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범 손자를 상하이 총영사로 임명한 것은 잘된 인사"

▲ 이종찬 전 국정원장(우당기념관에서)
ⓒ 박도
중국 길림성 유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1910년대 삼원포 일대에는 경학사ㆍ부민단ㆍ한족회ㆍ신흥학교(후 신흥무관학교)ㆍ서로군정서ㆍ백서농장 등이 들어서서 독립 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필자는 이곳을 두 차례나 답사하면서 현지 사학자로부터 이런 독립운동 기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우당 이회영 집안 6형제들과 이상룡, 김동삼 허위 집안 등이 가산을 정리하여 마련한 돈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당 선생이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조부라는 사실도 그곳에서 알았다.

지난해(2004년) 한 TV방송국에서 8ㆍ15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필자에게 중국 동삼성 길 안내를 부탁해 와서 자료를 수집하고자 종로구 신교동에 있는 우당기념관을 찾았다. 그날 마침 이종찬 전 의원이 손수 기념관에 마련된 사진 자료를 안내 설명해 주는데, 귀한 사진자료를 숱하게 소장, 전시하고 있어서 놀랐다. 나는 즉석에서 제안했다.

"이 귀한 사진자료를 우당기념관에 보관하면서 가보로만 여기지 마시고, 이를 모두 개방하여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한 권의 사진집으로 엮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만드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내년 을사늑약 100돌, 광복 60돌을 앞두고 무엇을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좋은 착상을 제의해 주셨습니다."

▲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겉 그림
ⓒ 눈빛출판사
그 결과 우당기념관과 필자, 그리고 출판사가 1년 남짓 자료를 모으고 출판준비를 하여 지난 9월 1일자로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를 펴냈다. 책이 출판된 무렵, 이 전 의원이 중국방문 중이라서 만나지 못하다가 지난 주말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우당기념관으로 찾아갔다.

-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한 잡지를 읽다가 정지용 시인의 '그대들 돌아오시니'라는 시가 좋아서 워드로 치고 있습니다.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라는 시구가 절구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 시는 정지용 시인이 해방 후에 쓰신 시로, 독립운동가들의 귀국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 신임 총영사 부임 축하하러 상하이에 다녀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신임 총영사는 다음 주에 부임한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용무로 다녀왔습니다. 사실 제가 태어난 곳은 상하이로, 초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녔습니다. 그래서 상하이는 자주 들르는 편이지요. 말씀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인데, 노무현 정부 인사 중 임시정부 박은식 대통령 손자 박유철씨를 국가보훈처장에 임명한 것과 백범 김구 선생 손자 김양씨를 상하이 총영사로 임명한 것은 아주 잘한 인사입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모두 자긍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아마 중국 정부 측에서도 이번 인사를 매우 환영할 겁니다."

일본군 지원병 오장 출신이 육사 시험 면접관으로 '심문'(?)

▲ 우당 이회영 선생
ⓒ 우당기념관
- 경술국치 후 전 재산을 처분하여 우당 여섯 형제가 한 마음으로 만주 땅에다가 독립기지를 건설한 것은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목숨을 스스로 끊은 매천 황현 선생이나 민충정공에 견주면 저희 집안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제 할아버님(이회영)께서는 나라가 망했는데, 그동안 여러 대에 걸쳐 나라의 녹을 먹었던 집안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망명하신 걸로 압니다. 흔히 당시 사대부는 대부분 나약해서 부일(附日)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저희 집안을 비롯하여 안동의 석주 이상룡 선생과 일송 김동삼 선생 집안, 선산의 왕산 허위 선생 집안 등이 전 가족 망명도생으로 후일을 기약하면서 만주 땅에다가 독립의 씨앗을 뿌린 것은 사대부의 체통을 지킨 일이지요. 결국 제 조부님은 일제에 체포, 고문으로 다롄에서 돌아가셨고, 아버님(이규학)은 일제의 고문으로 청각을 잃고 평생 장애인으로 불우하게 사셨습니다. 그래도 우리 집안은 이름이라도 역사에 남겼지만 그렇지 못한 집안이 대부분이지요."

- 이번 사진집의 발간 의의를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이 사진집을 통하여 우리 나라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향해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는 사실과 일제 강점 후에도 일제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해방 후 분단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독립운동사도 좌우의 편향된 시각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 운동, 의혈단 운동, 조선의용군 활동, 미주지역이나 러시아지역의 독립운동이 사각지대로 남아서 일부나마 이 점을 조명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대부분 현상금 붙은 사람들이라 사진자료가 충분치 못했습니다. 앞으로 두고두고 보완해야 할 숙제입니다."

