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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충남 공주 우금티 고개에서 장승제가 열렸는데 엄청 추웠습니다. 우금티에서는 매년 두 차례의 행사가 열립니다. 11월에 열리는 추모제와 대보름 무렵에 열리는 장승제 행사가 있는데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우금티 기념사업회 회원들은 늘 동장군을 만납니다.

▲ 우금티 고개에 세워진 장승, 공주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기념사업회에서는 이곳에서 매년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다
ⓒ 송성영
우리 식구는 공주 지역에 정착하면서 우금티 장승제에 참여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추모제는 몇 년에 걸쳐 참여해 왔습니다. 언제나 행사장에서 덜덜 떨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볕이 좋아 이번 장승제는 날이 좀 푸근하겠지 싶었는데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식구는 두툼한 옷으로 완전무장을 하고 고사떡을 먹겠다며 점심식사를 건너 뛴 채 행사장으로 나섰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자료로 남길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우금티 행사 때마다 엄칭히 춥다잉."
"작년에도 그랬나?"
"아빠, 억울하게 죽은 동학농민군들이 한이 많아서 그런가봐."

역사에 관심이 많은 큰 놈 인효 녀석이 우리 집 사랑방 손님들 얘기를 귀담아 들었는지 아는 체를 합니다. 아는 체 할 적마다 곱지 않은 눈총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그리 밉지 않았습니다.

▲ 모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금강 풍물패에서 신명을 돋구웠다.
ⓒ 송성영
제상은 돼지머리에 시루떡과 과일 몇 개로 조촐하게 차렸습니다. 장승 앞으로 모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날씨만큼이나 썰렁했지만 금강 풍물패에서 신명나게 흥을 돋우었습니다. 사진을 찍고 나 또한 어깨춤이 절로 났습니다.

누군가 내 옆에 와서 그럽니다.
"술도 별로 안 마시고 다들 워떻게 흥을 잘 낸 디야."
"그렇지유, 사람덜은 벨루 없지만 신명나 내유."

사람들이 많지 않아 사진 찍기가 한결 편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사진 촬영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들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경건함을 요하는 어떤 전통문화 행사장에 가면 극성스러운 언론사 사람들 때문에 이맛살이 일그러질 때가 있습니다. 언론인들의 사진 촬영을 위해 행사를 벌이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어떤 인간들은 언론사에 근무하는 것이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들먹거리기도 합니다.

▲ 통일을 기원하는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 회원들
ⓒ 송성영
동학농민군들의 원혼을 달래고,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는 조촐한 굿판을 마치고 다들 배가 고팠는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시루떡에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을 사람들'이 별로 없다보니 떡이라면 환장을 하는 '떡보'인 내가 제일 신났습니다.

우리 집 두 촌놈들 역시 할아버지에 지 애비 입맛을 이어받아 떡보인데, 작은 아이 인상이 녀석은 시루떡보다 쌀 막걸리가 더 좋은가 봅니다. 요 며칠 내내 쌀 막걸리 타령을 했거든요.

며칠 전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공사판에서 쌀 막걸리를 맛있게 마시는 아저씨들을 봤나봅니다. 녀석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대뜸 그럽니다.

"쌀 막걸리 먹고 싶다, 배고픈데 쌀 막걸리 없어?"

그날요? 밥만 먹었지요. 녀석을 위해 부러 쌀 막걸리를 사다 줄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내 어렸을 때처럼 막걸리 주전자를 딸려 보낼 환경이라면 적당히 취할 만큼 마실 기회를 제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됫박으로 술을 팔지 않으니 그럴 수도 없었지요.

장승제 지내던 날, 녀석이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따끈한 어묵을 담았던 그릇에 녀석이 그토록 원하던 쌀 막걸리를 따라 줬더니 발칵 발칵 잘도 마시더군요. 자식새끼 술주정꾼으로 만들 작정이냐고요? 자식새끼 술주정꾼 만들 애비 봤습니까? 그래봤자 서너 모금 마셨습니다.

막걸리를 마시는 인상이 녀석을 보면서 난데없이 인상이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동학농민군들의 자식들이 떠올려 졌습니다. 우금티에서 죽어간 수많은 동학농민군들, 세상에 남겨진 그 자식들은 굶어죽을 만큼 비참한 세월을 보냈을 것이었습니다.

