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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25년 전 우리들 쫄병에게는 휴일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날은 일요일인데도, 작업 차출에 끌려 나가서 오전 내내 일하다가, 12시쯤 부대로 돌아왔다. 군대는, 다른 것은 몰라도, 밥은 꼬박꼬박 먹인다. 식당에 가려고 연병장에서 줄을 서 있는데, 행정반에 있던 내 동기가 나를 불렀다.

"너 애인 면회왔어. 면회실에게 기다린 지 벌써 두 시간 되었을 거야. 빨리 면회실에 가봐."

면회오면 위병실에서 행정실로 전화하고, 그러면 행정병이 당사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 부대의 시스템이었다. 행정실에 가서 일직사관인 이 중위에게 면회 신고를 했다.

"충성! 일병 000 면회 다녀오겠습니다!"

ROTC 출신의 이 중위는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 그에게는 따분한 일요일이었나 보다. 나의 아래 위를 훑더니, 꼬투리를 잡았다.

"복장 불량이구만. 네 애인이 널 보면 거지인 줄 알겠다. 군화가 그게 뭐냐? 번쩍뻔쩍 광 내서 다시 와. 손도 깨끗이 씻고."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 때 우리 부대에서 가장 바쁜 군번이었다. 종일 일하고 저녁에도 일하고 오밤중에는 자다말고 일어나 한 시간 보초를 섰다. 그러니, 내 손의 상태는 말씀이 아니었다. 마른 논처럼 손등이 쩍쩍 갈라져 있었고, 갈라진 곳에서는 피가 배어 있었다.

내 군화도 내 손등과 다를 바 없었다. 군대 말로, 'XX이 휘날리게 바쁜 군번'이라서 평소에는 군화 닦을 염두도 못내었다. 그러니 갑자기 닦는다고 번쩍번쩍 광이 날 군화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교는 달랐다. 별로 하는 일 없이, 당번병들이 떠다 주는 밥 먹고, 당번병이 닦아 주는 군화를 신는 그들이었다. 귀족이 노예를 이해 못하듯, 장교가 거지 모습의 쫄병을 이해할 턱이 없었다.

그래도, 손등에 안티프라민을 쳐발랐다. 그 당시 안티프라민은 쫄병들의 필수품이었다. 갈라진 손등에 바르려고 구입한 안티프라민이 아니었다. 그 당시 우리 쫄병들에게 안티프라민은 구타 자국을 지우는 데 특효약이었다. 구타가 많을 때라 안 맞는 날이 없었고, 맞은 자국을 빨리 안 지우면 또 터지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도 안티프라민을 발랐다.

군화는 아무리 해도 광이 안 났다. 구두약을 칠하다가 포기하고 다시 행정실에 갔다. 행정실에는 이 중위가 보이지 않았다. 행정병들도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단다. 그를 찾아 뺑뺑 돌다가 겨우 찾았다. 그는 취사장 따뜻한 곳에서 하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뺑이 치는' 쫄병이 있는가 하면, 상팔자의 장교가 있었다.

"충성!"

나를 힐끗 처다본 이 중위는,

"듣자하니 지난달에도 애인이 면회왔다며? 애인 없는 사람들은 서러워 군대 생활하겠어?"
"..."
"5시까지 와!"

면회실까지 뛰었다. 벌써 2시가 지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기다렸을꼬? 이 먼 데까지 면회 오려면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을 터인데, 나 기다리느라고 점심도 안 먹었을 터인데... 그러나, 우리의 안타까운 만남은 3시간을 못 채웠다. 내가 면회소를 떠난 것은 오후 5시, 그리고 일직사관이 있는 행정실에 가서 보고한 것이 그 5분 후이었다.

사실, 우리 부대에서 일요일 면회시간은 오후 6시까지였다. 귀대 시간 5시는 이 중위가 심술이 나서 일부러 그렇게 지시한 것뿐이었다. 나도 5시까지 시간 맞추어 돌아오려고 했지만, 면회소는 포병 사령부 사병들과 면회객들로 붐볐다. 그 분위기에서 나만 쫄아서 일찍 귀대한다는 것이 애인에게 미안했다. 새벽에 집을 출발하여, 부대까지 그 먼 길을 온 애인이 아닌가. 그리고 면회실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는데.