▲ 중국정부가 이회영에게 수여한 혁명열사증명서
ⓒ 우당기념관
-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일화 하나만 들려주십시오.
"독립운동가 집안은 다들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동안 해방 후 우리 나라의 사회적 분위기가 독립운동을 내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육군사관학교 입학할 때였습니다. 학과 시험에 합격한 뒤 구두시험을 앞두고 군 장성 추천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광복군 출신 김관오 장군과 민영구 제독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구두시험 날 일제 지원병으로 오장 출신이었던 면접관이 '모두 광복군 출신의 추천을 받은 것을 보니, 귀관 집안이 독립운동가 집안인가?'라고 묻는 게 마음에 몹시 걸렸습니다. 집에 와서 아버님께 우리 집안이 나라에 대역죄라도 지은 집안이냐고 말씀드리자, 아버님께서 격분하여 마침 저와 함자가 같은 당시 육군대학교 이종찬 총장에게 항의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눈높이'를 범부(凡夫)의 수준으로 낮춰 친일파를 가려냈으면…"

- 얼마 전 친일파 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우당 집안은 일제의 피해자인 셈인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광복된 지 60년이 지난 이제야 부일파 명단이 발표되었으니 만시지탄의 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제 할아버님이 아나키스트로 일제 밀정이나 앞잡이 처단에 가장 앞장 서셨던 분이었습니다. 당신도 결국에는 그 일 때문에 일제 밀정의 밀고로 상하이에서 만주로 가다가 다롄 수상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사하셨지요. 또 숙부님(이규창)은 밀정 처단에 직접 나섰다가 체포되어 13년간 옥살이를 하셨지요.

뒤늦게나마 이번 친일파 명단 발표로 부일(친일)의 진상이 밝혀진 것은 민족적 정의를 위해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 시기를 놓쳐서 부일(친일) 당사자들은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만 그 후손들이라도 조상의 잘못에 대신 참회하고 자중해야겠지요. 부일 후손 중, 오욕의 조상이 불법적으로 착취하여 얻은 땅을 찾겠다고 날뛰는 것을 보면 정말 경멸스럽습니다. 하지만 조상의 허물 때문에 연좌하여 후손들이 신상에 피해를 보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아무튼 이 일이 일단락이 된 이후는 더 이상 우리 역사의 그늘진 곳을 들춰내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역사가 자학(自虐)의 역사가 되기 십상이지요. 이제는 일제 강점기의 위대한 인물을 찾아서 자긍(自矜)의 역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요즘 '눈높이를 맞춰라'라는 말이 있지요. 모든 국민을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 수준에 맞추지 말고, 범부(凡夫)의 수준으로 친일파를 가려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회고록 맨 앞장에 반성문을 남기고 싶어"

- 지난 60년 동안 한 번이라도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이 친일파 청산 문제는 진작에 해결되었을 문제가 아닙니까?
"해방 후에 독립운동가들은 정권을 잡기는커녕 먹고 살기도, 살아나기도 힘들었습니다. 후손들조차도 쫓기는 생활에다가 가난해서 많이 배우지 못해 현대사에 주역에서 밀려난 것 같아서 우당기념관에서는 오래 전(1984년)부터 후손들에게 장학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 현 상하이시 장락로 682롱 7호 골목. 어린 시절에 뛰놀던 생가 앞 골목을 50년만에 찾은 이종찬 윤장순 부부.
ⓒ 이종찬
- 요즘 세상이 X파일 사건 등으로 시끄럽지요?
"이 모두가 위정자나 정부가 백성들을 신뢰하지 않은 데서 왔던 것입니다. 국정원의 도청이나 사찰 문제 이전에, 우리 정보기관이 가장 잘못한 점은 일제시대 수사기관의 잔재가 관행으로 그대로 이어져 백성들을 믿지 않고 '언제 들고 일어날지 모르는 감시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 지난 삶을 회고록으로 남길 생각은 없습니까.
"현재로서는 그럴 계획이 없습니다. 만일 집필한다면 제 지난 삶에 대한 참회와 제 오만하고 경솔했던 점에 대한 반성문을 가장 앞에다가 쓰고 싶습니다."

▲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 우당기념관

사진으로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우당기념관 엮음, 박도 글, 눈빛(2005)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