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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타워에서 내려다본 남산식물원 일대. 그곳엔 조선신궁이 있었다.
ⓒ 권기봉
한일협정 문서가 공개됐다. 1965년 6월 22일 일본과 수교협정을 맺은 지 40년 만에 공개된 이번 문서는, 한일회담과 관련한 161권의 의제별 토의개요 중 청구권과 관련한 57권, 그 중에서도 5권(16절지 1200쪽 분량)만 공개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문서는 내용이나 분량이 한일협정 관련 전체 자료 중 극히 일부에 국한된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7차 회담 회의록이 최초로 공개됨으로써 청구권에 대한 한-일간의 견해차가 여실히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한일협정을 대하는 우리 정부의 부적절한 자세도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에게 받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의 애매모호한 성격이 단적인 예다. 일본 정부는 자금의 성격을 두고 시종일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 차원의 ‘청구권’ 자금으로서가 아닌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던 반면, 한국 정부는 애초 협상 과정에서는 ‘청구권’을 주장하다 결국 뒤로 한발 물러섰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 정부가 박정희 정권의 약점을 잘 이용한 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개인 청구권을 팔아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 건설비 등 경제개발 자금을 구걸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일제에 직접적으로 부역하거나 그에 기반을 둔 세력들로 이루어진 그들이 피해자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보상금을 통치 자금으로 쓰는 등 실로 기막힌 일을 벌인 것이다.

▲ 지난 1964년 3월 24일 대일(對日) 굴욕외교에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을 경찰이 최루탄과 진압봉 등을 이용해 진압하고 있다.
ⓒ 합동연감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 중 일제에 의해 전쟁에 나가 목숨을 잃은 한국인 군인 및 군속의 직계 가족 단 8552명에게 개인보상 차원에서 돌아간 돈은 일인당 약 30만1056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징용 피해자 신고접수 공고도 신문광고를 통해 8개월밖에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고접수를 했다한들 ‘죽지 않고’ 부상만 당한 생존자들은 아예 보상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렇게, 한-일 두 나라 정부는 서로의 필요에 따라 ‘과거사’와 ‘돈’을 맞바꾸는 정치 흥정을 했다. 결국 일제에 의해 유린당한 징용 피해자들, 한-일 두 나라 정부가 보듬었어야 할 그들은 일제에 의한 착취에 이어 이번에는 한국 정부에 의해 배신당하는 처지가 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서울 남산의 처지도 징용 피해자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록 인격을 갖춘 대상은 아니지만, 서울 남산 역시 한국과 일본(일제) 두 나라 위정자들의 입맛대로 이용만 당한 것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은행, 그리고 신사

일제는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정신적·문화적으로도 식민지 조선을 지배하려 했다. 즉 조선총독부(정치권력)와 조선은행(경제권력) 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신사와 사당을 세우고 일본식 학교 교육을 함으로써 정신문화적으로까지 조선과 일본을 일체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나마 조선총독부 청사는 김영삼 정권 시절 헐리기는 했지만 첨탑 등 그 잔해가 독립기념관에 영구 전시되고 있고, 조선은행은 현재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이용되는 등 형체만은 남아 있다.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목격자’와 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허면, 일본 신사는? 현재 서울 남산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 조선신궁의 총면적이 13만여평에 이르렀다는데, 지금의 여의도공원 면적이 약 7만평이므로 단순계산으로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다.
ⓒ 권기봉
목멱산이나 마뫼, 종남산, 인경산 혹은 잠두봉으로 불리기도 했던 서울 남산. 262m의 야트막한 산에 불과하지만 남산은 도성 한양의 안산, 곧 남주작 역할을 했던 산이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할 때 산신을 모시고 봄·가을마다 국가 번영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등, 남산은 현대 서울의 ‘랜드 마크’이기도 하지만 조선에 있어서도 소중한 의미를 갖는 산이었다.