더구나, 면회실은 부대 안 위병소 옆에 있었고, 외출도 안 되는 것이라서, 탈영의 염려도 없었다. 우리 부대는 독립 중대였는데, 포병 사령부의 울타리 내에 있었고, 면회실은 포병사령부의 면회실을 사용하였으니, 부대 밖으로 외출간 것이 아니어서 귀대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군대는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걸이다. 규정은 쫄병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까라면 까!" 그것이 내가 쫄병 때 가장 많이 듣던 말이었다.

"충성! 면회 다녀왔습니다."
"지금 몇 시야?"
"5시 5분입니다."
"이 쫄따구 군기가 싹 빠졌군. 너 몇 소대야?"
"1소대입니다."
"그래? 야, 행정병!"
"넷!"
"1소대, 열외 인원 없이, 1분내에 빤쓰 바람으로 연병장 집합!"
"넷?"
"이 새꺄, 빨리 뛰어 가서 전달해!"
"넷, 알겠습니다."

1분 후, 나는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강추위이었다. 영하 10도의 추위를 팬티 한 장으로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연병장의 날카로운 왕모래 또한 모질게도 내 맨발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떨고 있는 이유는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애꿎은 우리 내무반 동료 모두 이 추위에 빤쓰 바람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일요일 저녁, 느긋하게 TV 연속극을 즐기고 있던 고참들에게는 더 더욱 날벼락이었을 게다. 내 주위의 웅성거림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씨발, 어떤 새끼 땜에 시방 빤스바람하는 기여?"
"병장 말년에 이게 뭔 개지랄이냐. 어떤 새끼인지 야전삽으로 대갈통 부셔뿐다."

한겨울이라서 어둠이 빨리 왔다. 사병들 빤쓰의 흰색깔이 어두움 속에서 유난하다. 사병들의 집합을 내무반장이 보고했나 보다. 사열대 위로 일직사관인 이 중위가 올라가서 훈시를 시작한다.

"이거뜰 (군기가) 싹 빠졌어. 일병 갓 달은 새파른 놈이 귀대 시간 늦는다는 게 말이 돼? 병장 놈들은 요사이 쫄병들 교육 어떻게 시키는 거냐? 이 씨발놈들아."

이 중위는 그러나 구타는 하지 않았다. 반시간 정도 우리를 추위 속에서 떨게 하였을 뿐이다. 내 이름도 거명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야비한 인간이 과연 그것으로 나에 대한 제재가 끝났다고 생각했었을까?

빤쓰바람 기합이 끝난 직후의 내무반은 폭풍전야 바로 그것이었다. 내무반은 조용하였다. 고참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우리 부대 사병들의 구타 장소는 식기장이었고, 아마도 고참들은 거기에서 '내림빳따' 의식을 행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제일 윗 고참이 그 아래 고참을 때리면, 그 고참은 다음 아래 동기의 고참을 때리고, 그 다음은 다시 아래 동기를 때리는 것인데, 내림빳따의 특징은 한 기수 내려갈 때마다 빳따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나 보다. 나의 바로 윗 고참이 와서 우리 동기 모두 식기장에 집합하란다. 군대에서 사병들 제재는 언제나 동기 집합을 통한 연대 책임제이었다. 나로 인해, 내 동기 일곱 명도 같이 얻어 터지는 것이었다.

식기장에는 식기조장 고참들뿐만 아니라, 그 윗 고참들도 있었고, 그들의 살벌한 눈초리가 내 이마에 꽂히고 있었다. 하기사,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이들 맞았을꼬. 그 한풀이가 이제 시작될 찰나였다.

겨울이라서 식기장 바닥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고, 우리는 맨발로 서 있도록 강요받았다. 욕설로 가득한 고참들의 훈계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의 발바닥은 차차 얼어갔다. 그 다음, 식기세척대 위에 우리의 얼려진 발이 올려지고, 그들은 우리의 발바닥을 때렸다.

