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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다만기찌로가 쓴 분청사기 역사서 미시마하께메(三島刷毛月)
ⓒ 김대호
세종실록 등 일부 사서에 겨우 몇 줄 기록돼 있을 뿐 그 기록이 희소한 분청사기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옛 서적이 발견돼 우리 나라 도자기 역사를 밝혀주는 중요한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 처음 공개되는 조선시대 제작된 무안분청
ⓒ 김대호
전남 무안군에서 30년간 분청사기를 만들어 오고 있는 정철수씨(남, 56세)는 지난 19일 일본 히구찌 교수가 무안군 분청작가들에게 기증한 미시마하께메(三島刷毛月, 한국명 분청귀얄문)라는 책자와 함께 무안지역에서 소장하고 있는 분청사기 5점을 공개했다.

이 책은 일제 강점기 야마다만기찌로(山田萬吉朗)라는 일본인이 우리 나라에서 30년간 거주하면서 1932(소하 7년)년부터 1943년(소하 16년)까지 분청사기 발굴사를 중심으로 당시 서울에서 발간한 잡지 <다완>에 기고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이 고서에는 고려청자 쇠퇴와 분청사기의 발생, 백자의 출연까지 우리 나라 도자기사를 유추할 수 있는 사진과 그림, 지도 등이 296페이지 분량으로 총 망라돼 있다.

특히 중국 황하와 전남 무안, 일본 구주를 잇는 도자기 루트와 구전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무안반도의 가마터까지 지도를 통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임진왜란 이후 그 맥을 상실한 것으로 알려진 우리 나라 도자기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무안에서 제작된 주병을 설명하고 있는 정철수씨
ⓒ 김대호
또한 과거에는 분청사기라는 이름대신 보성군, 광주군(현 광주광역시), 나주군, 함평군, 무안군 등 전라도에서 지방에서 생산되는 자기들이 모두 ‘무안분청’이라는 고유명사로 통칭돼 있었던 것으로 보아 무안은 강진청자, 여주백자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도자기 발상지로 재해석될 것으로 보인다.

덧붙여 광주광역시, 보성군, 계룡산 일대, 나주시, 함평군 등 분청사기의 태생에 관한 학자들의 분분한 논란도 재정립 될 듯하다.

이 자료에서는 호사스러운 고려 귀족사회의 소비시장 덕분으로 제작 전 과정이 분업화된 청자의 중흥과 쇠퇴, 이후 도공 스스로 문양과 유약 등 도자기 제작 전 과정을 담당해야 했던 고려 말 조선초기에 등장한 인화문분청(도장으로 문양을 찍는 방식)부터 분장문분청(화장토에 초벌을 전부 담그는 방식), 무지반덤벙분청(화장토에 초벌을 반만 담그는 방식), 귀얄문분청(화장토를 수수붓으로 바르는 방식) 등에 대한 해설이 비교적 상세히 실려 있다.

또한 이러한 분청사기의 제작기법이 달라진 것이 미적인 이유라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무안반도 일대가 운송이 용이하고 흙, 땔감을 구하기 쉬웠지만 화장토를 구하기 힘들어 화장토의 사용량을 줄이기 위한 자구책이 새로운 제작방식을 창조해 낸 것이라는 주장도 실려 있다.

▲ (좌)무안에서 발견된 반덤벙분청을 설명하는 도예가 김문호씨. (우)분청귀얄문 제작 과정을 재현하는 도예가 임영주씨
ⓒ 김대호
1943년 이 책을 펴내고 국내에서 사망해 무안군 망운면 내리에 묻힌 것으로 알려진 야마다만기찌로씨는 평생을 전라도 전지역에서 도자기의 파편을 보아 분석하고, 제작방법을 연구하였으며 곳곳에 산재돼 있는 가마터를 찾아 자료로 정리했는데 최근 그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가 일본에서 발간됐다.

▲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도자기 루트가 지도를 통해 기록됐다.
ⓒ 김대호
이 책은 조선 분청사기를 연구하고 있는 히구찌 교수가 일본 고서점에서 발견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이들이 지난 2월 무안분청의 맥을 찾아 무안을 방문한 이들 일행이 정철수 선생에게 기증한 것이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관요가 사라지고 녹봉이 끊어지면서 그 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졌던 분청사기가 일제강점 중기까지 무안군 망운면 하묘리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새롭게 밝혀져 중요한 역사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분청사기는 일본에서 무안고비끼, 무안하께메 등으로 불리며 국보급으로 대접받아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청자와 백자에 밀려 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 나라 분청사기의 르네상스를 이끌던 무안분청은 해방과 함께 이를 선호하던 일본인들이 물러 간데다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제작비가 싼 옹기가 서민들에게 인기를 모으고 행남자기 등 산업자기 등의 출연으로 그 수명을 다했다.

▲ 무안군 소재 가마터까지 상세히 기록됐다.
ⓒ 김대호
정철수씨는 “우리 도자기 역사를 외국에서 정리했다는 것이 씁쓸하긴 하지만 우리 도공들의 정신과 기술을 다시 찾을 수 있어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며 “오는 5월 일본 도공들을 초청해 무안분청에 대한 워크숍을 비롯, 유물전시 등 다양한 복원활동을 벌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무안군에 거주하며 무안분청의 맥을 잇고 있는 12인의 도공들은 오는 5월 4일부터 8일까지 무안 월선리예술인촌에서 ‘제1회 무안분청모듬전’을 열고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조선 분청사기 10여점을 공개하고 작가들의 개인전 및 노천가마를 통한 원시토기 재현식도 가질 예정이다.

