와 위선을 일깨운다.

"이것이 미국의 지랄병이다. 이것이 한국의 배뱅이굿이다."

▲ 김연자님
ⓒ 삼인출판사
흔히 기지촌은 미군을 좇아 미군기지 주변에 모여든 부도덕한 여성들의 매춘 공간으로 여겨왔고, 그들은 '양공주', '양색시'라는 표현으로 업신 여김을 당해왔다. 이들은 성매매라는 위계에서조차 밑바닥으로 전락한 여자로 취급되었으며, 이는 기지촌에서 태어난 혼혈아들에 대한 터부로도 이어졌다.

1945년, 이 땅에 미군이 첫 발을 디딘 이후, 동두천ㆍ의정부ㆍ오산ㆍ평택ㆍ부산 등 전국 18개 도시에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 기지촌이 들어섰고, 현재까지 30만이 넘는 여성들이 기지촌을 거쳐갔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지촌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공간이었다. 아니 여전히 잊고 싶은 공간으로 남아 있다.

최근 주한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기로 한 후 기지촌 주변이 들썩거리고, 지역 경제와 주민 보상, 환경 문제 등 변화를 예측하는 다양한 기사와 성명이 발표됐지만, '기지촌 여성'들과 그 성 산업 변화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김연자씨는 1963년 스물한 살에 동두천 미 7사단 주변의 기지촌에 들어간 이후 송탄과 군산 아메리카 타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보낸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기지촌 정화 운동, 혹독한 성병 검진의 고통, '담요 부대', 팀스피리트 훈련지로의 원정 매춘 등 국내외적인 정치 상황의 틈바구니 속에서 벌어진 한국 기지촌의 굵직굵직한 역사가 이 책 안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윤락 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군수, 보안과장, 평택군청 복지과장 등이 기지촌 여성들을 애국자라고 부추기며 미군에 대한 예절 교육과 영어 교육을 시키는 모습, 팀스피리트 훈련지에까지 따라와 임시 보건소를 세워놓는 관리들의 모습, 개인이 땅을 사서 정부의 인가를 얻어 설립한 기지촌 주식회사 군산 아메리카 타운은 기지촌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양성화되어 온 공간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김연자씨는 1970년대에 송탄과 군산 아메리카 타운의 여성 자치회에서 부회장과 회장을 하면서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미성년자들이 기지촌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뛰어 다니고, 기지촌 여성들이 무엇보다 괴로워한 성병 검진 과정에서의 폭력성에 항의해 검찰청과 법정을 드나들다 집을 날려 빈털터리가 되기도 한다. 그는 몸값을 내리라는 미군들의 요구에 맞서, 미군에 의한 동료들의 억울한 죽음에 맞서 엄혹한 계엄령 아래의 군사 독재 시대에 미군들과 맨몸으로 맞서 싸운다.

1977년 군산 아메리카 타운에서 미군에 의해 동료 이복순과 이영순이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김연자씨를 필두로 한 타운 여자들은 미군들과 대치하며 치열하게 싸우고, 법정에 나가 필사적으로 진술한다. 그리하여 결국, 1967년 한·미 행정협정을 맺은 이후 한국 법정 최초로 미군 범죄에 무기 징역형을 선고하기에 이른다. 이는 1992년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준 윤금이 사건 이전에 이미 아메리카 타운 여자들이 이끌어낸 판결이었다.

