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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지붕 두 가족 나란히 사이좋은 형제. 영락없는 알밤의 모습을 한 쌍 마로니에
ⓒ 이승열
"여전히 변덕스러운 날씨야. 우기로 가는 계절이라 점점 더 축축해 질 거고. 거리의 마로니에 잎들이 말라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열매는 그냥 파란 혹성같이 달려 있는 게 무지 이질적이더라고. 오늘은 그냥 샹젤리제를 거쳐 마들렌 성당을 지나 오페라로 해서 집에 걸어왔지. 거의 4시간 정도를 걸어서. 눈 들어 돌아봐도 별 매력 있는 나무가 없으니 가을인지 어쩐지 별 실감도 안 나고…"

프랑스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가 그곳 풍경 속에 마로니에 소식을 전해왔다. 초여름까지 분홍빛 몽글몽글한 꽃을 지치지도 않고 피워대다가 어느새 무성한 가로수 터널을 만들더니 밤톨 같은 빛나는 열매를 맺었나 보다. 후드득 후드득 떨어져 지나가는 차고 사람이고 무차별 공격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마로니에의 안부가 궁금해 어젯밤 산책길에 한 아름 주워왔다.

원피스 안감이 땀에 절어 등이며 다리에 철썩 철썩 달라붙어 아무래도 날씨가 제 정신이 아닌가보다 했더니 그 또한 계절을 마무리하는 더위의 용트림이었나 보다. 앞섶에 한 아름 주워 두고두고 가을을 느끼면 되겠다. 껍질 벗기지 않은 겉모양은 틀림없는 호두요, 까만 알맹이는 영락없는 찰 진 밤톨이다.

루루 루루 루루루, 루 루루 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눈물 속에 봄비가 흘러 내리 듯
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
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그 길에 마로니에 잎이 지던 날
루루 루루 루루루, 루 루루 루루 루루루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피고 있겠지


오랜 시간 ‘마로니에’는 단순한 나무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꿈꿔온 모든 미래를 뭉뚱그려 나타내는 상징적 단어였다. 파리, 몽마르트, 그리고 전혜린의 회색빛 도시 뮌헨, 밤을 세우고 파란 새벽을 맞았던 그 시절의 언저리에 언제나 마로니에가 있었다.

▲ 밤톨같이 쏟아지는 마로니에를 주워 담느라 비질하는 손질이 바쁘다.
ⓒ 이승열

▲ 벌써 가을이 이만치 와 있다. 하늘이 온통 노랗게 보이면 또 한해가 간다.
ⓒ 이승열
동숭동 대학로 문리대 교정에 마로니에 나무가 있어 그곳을 마로니에 공원이라 부른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도시 서울. 설악산 수학여행 길에 얼핏 스쳤던 서울이란 도시 또한 마로니에와 같은 이미지였다.

아무것도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잡힐 것 같지 않았던 미래, 더디게 가는 시간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조바심. 마로니에는 바로 이 시기를 나타내는 키워드였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세월이 가면 뭔가 나아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은밀한 희망이라도 부여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득한 현실. 생각보다 빠르게 난 어른이 되었고, 내가 꿈꿔온 미래 또한 그토록 불안했던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또 다른 현실이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래는 꿈을 꿀 때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서도 여전히 '마로니에'는 꿈을 꾸고 싶게 하는 단어였다. 그 마로니에가 현실 속으로 들어온 것은 오년 전 이곳으로 이사 오고 난 뒤였다. 아파트 입구 터널을 이룬 가로수가 온통 노란빛으로 물든 채 낙엽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로니에길'이란 팻말이 서 있었다. 아! 이게 마로니에구나. 마로니에를 그리워했던 오래 전의 시간이 잠깐 스치며 그래도 가슴에 작은 생채기를 내고 지나갔다.