"에게~ 겨우 발바닥을 때려요?"하는 독자는 군대를 모르는 사람이다. 얼어붙은 발바닥을 때리는 것은 최고 악질 구타 중에 하나이다. 얼마나 아픈지는 맞아 본 사람이라야 안다. 더구나 신체의 다른 부위와 달리, 발바닥은 아무리 맞아도 통증이 무디어지지 않는다.

그 다음에 고참들이 가져온 것은 물에 불린 곡갱이 자루이었다. 물에 불린 곡갱이 자루는 전설적인 구타 도구이다. 마른 곡갱이 자루로 엉덩이를 때리면, 맞고 난 다음 곡갱이가 튀어서 아픔이 덜한데, 물에 불린 것은 살에 착 들어붙는다.

이번에는 내 동기들을 열외시켜서, 나 혼자만 맞았다. 한 대 맞은 다음, 너무 아파서 내가 펄쩍 뛰니까 고참들이 양쪽에서 내 어깨를 잡아 꼼짝 못하게 한다. 또 한 대 맞고 신음을 지르니깐, 이제는 조그마한 막대기를 이빨 사이에 물려버린다.

어디서 이런 고문의 아이디어를 얻었을까? 물에 불린 곡갱이 자루는 헌병대만 쓴다는데... 이러다가 내가 죽는 것은 아닐까...? 여러 대를 맞는 동안 나의 의식은 차츰 가물가물해졌고 드디어 나는 의식을 잃어버렸다.

내가 눈을 뜬 것은 내무반 침상 위이었다.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엎드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누우려고 했는데,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그만두었다. 곡갱이 자루로 맞으면서 엉덩이가 터져버린 것이다.

도저히 걸을 수 없자,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내무반에서 누워서 지냈다. 보초도 열외이었고, 작업도 열외, 교육도 열외이었다. 동기들이 포병사령부 의무실에서 약을 가져다가 발라주었다. 강 병장이라고 밀양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좋았다. 내 옆으로 오더니,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나도 몇 번인가 철조망 잡고 올라갔다가 내려왔어. 탈영하면 우리 엄니 가슴에 못박는 것이지. 그런 심정으로 군대생활 하다 보니 이제 제대할 때 가까이 왔구만. 니도 딴 맘은 먹지 마라."

간부들도 우리 내무반에 들어왔다가 모포 깔고 누워 있는 나를 보았는데, 그들은 모른 척하였다. 그 당시 우리 부대에서는 사병들의 자체 제재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었다. 영창이 있긴 있었지만, 내 군대 생활 동안, 영창간 병은 한 명도 없었다. 그 대신 매타작 없는 날은 어째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나를 때린 고참들이 밉지 않았다. 나의 분노는 그 빤쓰바람을 시킨 이 중위였다. 고약한 악질이었다. 그때 내게 총알이 있었으면, 쏴 죽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부대에서 탄약은, 사격 연습 때를 제외하고는, 병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나는 군대 생활 내내 이 중위에 대한 복수심에 이를 갈았지만, 쫄병과 장교 간의 계급 차이는 너무나 멀고 멀었다.

내가 이 중위와 다시 부딪친 것은 제대 후 2년 쯤 되었을 때였다. 그 때도 일요일이었다. 나는 늦잠을 잔 후, 집에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려고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층집 베란다에서 애기를 안고 있는 그를 본 것이었다.

그를 본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한참이나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는데 여태 몰랐다니...

애기에게 정신 팔린 그는 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가서 쌍판때기를 한 대 갈기고 싶었다. 주먹을 불끈 쥐는데, 집안에서 그를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OO이 아빠! 분유 먹일 시간이에요."
"알았어. 들어갈게."

아기를 안고 그는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나는 이미 제대했노라고. 그리하여 그 사건은 이미 시효 만료된 것이라고.

덧붙이는 글 | 내 군대의 황당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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