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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지개발 과정에서 5만 여평의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삼국시대 단일취락으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다.
ⓒ 이철영
광주시 동림동 택지지구 개발 과정에서 기원전후부터 5~6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된 삼국시대의 집단취락지가 발굴되었다. 전체 10만평의 택지 가운데 무려 5만여 평의 면적에서 발굴된 이 유적은 현재까지 발굴된 삼국시대 주거지 가운데 최대규모다. 더욱이 당시의 저수시설로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보(洑) 형태의 목조 구조물은 가장 앞선 시기의 것으로 밝혀졌다.

▲ 발굴된 유적지 전경. 도랑과 주거지 등의 윤곽이 보인다.
ⓒ 이철영
또 백제의 영역이었을 이곳에서 가야의 토기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고대사회가 국가 간에 광범위한 교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이곳에서는 2기의 우물, 지금의 너와지붕과 같은 지붕재료로 쓰였을 적층목편(積層木片), 농기구인 고무래, 고기잡이 그물에 매다는 어망추, 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그 물건들을 만들고 사용하던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백제 초기 그곳에 살았던 '바우'의 일상을 따라가 보았다.

▲ 저수 시설로 보이는 무너진 목조 구조물. 길이15미터, 너비2.2미터.
ⓒ 이철영
아침 해가 뜨자 청년 바우는 집 밖으로 나왔다. 어른들은 일찍부터 마을 저수지에 모여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물이 새는 보(洑)를 수리하고 있었다. 보가 무너지게 되는 날이면 1년 농사가 헛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열일을 제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바우도 그 일에 끼어 힘을 보태야 마땅했지만 도무지 몸에 힘이 생기질 않았다. 윗마을에 사는 달님이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우는 그녀를 좋아했지만 돼지 한 마리도 낼 수 없는 집안 사정으로 장가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어른들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천가에 앉아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 도랑에서 발견된 목재 유물. 수로에 관계된 시설로 추정된다.
ⓒ 이철영
이 물길을 따라가면 엄청나게 큰 영산강이 나오고 계속 나아가면 끝이 없다는 바다를 따라 먼 나라인 가야까지 이른다는데 “차라리 장사꾼들을 따라 이 답답한 마을을 떠나 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전쟁터였던 것을 생각하면 마을 밖으로 나간다는 건 매번 너무도 두려운 일이었다. 바우는 심란한 생각들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힘차게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도랑에서 발견된 토기조각. 가야의 토기들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가야와의 교역이 있었음을 추측케 한다.
ⓒ 이철영
가족과 마을 공동체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참 많았다. 저수지에서 논으로 물을 대는 수로를 만드는 공사와 공동 우물파기에 참여해야 하고, 밭을 가는데 쓰는 따비·가래·쇠스랑·괭이·고무래도 손봐야 했다.

얼마 전부터 기우뚱해진 집의 기둥도 손봐야 했다. 어른들 말씀으로 예전에는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와 짚을 씌워 지붕을 만들었다는데 벌레들이 침범하고, 하천이 넘치거나 했을 때는 어찌 감당했을지 궁금했다. 지금의 바우네 집은 기둥을 세워 공중에 띄워 놓은 원두막 같은 모양이다.

점심 나절에는 어제 산에서 활을 쏘아 잡은 토끼를 요리할 작정이었다. 화덕에 불도 지펴 놓아야 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한참이었을 때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너도 나도 활을 메고 다녔다지만 지금은 사냥 때가 아니면 쓸 일이 없다.

▲ 화덕이 있던 자리이거나 불태운 흔적.
ⓒ 이철영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촌장님 댁에서는 아낙네들이 마을 공동으로 조상님들께 지낼 제사 준비로 분주했다. 한쪽에서는 가야에서 들어 온 귀한 그릇들이며 시루를 닦고 다른 쪽에서는 절구질과 맷돌질이 한참이었다.

촌장님 댁은 마을 회의나 여러 행사들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바우네 집보다는 훨씬 컸다. 마을 사람들의 수가 늘어감에 따라 촌장님 댁도 더 커졌다.

▲ 도랑에서 발견된 토기조각.
ⓒ 이철영
인구가 늘어나자 마을에서는 몇 군데 공동 변소도 만들었다. 아무데나 용변을 봐 놓으니 보는 것으로나, 위생에 좋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촌장님이 돌아가시면 성대히 장례를 치러드렸다. 땅을 파고 바닥에 토기를 깨서 깔았다. 촌장님의 시신 위로 곡식이 자라고 그 곡식을 후손들이 다시 먹으므로 바우는 촌장님이 자손들의 몸속에 영원히 살아 계신다고 믿었다.


▲ 도랑에서 발견된 목재 유물.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고 수로에 관계된 시설로 추측.
ⓒ 이철영
이천여 년 전의 삶이지만 지금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성싶다. 그들이 쓰던 도구들이 우리의 농촌에서 엊그제까지 사용하던 것들이며 지금까지 사용하는 것들도 있다. 발굴현장을 바라 보며 5만여 평의 땅 위에서 그들이 숨쉬며 즐거워하고 아파했을 당시를 떠올려 보니 2천여 년 전의 시간이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 기원 전후로부터 2천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형성된 도랑들이 발굴된 모습.
ⓒ 이철영
얼마 간의 발굴이 끝나고 나면 이 광대한 5만여 평의 유적은 안타깝게도 차가운 콘크리트 숲 아래 다시 파묻히고 만다. 프랑스에서는 유적이 발견된 곳에 아파트를 지을 때 지상의 유적에는 전시관을 짓고 아파트 주거는 2층부터 지은 사례가 있다고 한다.

유적 전시관은 주민들이 관리하며 입장료를 받으니 아파트 관리비를 한 푼도 안내도 된다고 한다. 유적은 유적대로 살리고 아파트 주민들은 주민들 대로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 하니 그렇게 좋은 일석이조가 없다. 우리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 앞으로 아파트 아래 묻히게 될 유적지 전경.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사보 4월 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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