큼직하고 시원한 잎들이 하늘을 빽빽하게 메워 어두컴컴한 터널을 여름 내내 만들고 있었다. 밤톨보다 훨씬 옹골진 검은빛 반짝이는 열매가 호두껍질 속에 쌓여 온 거리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면 세상이 온통 노란빛이다. 열매가 꼭 밤처럼 생겼다하여 '말밤'이라 하는데 서양에서도 밤이란 뜻인 '마농'이라 부른다고 했다. 제 철 만난 동네 꼬마들이 주머니에 불룩하게 넣고 구슬치기도 하고 상대를 향해 던지기도 하며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 큼직하고 시원한 일곱 장의 잎사귀 때문에 칠엽수로 불린다.
ⓒ 이승열
손바닥에 가만히 올려놓고 보면 그 찰진 열매를 깨물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이보다 더 떫고 쓸 수는 없다. 열매의 떫은 맛 때문에 조금만 먹어도 배앓이를 할 정도로 독성이 있다 한다. 더 진한 분홍빛인 서양마로니에와 유백색의 일본마로니에가 있는데 집 앞의 가로수는 일본마로니에로, 잎이 일곱 개라 '칠엽수'란 이름으로 불린다. 세계 3대 가로수의 하나로 뽑힐 만큼 시원하게 잘 자라고 단풍 또한 일품이다.

여기 저기 뒹굴며 한 포대마다 가득 담긴 마로니에 열매가 너무 아깝다. 저걸 도토리처럼 떫은맛 우려내어 묵을 한 번 쒀봐. 좀 쓰지만 밤처럼 쪄 먹어 볼까? 모두들 그 옹골찬 생김새에 하루에도 몇 포대씩 열매를 맺는 마로니에를 보며 그 쓰임새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아무래도 신의 실수이다. 어쩌자고 저 예쁜 열매에 그 떫고 쓴맛을 주어 인간들을 이토록 안타깝게 하는가? 하긴 저 야무진 열매가 식용으로 쓰이면 가을 내내 길 위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할 틈이 있겠는가? 눈으로 보며 오랜 시간 즐기라는 신의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나보다.

▲ 깨물고 나면 영락없는 삶은 밤.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쓴맛. 자신을 지키는 힘.
ⓒ 이승열
밤은 날카로운 가시로, 호두 은행은 지독한 냄새로 자신을 보호하는데 반해 쓰고 떫은맛이 마로니에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인가 보다. 호두 겉껍질 같은 표피를 쉽게 벗기면 밤톨 같이 빛나는 열매가 쏙쏙 잘도 빠져 나온다. 한 둥지 속에 쌍마로니에도 들어있다.

한 바구니 가득 담아 사무실 한켠에 놓으니 사람들이 금세 몰려든다. 호두, 밤, 상수리, 갖가지 대답이 속출하나 젊은 날 애타게 찾던 마로니에라는 것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마로니에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모두 감탄 연발이다. 모두들 아련한 눈빛이 되어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를 한 소절씩 흥얼거린다.

▲ 호두? 저 안에 옹골진 밤톨같은 마로니에가 숨어 있다.
ⓒ 이승열

▲ 밤보다 더 단단하고 빛나는 검은빛의 마로니에. 깨물지 않을 수 없다.
ⓒ 이승열
밤마다 마로니에 열매를 주워 여기저기 가을을 선물한다.

'마로니에 아래 오면 저 나무들이 참 좋아하겠어요. 우리를 예뻐해 주는 사람이 오늘도 또 왔구나.'

함께 산책을 하던 친구가 말한다. 지치지도 않고 열매를 쏟아내며 지나가는 사람도, 세워둔 차도 공격하는 마로니에는 이미 이곳에서는 노래 가사 속의 그리운 열매가 아니다. 차를 망가뜨리고 창문을 가려 햇빛을 막고 차바퀴에 밟혀 거리를 지저분하게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열매일 뿐이다.

그래도 난 여전히 산책길 마로니에 열매를 주워들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쓴다. 마로니에 열매가 떨어지고 있다고. 다음에 만날 때에는 마로니에 열매를 한 아름 선물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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