두세 평의 쪽방에서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하고, 술과 약에 절어 힘겹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속에서 서로의 삶을 보살피고 자립을 준비하고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키워간다. 김연자는 1988년, 마흔 여섯에 25년 동안의 클럽 생활을 정리한다. 그리고 기지촌의 동료들과 함께 천막 공동체와 쉼터를 만들며, 자신이 겪어온 상처와 분노의 깊이만큼 정열적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그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었던 신앙을 징검다리 삼아 세상 밖으로 나와 신학 대학에 들어가고, 자신의 삶과 경험, 기지촌의 현실을 사회에 알리면서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한 김연자씨의 활동과 증언은 한국 역사 속에서 기지촌이라는 공간을 되살려내면서, 기지촌에 대한 무지·편견·오해 들을 바로잡고 풀어나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송탄에서 김연자님
ⓒ 삼인출판사
"회장 언니, 멋져! 베리하고 굿이다"

"웰 삐빠빠 룰라, 시쓰 마이 베이비. 삐빠빠 룰라, 돈 마이 베이비. 이것이 미국의 지랄병이다. 이것이 한국의 배뱅이굿이다."

"슈즈 $10, 롱 타임 $10, 숏 타임 $5, 가방 $5!!!"이라는 미군들의 어이없는 요구에 대항한 싸움의 현장에서 김연자는 배뱅이 타령을 부르며 춤을 춘다. 미군에 의해 동료가 이유 없이 죽어가고, 잇따른 사고와 자살로 절망에 휩싸인 군산 아메리카 타운에서 그는 깊은 침묵을 깨고, 살기 위해 악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사람들을 웃긴다.

이 '양공주님들'의 세계에는 그 속에서 빚어지고 가다듬어진 철학이 있고 유머와 위트가 있었다. '백인 색시', '흑인 색시'들의 철학, 때로 거칠고 위험한 생활을 이기고 버틸 힘을 주는 그 세계만의 욕과 그 욕 속의 철학이 있었다.

이제 김연자는 예순셋이다. 여전히 특유의 큰 목소리를 내지르며 무엇에건 열정적이다. 예전보다야 '톤 다운' 되었다지만 그 목소리 큰 것하며, 화들짝거리는 열정을 감추지 못하는 건 여전하다. 그는 1992년 이후 지난 몇 해 동안 송탄에서 참사랑선교원을 꾸리고, 기지촌 여성들과 혼혈아들을 위한 활동을 해왔다.

그 세월 동안 사회 속에서도 '성질이 죽거나' 세련되지 못해 악을 쓰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세상살이 속에서 첫사랑에 무너진 소녀처럼 와르르 무너져 주저앉기도 했다.

그 '빅 보이스' 하나 믿고 세상에 외치고 내뱉은 말들은 그가 살고자 했던 의지, 희망, 좌절, 욕구의 표현이었으며, 또 사회와 자기를 잇는 소통의 수단이었다. 이 책이 빛을 보는데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세월은 그가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는데 걸린 시간이기도 했고, 이 사회가 비로소 한 사람 기지촌 여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데 걸린 시간이기도 하다.

그 오랜 방황, 풀리지 않은 울분과 분노를 거쳐 그가 깨달은 평화는 작고 소박하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속에서 겪은 좌절들을 자신의 진실되고 가슴 아픈 부분으로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이제 비로소 전보다 능숙하게 일상을 살아내고, 자기를 사랑하는 여유를 즐기고 있다.

그는 책을 쓰며 순간순간의 '현재'들을 살려내기 위해 오랫동안 고심해왔지만, 거기에는 인색한 기억도 있고 섬세하리만치 꼼꼼하게 모인 조각들도 있다. 당사자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그 '선택적 기억'에 함부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수 없는 까닭은, 자서전이란 이름의 이 책이 그 '진실' 이전에 스스로에 대한 위로이며 치유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만만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 '전직 기지촌 여성 김연자'로서가 아니라, 늙어갈수록 연민만 느는 환갑의 여자가 일생을 돌아보고 펴낸 웃기고 재밌고 짠한, 한국 사회에서 60년대와 70년대를 살아낸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진귀하고 소중한 책이 나오기까지 그가 겪었을 고통과 평안에 이르는 이 치유의 시간은 도리어 그 고통에서 제3자인 독자를 정화해 주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 분 전까지 악을 쓰다>
(삼인출판사, 2005년, 값 9,800원)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김연자 지음, 삼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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