그런 남산의 정신사적 의미를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 마음의 근거지이자 조선 지배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을 비롯, 경성신사와 내목(乃木)신사, 도하(稻荷)신사 등 여러 개의 신사 및 일본식 사찰을 남산 곳곳에 세웠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남산에 신궁을 세운 까닭은?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과 신사 터 답사는 숭례문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제격이다. 예전에는 지금의 리라학원 근처까지만 약간 넓은 길이 있었을 뿐 변변한 도로 하나 없었던 남산이다. 그러던 남산에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384개의 돌계단을 비롯, 웅장한 참배로가 만들어졌다. 주요 참배로는 숭례문에서 남산 꼭대기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을 헐어 그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출발점이 숭례문 언저리였다.

숭례문에서 소월길을 따라 500m 남짓 걸으면 구름다리를 지나 힐튼호텔 앞에 닿게 된다. 힐튼호텔 맞은편으로 석축이 보이는데 그곳에서부터 차례대로 어린이 놀이터와 백범광장, 안중근기념관, 남산식물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조선신궁(1925년 완공)이 있던 터다. 총면적이 13만여평에 이르렀다는데, 지금의 여의도공원 면적이 약 7만평이므로 단순계산으로도 거의 두 배에 가까운 규모다.

그런데 일제는 왜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굳이 이곳 남산에 신궁을 세웠던 것일까? 조선이 한양에 도읍할 때부터 국사당(國師堂)을 세워 무학대사와 여러 수호신을 모셔놓았기 때문에 그 기를 꺾을 심산도 있었겠지만, 일본은 이미 임진왜란 당시부터 남산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즉 임진왜란 때 마시타 나가모리(增田長盛) 등의 왜군이 남산 기슭에 진지를 구축했는가 하면, 이후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는 3·1운동 진압의 주력부대였던 조선헌병대사령부가, 남산의 남쪽에는 국방부와 미군기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및 그 예하 40여단 등이 주둔하기도 했다.

남산의 북동쪽인 지금의 중구 예장동 일대에는 ‘왜성대(倭城臺)’라 불릴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 살았고, 조선총독부의 전신인 조선통감부와 일본공사관 역시 이곳 남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1972년 없어질 때까지 근 5년 동안 15기의 동상을 세웠는데, 그중 3분의 1인 5기의 동상을 남산에 세웠다.
ⓒ 권기봉
일제는 황민화 교육을, 군사정권은 국민정신 고양을 위해

석축 양옆으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놀이터가 나오는데, 신궁에 있던 3개의 광장 중 가장 아래쪽 광장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겨울이라 뛰노는 아이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놀이터, 그 한쪽 구석에 규모가 제법 큰 김유신 장군상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69년 9월 23일 세워진 것인데, 남산에는 이것 말고도 퇴계 이황상이나 다산 정약용상, 유정 사명대사상, 이준 열사상, 성재 이시영상, 3·1독립운동기념탑, 외솔 최현배 선생비 등 정말 많은 동상과 독립운동 관련 기념비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 시절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지낸 손정목은 ‘중복된 것을 빼더라도 한국에 있는 전체 동상의 3분의 2 정도가 남산과 어린이대공원에 몰려 있다’고 말했을 정도다.

남산에 이렇게 다양한 동상들이 세워진 것은 남산의 의미가 남다르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특히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정력적인 활동과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6년 8월 11일 서울신문사에 설치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주요 역할은 한국을 빛낸 애국선열 및 선각자 등 위인들의 동상건립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을 초대 총재로 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1972년 없어질 때까지 근 5년 동안 세종로 네거리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이나 덕수궁 안뜰에 있는 세종대왕상 등 모두 15기의 동상을 세웠다. 그 중 3분의 1인 5기의 동상을 남산에 세웠는데, 지금 앞에 서있는 김유신 장군상과 보다 위쪽에 있는 백범 김구상, 안중근 의사상 등이 모두 그때 세워진 것들이다.

