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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초롬히 핀 백도라지꽃
ⓒ 박도
백도라지 꽃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아침에 일어나자 날씨가 썰렁했다. 서랍장에서 긴 팔 셔츠를 꺼내 입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이 24절기 가운데 열 네 번째인 ‘처서(處暑)’로,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는 절기였다.

▲ 수세미꽃
ⓒ 박도
지난 입추 절기 때는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그날을 정점으로 한풀 꺾이더니 오늘은 완연한 가을 날씨다. 새삼 옛 조상들의 생활예지에 탄복케 한다. 오랜만에 날씨가 아주 쾌청했다.

옛 어른들은 “처서 날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고 하였는데, 오늘 날씨가 이리도 좋은 것은 풍성한 가을을 맞을 길조다. 뒷산의 멧새들은 이른 아침부터 요란을 떤다. 그동안에 부화시킨 어린 새끼들을 거두느라고 그런 모양이다.

내 집 울안의 수세미는 결실의 때를 놓치지 않으려고 수꽃을 활짝 피웠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한 달은 더 늦게 움이 터서 서리가 오기 전에 제대로 결실을 할지 자못 염려스럽다.

(관련기사 : 늦둥이의 슬픔)

▲ 해바라기
ⓒ 박도


▲ 빨갛게 익은 고추
ⓒ 박도


▲ 아름다운 나라꽃 무궁화
ⓒ 박도
아침밥을 먹은 뒤 산책 겸 가을 들판 나들이를 갔다. 마을로 내려가자 해바라기 꽃이 온통 꽃잎을 활짝 펴고서 반겨 맞는다. 그 옆에 고추밭의 고추는 새빨갛게 익어서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동네 어귀의 밤나무의 밤송이는 아직 기다려 달라고 경고하면서 가시로 접근을 경계하고 있다.

길섶에 핀 나라꽃 무궁화는 글자 그대로 이른 여름부터 무궁하게 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꽃잎을 함초롬히 벌린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다. 나라꽃 무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 낱일을 못이겨 쓰러지는 참깨
ⓒ 박도
참깨 밭의 참깨도 낱알에 겨워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놈들을 낫으로 베다가 예닐곱 개씩 짚으로 묶은 뒤 볕에다가 바싹 말린 뒤 돗자리나 넓은 비닐 위에서 막대기로 두들기면 참깨 알이 우수수 쏟아진다. 이것에 소금을 넣고 빻으면 깨소금이 되고, 볶은 다음 틀에다가 꼭 짜면 볼그레한 기름이 줄줄 흐른다. 참기름이다.

텃밭의 무 배추를 솎아다가 간장에 절인 뒤 참기름 한 방울을 떨어뜨려 비벼먹으면 그 맛을 어디에 견주랴. 두엄자리 위의 호박은 아이들이 머리에 이지도 못할 만큼 펑퍼짐하게 커지고 있고 그 곁의 도라지 밭에는 도라지꽃이 수줍게 피었다. 보랏빛 도라지 꽃 속에 드문드문 흰빛 도라지꽃도 피었는데 그 자태가 청초하기 그지없다. 백도라지 꽃이 이토록 아름다울 줄이야.

배나무 과수원에는 배가 한창 익어 가는데 벌레 예방과 상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두 봉지를 씌웠다. 해마다 까치들의 공습에 지친 농부는 아예 과수원 전체를 그물로 덮었다. 사람만 아니라 까치들도 점차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고 있다.

▲ 가을과 함게 익어가는 호박
ⓒ 박도


▲ 그물로 둘러쳐진 배나무
ⓒ 박도
모든 생물이 자라는 이치는 다 같다

과수원 곁에는 땅콩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문득 한국전쟁 당시 피난 갔던 때가 불연 듯 떠오른다. 우리 가족을 비롯한 피난민들이 괴나리봇짐을 지고 낙동강을 건너려고 하다가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된통 받았다.

비행기에서 쏟아지는 게 폭탄으로 사람들은 가재도구도 모두 버리고 과수원으로 뛰어 들어가서 남자어른들은 과수나무(사과나무)에 매미처럼 달라붙었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땅콩이나 콩 포기 곁에 몸을 숨겼다.

그때 여섯 살이었던 나는 비행기에서 염소 똥처럼 뱉어내는 게 사람을 죽이는 폭탄인 줄도 모르고 재미있다고 벌떡 일어나서 손을 흔들며 쳐보다가 어른들한테 뒤통수를 쥐어박히던 생각이 난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때 미군들의 폭격은 ‘융단폭격’이라 하여 마치 콩나물 시루에 물 주듯이 폭탄을 쏟았다. 과수원으로 숨어서 살아났지 마을로 갔다면 거의 살아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온 논에는 벼들이 막 이삭이 솟아오르거나 일찍 솟은 놈은 수정을 끝내고는 알이 한창 여물고 있었다. 지나가는 길손도 벼 포기를 보니까 갑자기 부자가 된 듯 뿌듯하고 사랑스러운데, 농사꾼이야 당신들이 애써 가꾼 이 모습에 얼마나 흐뭇하랴.

▲ 햇볕에 익어가는 벼이삭들
ⓒ 박도
수천 년 동안 이 겨레를 먹이고 살찌운 게 이 벼가 아닌가. 햅쌀에 햇콩을 넣어 밥을 지으면 씹지 않아도 넘어갔다. 햅쌀로 송편을 빚어 조상님께 바치는 한가위는 가장 풍성한 명절로 예로부터 가난한 백성들은 그저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하여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벼논 가운데 벌써 쓰러진 벼들이 있다. 드문드문 쓰러진 논들도 있나 하면 아주 깡그리 쓰러진 논도 있다. 농사꾼의 이야기로는 그 논이 벼가 애초에는 가장 잘 자란 벼였다고 한다.

▲ 장마에 견디지 못하고 누워버린 벼들
ⓒ 박도
그렇다! 사람도 작물도 웃자라면 일찍 쓰러지게 마련이다. 장마에 태풍에 제 체중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게다. 농사꾼들은 벼가 쓰러지면 소출도 반으로 줄거나 싸라기로 상품가치도 없을 뿐더러, 콤바인으로 수확할 수도 없어서 일일이 손으로 베야하기에 아주 속상하다고 한다. 쓰러진 벼들은 대부분 비료를 많이 준 것들이다. 사람으로 치면 어려서 너무 똑똑하고 비만한 이들이다.

나는 쓰러진 벼를 보니까 스스로 목숨을 끊은 두 친구가 떠올랐다. 한 친구는 중학교 때 ㅅ 군이요, 또 다른 친구는 대학교 때 o 군이다. 두 친구 모두 수재로 자존심이 유난히 강하였다. 하지만 때때로 세상은 그들의 자존심을 무참히 꺾기도 한다. 그때 그들은 그 세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자진해 버린 것이다. 어린 자녀들을 남보다 더 뛰어나게 키우고자 닦달하는 부모들에게 이 쓰러진 논의 벼를 보이고 싶다. 모든 생물이 자라는 이치는 다 같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연재해 오던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를 도서출판 ‘지식산업사’에서 단행본으로 발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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