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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문 위의 펼침막
ⓒ 박도
가을운동회 추억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연신 터지는
출발 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차일 친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 타령도 잊었다.
…………

- 이성교 <가을 운동회>


▲ 수백초등학교 전교생이 운동장으로 입장하고 있다.
ⓒ 박도
그랬다. 가을운동회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우리 꼬맹이들은 그날을 설날처럼 기다렸다. 그날을 준비하기 위해 달리기도 매스게임도 유희도 연습했다. 아이들만 기다린 게 아니었다. 어머니들은 그날 점심준비로 전날부터 바빴고, 처녀총각들도 그날을 기다렸다. 처녀들은 한껏 맵시를 내고 마을 남정네의 가슴을 후렸고, 총각들은 운동장 한편에서 열리는 씨름대회에, 가마니 메고 달리면서 처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그날은 장사꾼들도 기다렸다. 인근에 사는 풍선장사, 구름사탕장사, 군밤장사들은 용케도 알고 다 모였고, 장터의 국밥장사들은 전날부터 국솥을 걸고 기다렸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자손녀들의 재롱에 이날 하루 근심걱정을 잊고서 손자 손녀들의 고사리 손을 잡고서 결승선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어렸을 적에 허약체질이었던 나는 운동회 날 달리기에서 입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딱 한 번 상을 타보았다. 초등학교 2학년 가을운동회 가족이어달리기 때였다. 첫 주자인 나는 꼴찌였는데 세 번째 주자인 어머니가 앞의 엄마들을 모두 다 제치고 일등으로 바통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하지만 아버지는 1등자리를 빼앗겨서 2등으로 골인하여 어머니 덕에 2등 상을 타본 게 유일한 입상 추억이다. 그 아버지, 어머니도 다 내 곁을 떠났다.

▲ '더덕팀'과 '한우팀'의 이어달리기 장면
ⓒ 박도
조촐한 가을운동회

이웃마을인 횡성군 공근면 수백초등학교의 ‘제55회 수백 가을 한마당 잔치’에 가면서 이런저런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겼다. 언저리 논에는 벼들이 잘 익어가고 과수원의 과일들도 빨갛게 익은 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볕 좋은 가을날이었다. 밀물이 진 개펄처럼 썰렁한 시골초등학교지만 오늘만은 그런대로 사람들이 모였다.

▲ 어느 부녀의 '우리는 동창생', 제1회 졸업생 장경호씨(69)와 제24회 졸업생 장미라씨(44)가 경기에 출전한 뒤 환히 웃고 있다.
ⓒ 박도
수백초등학교 교문 위에는 ‘경축 가을한마당 수백큰잔치’ 펼침막이,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였다. 전교생 34명(그 가운데 유치부 8명)이 펼치는 운동회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이 학교 제1회 졸업생이라는 장경호씨는 당신이 졸업했던 1949년 그 해 전교생이 300명이었고, 그 뒤 최대 650명에도 이르렀다고 회고하였다. 1970대 이후로는 해마다 학생 수가 줄어들었다고 아쉬워하면서, 그래도 당신 모교는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날을 맞아 객지에 나간 따님으로, 이 학교 24회 졸업생인 장미라(44)씨가 찾아와서 아버지가 다 큰 딸을 업고서 운동장을 달음박질하는 즐거운 시간도 보내고 있었다.

▲ 수백초등학교 박희영(56) 교장 선생님
ⓒ 박도
수백초등학교 박희영(56) 교장 선생님은 “제가 초등학교에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초등학교는 시골에서 다니는 게 인성교육에 좋습니다. 어릴 때 본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그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지요”라며, 올 학년 초 서울에서 두 학생이 전학 온 뒤, 무척 건강해졌다고 하였다. 한때는 수백초등학교가 전교생이 12명으로 폐교 위기도 맞았지만, 주민들이 협조해주셔서 올해는 네 학급을 운영할 수 있었다고 마을 분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여느 학교에서는 운동회 날 ‘청군’ ‘백군’으로 이름을 정하는데, 이 학교에서는 이 고장 명산품의 이름을 따서 ‘더덕 팀’ ‘한우 팀’으로 나눠 경기를 하고 있었다. 경기와 볼거리, 주민들 참여를 섞어서 만든 프로그램에 따라 ‘사랑해요’ ‘엄마같이 가요’ ‘손님 찾기’ ‘대어를 낚으세요’ ‘그때가 그리워’ ‘가족계주’ ‘마음이 맞아야지’ 등 시류에 맞춰 다양한 종목으로 마련한 짜임새 있는 가을 한마당 잔치가 벌어졌다.

학교 등나무 아래에는 돗자리를 펴고 차일을 친 곳에는 마을 주민들이 잔칫상을 벌려놓고 아이들의 재롱을 지켜보면서 웃음꽃을 피웠다. 여기서도 아쉬운 점은 젊은이가 적고 대부분 노인들이라는 점이었다. 이날 오신 손님들에게 보이고자 이 학교 어린이들의 시화전도 학교 뜰에 마련하고 있었다.

▲ 시화전
ⓒ 박도
귀여운 다람쥐

학교 뒤뜰 소나무밭에 사는
귀여운 아기 다람쥐
똘망똘망한 입과
초롱초롱한 눈
도토리를 잡고 있는 귀여운 두 손
살금살금 조용조용
가까이 가면 재빨리
도망을 간다.

- 이승길(5학년)


▲ 한 할아버지가 낚시대로 대어(담배)를 낚고서 좋아서 춤을 추고 있다.
ⓒ 박도
한 나이 많으신 이 마을 할아버지가 나를 잡고서 하소연을 하였다.

“아, 예전 운동회 때는 발 디딜 곳 없이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 지금은 마을사람들이 다 모여도 한쪽에도 차지를 않네요. 이 학교에서도 교장 선생님도, 면장도, 군 장성도 숱하게 나왔어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시골을 떠나는 것은 도시 잘못이어요. 선생님, 그렇지 않아요?”

때마침 운동장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어린이들이 마을의 수호신처럼 마냥 든든하게 보였다. 이 어린이들이 있는 한 이 마을의 앞날은 밝다. 아무쪼록 이 학교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기를….

▲ 수백초등학교 어린이들의 태권도 시범
ⓒ 박도

▲ 우리는 한가족 '사랑 한마당'
ⓒ 박도

▲ 아이들 덕분에 동심으로 돌아간 어머니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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