물론 이 동상들이 굳이 남산에 들어서야 할 이유는 없다. 다만 국사교육을 유난히 강조하며 밤낮없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곱씹었던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앞서 일제가 유린한 남산을 국민정신 고양을 위한 교육장으로 조성하고픈 욕구를 느끼지 않았을까? 마치 일제가 남산을 한반도 지배를 위한 황민화 교육장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국회의사당, 남산에 세워질 뻔

▲ 현상공모에 당성된 김수근 등의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계획안.
ⓒ 서울시
어린이 놀이터에서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백범 김구상과 성재 이시영상이 있는 백범광장에 닿게 된다. 지금은 한적하기만한 공원 같지만 한때 국회의사당이 들어올 뻔했던 곳이다.

애초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 밖에 안 되던 1958년 11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지시로 현 서울시의회 건물에 있던 국회의사당의 남산 이전이 결정됐다. 당시 도쿄대 대학원을 수료한 김수근 등 5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설계안이 당선됐는데, 4·19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육군공병단이 건설에 투입되는 등 건설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러나 4·19 이후 근처 주민들의 반대와 ‘왜 하필이면 남산이냐’ ‘왜 산림을 훼손하느냐’ 등 여론의 비판 때문에 1960년 6월경부터 사실상 국회의사당 신축 사업은 중단됐다. 곧이어 61년 12월 16일 서울시는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 취소를 발표했고, 이후 박정희 정권은 윤중제 공사를 막 끝낸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을 지어버렸다.

그러면 그 터는 어떻게 됐을까? 항상 무언가를 부수고 짓고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의 직성에 따라 국회가 들어서기로 했던 땅에는 야외음악당이 세워졌다.

그러나 여름에는 비가 많고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날이 쌀쌀해 ‘야외음악’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다. 게다가 당시에는 전철이나 버스가 닿지 않아 일단 서울역에서 내려 ‘등산’하는 기분으로 걸어 올라갔어야 할 야외음악당.

시설(무대와 관람석, 연습실 등)이 헐려 없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긴 야외음악당이라는 것을 지어놓고 야외음악은커녕 구국기도회와 관제 데모를 열었고, 심지어 야외음악당 준공식을 할 때조차 음악이라는 것이 연주됐다는 기록이 없으니….

▲ 삶의 궤적이 전혀 다른 백범 김구와 박정희 대통령. 그 둘은 이곳 남산에서 부적절한 동거 중이다.
ⓒ 권기봉
일제부역자들이 만든 독립운동가의 동상

허나 정말 생뚱맞은 것은 따로 있다. 동상의 대상 인물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대상인물과 그것을 세운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렇다는 얘기다. 백범광장 한쪽에 자리 잡은 백범 김구상이 그것.

조선신궁이 있던 시절 중간 광장에 해당하던 백범광장에는 현재 백범 김구상과 성재 이시영상이 놓여 있다. 두 주인공 모두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광복군에서, 상해 임시정부에서,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혼신을 다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다. 그런데 백범 김구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동상 받침의 장개석 총통 글씨 반대편에서 재미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

▲ 백범 김구상 왼쪽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을 누군가가 갉아버렸다.
ⓒ 권기봉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길이) 빛나리.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1969년 8월 대통령 ○○○”

백범 김구상을 세우며 대통령 ○○○가 남긴 글이다. 3개의 ○ 안에는 각각 ‘박’, ‘정’, ‘희’가 들어간다.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날카로운 것으로 돌을 쪼아 그의 이름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근래에 논란이 불거진 광화문 편액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자기 글씨를 장소를 따지지 않고 남기는 버릇이 있는 박 전 대통령이라지만 백범 김구상에까지 글을 남겼다는 것은 왠지 꺼림칙하다.

