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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개된 한일 회담 문서와 관련하여 다양한 논의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아무리 국가 기밀이라 할지라도 대개 20~30년이 지나면 공개할 수 있는 외교 문서들을 정부가 40여년 만에 마지못해 공개한 것은 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제라도 진실의 일부가 밝혀져 과거의 잘못이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

40년 전의 일이 이제야 밝혀지게 된 데는 학계나 언론계의 잘못도 적지 않다. 이러한 문서들을 비공식적으로는 오래 전부터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부는 남은 문서들도 하루 빨리 공개하여 진상이 철저하게 밝혀지도록 하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 늦게나마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관련 문서들을 완전히 공개한다 할지라도 시원하게 밝혀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두 나라가 몇 가지 중요한 쟁점들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서도 협상을 서두르며 협정을 졸속으로 처리한 데는 미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한일 수교를 처음부터 제안하고 주선하며 될수록 빨리 타결되도록 끊임없이 압력을 넣었던 것이다. 물론 1905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외교권 박탈, 1945년 해방과 분단, 1950년대 전쟁과 휴전, 1960년대 이승만의 하야와 박정희의 집권 및 베트남 파병, 1980년대 전두환의 집권 등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미국이 상당한 역할을 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따라 요즘 일부 학자들이 한일 협상 과정에서 행한 미국의 영향력에 관해 조심스럽게 또는 추상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덧붙여 나는 미국의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소개함으로써 한일 협정이 '왜' 그렇게 졸속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아울러 앞으로는 이와 비슷한 비극적 외교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데 교훈이 되길 바란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의 외교 문서들이 1980년대부터 비밀 해제되어 부분적으로 공개되었는데, 한일 회담이 시작되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1952-1960)의 한국 관련 외교 문서들은 1994년에, 케네디 행정부(1961-1963) 문서들은 1996년에, 존슨 행정부(1964-1968)의 문서들은 2000년에 <미국의 대외 관계>라는 책으로 출판까지 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한일 협정이 타결되던 무렵의 문서들은 미국이 한국과 일본에게 왜, 그리고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한일 두 나라는 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래 내용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공개한 외교 문서들을 바탕으로 엮은 것이다....필자 주



▲ 1961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방미중인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워싱턴공항에 도착한 후 존슨 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다. 오른쪽 끝은 정일권 전 국무총리.
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한일 수교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주선한 것은 경제와 안보 문제 때문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하면서 동북아에서 공산권에 대한 안보를 강화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일 감정은 미국의 노력에 걸림돌이 되었고 그의 완고한 성격은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미국의 국무부 장관이나 관리들이 동북아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한국인들보다는 일본인들을 더 신임하는 등 너무 친일적이라고 주한미국대사에게 비판하며 불만을 표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1960년 3·15 부정 선거로 학생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미국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라고 경고하며 이승만 정부의 이러한 약점을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한국 영해를 침범한 일본 어부들을 구속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단절하면서 미국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8년 이승만이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이 1950년대 초에는 그를 극비리에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가 미수에 그치자, 결국 1960년 4월 혁명 과정에서 물러나도록 압력을 가한 배경의 일부가 여기에 있다.

미국, 한-일 관계개선 요구로 동북아 안보강화 꾀해

1960년 4월 이승만이 물러나자 미국은 과도정부의 수반 허정에게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요구했다. 마침 허정은 1959년 8월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는데 미국은 일본에 대한 그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그는 한일 관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며 자신이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에 "특별히" 힘쓸 테니 미국은 일본 정부의 재일 동포 북송을 막는 데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매카나기 주한 미 대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1960년 5월 5대 정책을 발표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한일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맥아더 주일미국대사도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하여 미국은 한국의 새 정부를 이용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들어선 장면 정부 역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 "새롭고 적극적인 교섭"을 시도하지만 1961년 5·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었다. 미국은 박정희가 해방 전에는 친일 활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으며 그의 쿠데타 동지들 가운데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는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를 승인하며 한일 회담을 서두르도록 촉구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1961년부터 일본과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여 1년 만에 일본의 “경제 협력” 약속을 받아내지만 영해 및 어로 문제 등으로 합의를 진전시키지 못했다.

미국은 1963년부터 한일 협정을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존슨 대통령이 두 나라 대사들을 부르기도 하고 러스크 국무부장관이 일본 총리와 한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도 하면서 다그친 것이다.