▲ 책에 나와 있는 무안분청들(대부분 일본에 있을 것으로 추정)
ⓒ 김대호

분청사기 발상지는 무안이다
오는 5월 무안분청 복원행사 가질 것

▲ 30년째 무안분청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 정철수씨
- 무안이 분청사기의 발상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려가 퇴락하면서 도공들에게 더 이상 녹봉을 줄 수 없게 되자 민간을 상대로 한 조잡한 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분청사기의 시초다. 규모가 커서 분업화되었던 관요와 달리 민요는 조각과 유약제작 등을 도공 한사람이 모두 담당해야 했기에 제작이 편리하고 고질의 흙을 사용할 필요 없었던 인화문, 분장문 등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영산강을 끼고 있어 재료와 자기의 운송이 용이하고 좋은 적토와 목재를 가지고 있었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반농반어의 겸업이 가능했다는 장점도 있다. 현재 무안지역 작가들의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하고 있는 가마터만 20여군데 이르고 있으며 이 책에서는 13곳의 가마터를 발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무안분청’이라는 새 이름을 사용하기로 한 것으로 아는데?
"새 이름이 아니다. 이번에 발견된 책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과거 전라도에서 생산되는 분청사기는 ‘무안분청’으로 통칭됐으며 그 발상지가 무안반도다. 무안에서는 인화문분청을 비롯해 분장문분청, 무지반덤벙분청, 귀얄문분청 등 거의 대부분의 분청사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는 황토를 재료로 하는 쪽빛 강진청자의 쇠퇴 이후 북상하면서 철분이 많은 사질 적토로 인해 분장이 필요했던 무안에서 분청사기라는 형식으로 재창조 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북상하면서 여주에서 백자로 새롭게 창조돼 도자기의 새 중흥을 구가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강진청자, 여주백자와 함께 무안분청은 우리나라 3대 도자기 대명사라 할 수 있다."

- 일본인들은 왜 분청사기를 국보로 정하는 등 청자와 백자에 비해 애정이 남다른 이유는?
"가장 한국적인 심성을 닮은 것이 분청이다. 물론 삼강청자가 우리의 것이기는 하지만 청자와 백자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완벽하고 정교한 것에 익숙한 일본인들에게 청자와 백자는 새로울 것이 없는 자기다. 분청사기는 서민의 심성을 닮아 인위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유분방함이 녹아있다. 또한 도공마다 색과 모양을 전혀 다르게 연출하기 때문에 정형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 이 책이 가지는 가치는 무엇인가?
"세종실록 등 겨우 구전이나 단편적인 사료기록을 통해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분청사기를 학술적 문헌으로 정리한 국내 최초의 자료라는데 의미가 있다. 아마도 우리 나라 도자기 역사를 새로 써야 하는 일도 있을 것이며 여러 학자들이 낭패 보는 일도 생길 수 있다. 또한 ‘무안분청’이라는 고유명사를 되찾아 주었으며 그 발상지가 무안군이라는 것을 밝혀줄 중요한 자료다."

- 안타까움이 있다면?
"일본에서 도자기를 안다는 사람들에 집에는 빠짐없이 조선에서 수탈해 간 분청사기가 한 점씩은 있다. 도공들을 천시하고 멸시해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던 우리와 달리 이들의 도자기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반성해야 할 지점이라고 본다.

- 무안분청의 흔적을 되살리고 계승하기 위한 노력은?
"제1회 무안분청모듬전이 무안군 월선리예술인촌에서 5월4일부터 8일까지 5일간 열린다. 지난해 목포시는 목포가 도자기와 연관성이 없다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도자기축제를 없앴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이듬해 산업도예전시관을 개관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었지만…. 자치단체가 외면해서 작가들이 주머니를 털어서 직접 축제형식의 모듬전을 여는 것이다. 무안분청의 맥을 되살려 내겠다." / 김대호

덧붙이는 글 | 분청자기는 고려청자의 쇠퇴와 조선백자 등장 틈새에서 발생했는데 우리가 가장 서민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옹기류 다음으로 널리 애용된 생활용기입니다. 무안분청은 철분이 많은 적토로 자기를 성형하고 백토로 분장해 구워내는데 문양처리가 간명하고 자유로우며 기물의 상단만 귀약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나라 도자기사에서 무안분청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분청자기 가마터 대부분이 전남에 있고 그 중 45%가 무안반도(무안 신안 함평)에 소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려청자의 뒤를 승계해 승달산을 중심으로 해상운송이 용이한 영산강과 운남반도 주변에서 전성기를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보통 자기의 환경적 요건을 대토, 땔감, 물, 수송로와 경제적 수급체계로 분류하는데 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를 가장 잘 충족해 주는 지역을 무안군으로 꼽고 있습니다.

무안반도는 서남해안과 영산강을 끼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인데다 비옥한 농경지와 거주에 합당한 구릉 등 사람이 살기에 필요한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무안분청은 지배층의 이익에 복무했던 관요에서 생산해내던 고려청자가 서서히 쇠퇴한 이후 그 기술과 도공정신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백성들에게 되돌려 준 백성들의 자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청사기는 순박한 조선민중의 심성과 한국적 풍토성을 잘 표현해 주는 도자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도자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흙인데 여주, 이천, 광주는 백자토가, 강진지역은 소량의 철분이 섞인 황토가, 무안은 철분이 많은 적토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사토질이 많은 무안적토는 민중들이 주변에서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흙으로 도자기로 구워냈을 경우 거칠고 투박해 청자백자와 달리 세련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분청은 거친 표면을 흰색으로 분장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안지역의 적토가 가장 잘 어울리고 그것이 분청사기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입니다.

<목포대학교 평생교육원 도예학과 김문호 교수의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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