물론 만주군 장교로 해방을 맞은 박정희, 해방 직후 북경으로 가 광복군에 입대해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광복군 북경지대 중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광복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환국운동을 하던 김구 선생과 인연이 일절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때그때 다를지라도 백범과 박 전 대통령이 살아온 길이 전혀 다른 궤적을 그리는 만큼, 백범 김구상의 박정희 글씨가 그렇게 생뚱맞아 보일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이름 모를 이가 ‘다카기 마사오’의 이름을 갉아버린 걸까?

비단 박정희 대통령의 어울리지 않는 글씨만이 아니다. 동상 조각 자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백범 김구상을 조각한 이는 김경승. 미술계의 대표적인 친일전력자 중 한 명이다. 김활란이나 김성수 등 친일인사들의 동상을 제작하는 동시에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이순신 장군상(경남 진해)이나 백범 김구상(남산)과 안중근 의사상(남산)까지 만든 김경승이고 보면, 그렇게 부적절한 캐스팅이 따로 없다.

어린이회관에서 국립중앙도서관으로, 다시 교육과학연구원으로

▲ 남산 어린이회관을 방문한 육영수 여사.(사진출처: 손정목의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백범 김구상 근처에 있는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상(다른 동상들과는 달리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졌다) 앞에 서면, 위쪽으로 꼭대기에 돔을 이고 있는 거대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서울시 교육과학연구원이다. 조선신궁이 있던 시절 신궁으로 올라가던 계단이 있었을 자리로 추정되는 급경사 계단의 왼쪽에 서있는 이 건물은, 애초 박정희 정권 때 어린이회관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만주로 떠나기 전, 대구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기도 했던 전력 때문일까? 박정희는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는 다른 대통령들과는 달리 해마다 1월 1일이면 신년사 외에 ‘어린이를 위한 특별담화’를, 또 매년 어린이날에도 빠짐없이 특별담화를 발표할 정도였다.

그런 그가 육영수 여사가 관리·운영하는 육영재단을 설립한 것은 1969년 4월 4일의 일이다. 이후 한 달 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신문들이 일제히 ‘동심의 궁전, 여기는 우리들 세상, 동양 최대의 어린이회관’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어린이회관 기공식이 치러졌다.

1970년 7월 25일 개관 이후 1973년 말까지 3년 6개월 동안 이곳을 찾은 어린이 수는 330만명 정도. 하루 평균 약 3200명이 찾았다는 얘기다. 야외음악당을 지어놓고 관제 데모나 열었던 독재 정부, 평일에도 그 정도의 어린이들이 이용했다면 이번엔 ‘학생동원’이라는 카드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실제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주택가·학원가에서 멀 뿐만 아니라 열악한 교통편도 고려해야 했기에, 어린이회관으로서는 장소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 국립중앙도서관을 거쳐 교육과학연구원으로 쓰이고 있는 옛 어린이회관.
ⓒ 권기봉
때마침 소공동에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이전 문제가 불거졌다. 일제 시대였던 1924년, 장서 28만권으로 소공동에 문을 연 국립중앙도서관은 1441평(연건평) 밖에 되지 않는 등 장소가 비좁아 이전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말썽 많던 남산 어린이회관이 눈에 들어왔고, 곧 그곳으로의 이전이 결정됐다. 1974년 7월의 일이다.

그러나 급하게 먹은 밥은 체하기 쉬운 법. 타당성 검토를 명확히 하지 않았던 것일까? 어린이회관을 도서관으로 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8억3500만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개조했다고는 하지만, 서고의 50% 정도가 지하층에 있어 도서 보존에 문제가 있었고,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바람 소리 등 소음문제를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국립중앙도서관은 남산 어린이회관이 있던 건물로 이사한 지 13년 5개월하고도 26일 만에 서초구 반포동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들어온 것이 서울시 교육과학연구원. 하지만 요즈음 들어 남산 제모습찾기의 하나로 이를 아예 철거해 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앞서 지난 1994년 11월 20일 남산 제모습찾기의 하나로 남산 비탈에 있던 '고도 100m'의 외인아파트를 폭파공법으로 철거한 예가 있거니와, 1998년에는 일본군 조선헌병대사령부에 이어 수도방위사령부가 있던 터를 남산골 한옥마을로 조성한 전력도 있다.