“한일협정은 미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 박정희 정권 압박

또한 존슨은 1964년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브라운에게 "한일 협상의 조기 타결이 가장 급선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일 수교를 서두르게 했는데, 그 이유는 국가안보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요즘 동북아의 가장 급선무는 한일 협정이다. 이는 병력을 감축하는 것보다 미국의 재정 부담을 줄이는 방법이다. 우리는 2000만 인구의 한국에 매년 3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는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간에 걸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나라를 찾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일본이다. 한일 협정이 맺어지면 6억 내지 10억 달러의 일본 자금이 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 이래 남한에 38억 달러 이상의 경제 원조와 28억 달러 이상의 군사 원조를 쏟아부었는데, 우리의 모든 원조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는 여전히 미국의 불안정한 의붓자식(unstable U.S. stepchild)이다.(...) 우리는 1965년 한국에 대해 3억 5천만 내지 4억 달러의 원조를 계획하고 있는데 결실이 나타나지 않는 지불을 계속할 수는 없다."

당시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한국 정부는 1964년 11월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추진하게 되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박 정권을 더욱 압박했다. 정권의 정통성 확보 및 유지를 위해 국민의 지지보다 미국의 승인과 지원을 더 중시했던 박정희는 방미시기를 한일 협상의 진전 과정과 연계시키겠다는 미국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한국 정부는 박 대통령의 미국 방문 전에 한일 협정이 서명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일본 정부에 합의문 작성을 서둘러줄 것을 촉구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한국처럼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 자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히라 외상은 주일미국대사에게 미국의 압력이 일본에서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으니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지 말고 한일 협상을 "일본인들의 방식으로 일본인들의 페이스에 따라" 추진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일본은 한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망언까지 곁들이며 '피해 보상'이 아닌 '경제 협력' 또는 '독립 축하'의 명목으로 돈을 주겠다고 배짱을 내밀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큰 관심을 보여 왔는데 미국은 이를 이용해 일본을 압박할 수 있었다. 당시까지 일본과 중국의 관계 개선을 허용하지 않던 미국이 일본에게 한일 협정을 먼저 타결하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어떠한 접근에도 더 이상의 반대를 하지 않겠다고 암시한 것이다.

미국, 박 정권에는 ‘승인’- 일본에는 ‘중국과 국교정상화’ 내걸고 한-일협정 압력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박 대통령은 1965년 5월 미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미국에게 한일 협정을 6월까지 체결할 수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주일한국대사에게 친서를 보내 6월 15일까지 한일 협상을 매듭짓도록 지시하면서 성사를 위해 그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협상 대표들은 일본 측에서 문제 삼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합의문 끝에 “협정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쟁점은 무엇이든지 추후 협상의 주제가 될 것”이라는 문구를 덧붙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 대표들이 일본과 협상하면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국내적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하여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합의를 미루게 된 배경이다.

참고로 한일 협상 과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쟁점 가운데 대표적인 게 독도와 관련된 문제인데,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러스크 국무부장관이 한일 협상의 조기 타결을 거듭 촉구하자, 그는 독도 문제가 두 나라 사이에 가장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밝혔다.

이에 러스크가 양국이 독도에 공동으로 등대를 세우고 함께 이용하면서 서서히 문제를 해결하라고 제안하자, 박정희는 그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대꾸했다.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일본에서는 섬을 폭파해 없애버리자는 제안을 내놓기도 하고 미국에서는 공동으로 이용하라는 권유를 내놓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박 정권이 일본과의 협정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야당과 학생들의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 1964년 6월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주한미군 사령부는 데모 진압을 위한 병력 차출을 승인했다. 결국 1965년 6월 일본에서 한일 협정이 체결되는데, 그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항의 데모가 그 해 8월 위수령이 선포될 때까지 전개되었다.

그 데모에서 나온 구호 가운데 하나가 "양키 입 닥쳐!"였으니, 굴욕적인 한일 국교 정상화가 졸속으로 처리된 데는 미국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사실이 흔히 '6·3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당시 대학생들에게 어느 정도 알려졌던 것이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엄령 아래서 일본을 찾아 한일 협정에 서명했던 이동원 외무부장관은 5개월 뒤 미국을 방문하여 국무부 관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큰형 (the big brother)이다. 두 동생들이 과거에 서로 다투었는데, 앞으로 동생들이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집안일 (family matters)에 관해 얘기할 수 있도록 형이 이끌어주면 좋겠다."

미국은 한국을 '의붓자식'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한국 정부는 미국을 '큰형'으로 받들고 싶어 했고, 국민의 깊은 반일 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던 셈이다. 따라서 졸속으로 처리된 한일협정과 관련하여 미국의 오만함과 일본의 무례함에 대한 비판에 앞서 한국의 비굴함을 우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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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평화통일 문제, 남북관계, 북미관계, 북한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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