지난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어 동학농민전쟁 110년 만에 농민군의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일제 앞잡이 후손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불린 재산을 되찾고 있는 이 땅의 현실에서 과연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농민군들의 후손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 다들 힘을 합쳐 삭아 내리고 있는 10년된 장승을 내렸다.
ⓒ 송성영
10년 전 우금티 고개에 세운 장승들이 눈비 바람에 삭아 내려앉고 있었습니다. 장승제를 마치고 다들 장승에 매달렸습니다. 밧줄을 묶어 몇 차례 흔들고 잡아당기니 그 거구의 장승들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헌데 장승에 매달려 힘쓰던 우금티 기념사업회 회원들 중에 20대 청년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요즘 시민단체의 추세가 그런가요? 우금티 기념 사업회의 자체 운영은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고 있는데(물론 행사비는 시로부터 얼마간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동안 20대 청년들은 거의 만나 보질 못했습니다. 대부분 40대였고 50대로 접어드는 몇몇 사람과 30대 역시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 돈벌이 셈에 밝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장승은 제 목숨을 다 하고 부스러져 흙이 되고 있었다
ⓒ 송성영
목숨을 다하고 땅에 누운 장승을 낑낑거리며 우금티 기념탑 뒤편에 마련된 봉화대로 옮겨 넣고 불을 붙일 무렵 회원들 중에 누군가 그랬습니다.

"날씨가 풀렸나봐요."

그 뿐 아니라 다들 날씨가 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추위가 누그러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대한 장승을 내려 봉화대에 옮겨 태우는 과정에서 몸에 열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모두가 한바탕 흡족하게 웃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이인면 쪽으로 잡았습니다. 이인면사무소 앞 비석거리에 서 있는 박제순 공덕비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제순 공덕비 앞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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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를 비웃는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

하지만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 앞에는 여전히 아무런 안내문도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11월 16일 <우금티를 비웃는 '을사오적' 박제순의 공덕비>라는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를 올리고 나서 공주시 문화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안내문을 설치해 달라는 건의를 했었습니다.

박제순 공덕비 앞에 '박제순이라는 인물은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다'는 안내문을 세워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그들은 1 개월 안에 '박제순 공덕비'에 대한 문화재 위원들의 심사를 거쳐 안내문을 설치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3개월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을사오적 박제순은 여전히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공덕을 높이 찬양 받고 있었습니다.

▲ 지난해 11월에 찍은 박제순 공덕비.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안내문 하나 없었다
ⓒ 송성영
담당 공무원들이 무척 바쁜가 봅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이기에 나라 일 때문에 무지무지 바쁘겠지요.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의 공덕에 관심을 가져야 할 만큼 한가롭지 않은가 봅니다.

이번에는 중앙 정부의 책임 있는 기관에 다시 '상소'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도 통하지 않으면 어디로 '상소'를 올려야 하나요?

직접 안내문을 설치하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일은 개인이나 시민단체에 국한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라 차원에서 바로 잡아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을사오적 박제순의 건재함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진눈깨비가 무수하게 휘날리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를 향해 진격했거나 혹은 후퇴했던 길이었습니다. 길목에는 동학농민군 장수가 말을 묶었다는 얘기가 전해져 오는 나이 많은 나무도 있었습니다.

"이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게 돼서 그런지 눈이 동학농민군들의 원혼 같다."

장승제 제상 위에 올렸던 돼지머리를 먹을 사람이 없어 막걸리 안주하고 남은 돼지머리를 통째로 가지고 온다는 아내가 그럽니다. 내가 좋아하는 시루떡도 좀 챙겼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시루떡도 많이 남았다고 합니다.

바람이 불고 자동차 앞 유리로 휘어진 눈발이 자꾸만 자꾸만 꽂혀왔습니다. 저만치 눈앞에 보이던 계룡산이 동학농민군들의 원혼 같은 희끗희끗한 눈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온통 진눈깨비로 가득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동학농민전쟁 우금티 기념사업회'에서 간사로 일하실 분 있으면 연락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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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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