▲ 서로간의 여유도 확보되지 못한 채 서있는 거대한 비석들. 애국심은 강요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거늘.
ⓒ 권기봉
숨 막히는 애국심교육, 비석숲을 만들다

흰색 벽이 유난히 눈에 띄는 교육과학연구원 맞은편으로는 거대한 비석들과 동상, 기념관 등이 보인다. 모두 ‘다카기 마사오’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 관한 기념물들이다.

안중근 의사상 역시 김경승이 조각한 데다가 건립비용을 낸 사람 중에도 친일 전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백범 김구상 못지않은 부절적함을 내재하고 있다. 정작 더 답답한 것은 동상 앞의 그 거대한, 다수의 비석들이다.

물론 안중근이라는 인물이 우리 역사에 있어 존경스럽고 자랑할 만한 인물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허나 여느 것에 비해 큰 규모의 비석들이 서로간의 적당한 여유 공간도 확보되지 않은 채 몰려 있는 모습은 영 답답해 보인다.

물론 조선신궁 등 일제의 정신적 침략을 상징하던 곳이었기에 반작용이 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유불급. 대표적 친일부역자인 권력자와 정당성 없는 독재정권, 그들은 본심과는 상관없이 숨 막히도록 애국심교육을 강요했고 그 결과는 지금 앞에 보이는 것처럼 ‘비석숲’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 남산 중턱에 있는 조선신궁과 참배로가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 아래는 서울역.(출처: 정운현 저 <서울시내일제유산답사기>)
메이지 천황과 일본판 단군, 조선에서 ‘신’이 되다

비석숲 앞의 주차장을 건너 좀 더 나아가면 분수대를 지나 유리로 뒤덮인 남산식물원에 닿게 된다. 바로 조선신궁 본전이 있던 자리다. 조선 강점 2년 후인 1912년부터 전체 예산에 조선신궁 건립 예산을 넣기 시작한 일제는, 1925년 10월 15일 이곳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 광대한 전망은 시간을 잊게 해준다”
조선신궁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신사(조선신궁) 앞에서 시가를 바라보면 총독부, 경복궁은 바로 맞은편, 동쪽에 창덕궁과 종묘가 있고, 옛날의 성벽이 주변의 산 등줄기를 누비면서 꾸불꾸불 연속되어 있다. 이 신사의 일부도 남산에서 시작되어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성벽 자리에 해당된다. 남쪽에는 숲 저쪽에 사단사령부를 비롯한 병사(兵舍)들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한강 물이 완만하게 흐르는 끝, 안개 낀 곳에 멀리 보이는 곳이 인천이다. 다시 눈을 북쪽으로 돌리면 북한산이 솟아오르고, 광대한 전망은 시간을 잊게 해준다.”
- 1937년 발행된 나카지마 마사쿠니(中島正國)의 <선만잡기(鮮滿雜記)>에서. / 권기봉
‘신궁(神宮)'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신사(神社)’보다 격이 훨씬 높은 것인데,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까지 일본 본토에도 15개 밖에 없었다. 그 격에 걸맞게 신궁은 천황이나 천황의 조상이라고 여겨지는 ‘신’을 제신으로 삼고 있는 공간이다. 조선신궁만 하더라도 메이지 천황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제신으로 삼고 있었다.

조선 침략의 장본인이자 조선인의 원수였던 메이지 천황을 조선신궁의 제신 중 한 명으로 삼은 이유야 누구나 알 수 있듯 한국인 역시 그의 은혜를 입은 황국신민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일제의 조선 강점 2년 전 죽은 메이지 천황은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에게 있어서도 신(神)처럼 존숭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인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도시들 중 서울이 둘째는 아닐 텐데 메이지 천황은 1912년에 사망한 지 8년 만에 일본에서 신이 되었고(메이지 신궁, 1920), 다시 5년 후 조선에서 신이 된 것이다. 특히 그를 제신으로 숭상하고 있는 신궁은 일본 도쿄에 있는 메이지 신궁에 이어 조선신궁이 두 번째다. 그만큼 조선신궁의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을까? 정치적인 의도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다.

게다가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사이에서 태어난 태양신, 즉 하늘나라 최초의 군주로 여겨지는 신화 속 인물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메이지 천황과 함께 조선신궁의 제신이 된 그는 일본의 국조(國祖)이자 황조(皇祖)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한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단군에 버금가는 인물인데, 그가 일본 본토에 이어 조선의 수도에서도 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하긴 애초 ‘조선 정벌’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삼한 정벌’의 진구(神功) 황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남동생이자 일본 신화에 한반도와 인연이 있다고 나오는 스사노오 노 미코토(素盞嗚尊) 등도 조선신궁 제신의 후보에 올랐다고 하니, 누가 제신이 됐든 한국인으로서는 다를 바 없었다고 자위해야 할까?

▲ 남산식물원 자리에는 애초 조선신궁 본전이 있었다. 즉 조선신궁의 중심이다.
ⓒ 권기봉
1945년 패전 당시 한반도에는 조선신궁을 정점으로 부산이나 광주, 대구 등에 있던 국고에서 경비를 부담하는 국폐소사(國幣小社) 8개, 각 도나 부, 읍 단위에 있던 69개의 신사, 1062개 사당 등 모두 1400여 개의 신사와 사당이 있었다(단, 패전 당시 일제는 그들과 인연이 깊은 백제의 옛 수도 부여에도 ‘부여신궁’을 조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애초 신궁과 신사를 세우면서 조선인들까지 ‘자기네 집’에까지 와서 절을 하라고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30년대, 특히 1936년 8월 신사 규칙을 개정하면서 조선인의 신사참배는 의무가 되어버렸다.

한국과 만주의 신사를 탐방한적 있는 궁사(宮司; 신사에서 제사를 맡은 사람 중 최고위직) 나카지마 마사쿠니(中島正國)의 <선만잡기(鮮滿雜記)>에 따르면, 1935년의 경우 신사 참배자는 모두 93만7588명이었는데 그 중 20%에 해당하는 22만5488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 해에 244쌍의 부부가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 중 한국인 부부는 6쌍. 신사참배야 호기심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했다 치더라도 결혼은 그렇지 않았을 것인데, 그 6쌍의 한국인 부부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조선신궁의 한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는 신직들의 모습으로, 신직은 신사의 각종 제사를 주관하고 사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출처: 정운현 저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조선신궁 자리에 들어선 ‘동양 최대’의 동상

하지만 일제의 패전은 더 이상 일본의 신들도 한반도에 머무를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한국인들은 해방 직후 형무소를 해방시킨 직후 신사를 불태웠다. 그만큼 신사에 대한 반감이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종전을 알리는 천황의 방송이 있던 1945년 8월 15일, 평양신사가 방화된 것을 비롯해 전국에 널려 있던 대부분의 신사·사당들도 한국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불에 타는 운명을 맞았다.

성신여대 교수로 재직한 바 있는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는 <조선종전의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오전부터 조선신궁과 경성신사의 궁사 세 명이 통화가 안 된 함경북도를 제외한 모든 신사에 전화를 걸어 일본신도가 시작된 이래 최초로 승신식(昇神式)을 올리도록 했다고 한다.

이때 ‘승신식’이란 제의를 올리며 신궁이나 신사의 신령으로 하여금 하늘로 돌아가라고 하는 의식으로서, 일제가 한반도 지배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음을 그들 스스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울에서 조선총독부 청사나 조선은행 건물보다 훨씬 왜색이 짙었던 조선신궁의 풍경도 별다르지 않았다. 16일 오후 5시 조선신궁 승신식을 치른 일본인들은 어린이나 노약자보다 먼저 24일 비행기편을 통해 신물(神物)을 도쿄에 반납한 이후, 9월 들어 자신들의 손으로 조선신궁을 해체하기 시작해 10월 7일 완전 소각했다.

애초 신궁보다 높이 올라갈 경우 총살하겠다고 위협할 정도로 조선신궁을 신성하게 다뤘던 일제, 패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신물을 정성스럽게 다뤘던 것을 보면 혀가 내둘릴 정도다.

▲ 4·19 시위대는 ‘독재자 이승만’을 외치며 그의 동상을 깨뜨려 거리에 질질 끌고 다녔다.
ⓒ 김천길
서대문형무소와 함께 한국인들의 미움을 샀던 곳 중 하나인 조선신궁. 조선신궁이 사라진 후 본전 터에 들어선 것은 공교롭게도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이었다.

이미 국민들로부터 원망을 사고 있었지만, 1950년대 집권세력에게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은 ‘독립의 기둥’이자 ‘건국의 아버지’였고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영웅’이었다. 그런 그에 대한 충성심 경쟁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각의(현 국무회의)는 이승만의 81회 생일을 맞아 조선신궁 자리에 동상을 세우기로 의결했다. 전국의 극장 영화표에 10~20환씩을 더해 받아 동상건립비용 3억원을 조달하기로 한 동상건립위원회는 몸통 길이 약 7m, 총 동상 높이 약 24.5m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의 동상을 세우기로 했다.

백범 김구상이나 안중근 의사상 등을 조각한 김경승 못지않은 친일부역자인 당시 홍익대 교수 윤효중이 조각한 이승만 대통령상은, 애초 계획보다 늦어진 1956년 8월 15일 광복절에 완공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윤효중은 1968년, 세종로 충무공 이순신상을 만든 사람이다).

그러나 제막식을 치른 지 4년 만인 1960년 4·19 당시 성난 군중들에 의해 1차 파괴된 이승만 동상은, 4·19가 있은 지 넉 달만인 8월 22일 지금의 팔각정 자리에 그의 호를 따서 지었던 우남정과 함께 정식으로 파괴됐다.

남산은 언제 비로소 완전한 해방을 맞을까

이렇게, 사람들의 이동이 뜸했던 남산은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어 일본인들의 집단거주지인 왜성대와 군대 주둔지, 조선총독부 전신인 조선통감부 등이 들어서며 점차 훼손됐다. 1910년 당시 전체 수목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소나무도 아카시아나무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일제는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지으며 청계천 이북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거대한 참배로를 깔며 신궁 영역을 조성했다.

그러나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아카시아나무’로 뒤바뀐 것이 비단 일제만의 잘못은 아닌 듯하다. 남산을 파고든 일제 못지않게, 한국의 독재정권 역시 남산을 자기들 입맛대로 이용한 것이다.

독재자의 동상이나 그런 권력자에 의해 친일 미술가가 만든 독립운동가 동상, 서로간의 간격도 배려되지 않은 채 들어선 비석들, 독재정권의 오른팔 안기부 청사 등이 그것. 그 과정에는 최소한의 예의도 상식도 없었다.

남산은 그렇게 위정자의 권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역사적 과오를 감추는 ‘전시장’이 되어야 했고, 오히려 친일부역자들이 앞장서 일반 국민들의 애국심을 강요하는 ‘교육장’이 되어야 했다.

남산이 일본신궁으로부터 해방된 지는 올해로 60년, 이승만 대통령상이 시민들에 의해 쓰러진지는 45년째 되는 해다. 기나긴 일제 강점기와 한국의 슬픈 역사로부터 남산이 완전히 해방되는 날은 그저 요원하기만 한 걸까?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inlandian.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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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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