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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가 납치됐다. 범인은 잡혔으나 아이를 숨겨둔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아이를 숨겨둔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 경찰이 범인에게 고문 위협을 가한다. 이때의 고문위협은 정당한 것인가?

지난해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들의 비인간적 가혹행위가 세계적 논란거리였다면 독일에서는 은행가 아들 납치살해범에게 폭력과 고문위협을 가한 현직경찰관의 행위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납치범과 담당 경찰, 나란히 법정에 서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 개프갠에게 희생당한 야콥 폰 메즐러의 모습.
28세의 법학생 마그누스 개프갠은 2002년 9월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11세였던, 한 은행가의 아들 아콥폰 메츨러를 납치했다. 개프갠은 아이를 질식사 시킨 후 아이의 사망사실을 숨긴 채 이틀 후 아이의 부모로부터 몸값 1백만 유로를 받았다.

몸값을 지불하는 순간부터 그를 추적하기 시작한 프랑크푸르트 경찰은 다음날 그를 체포했다. 경찰은 아이가 사망한 상태라는 것을 모른 채, 개프갠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숨겨둔 장소에 대해 개프갠이 허위고백으로 일관하자 경찰은 “정확한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폭력과 고문을 가할 것”이라고 그를 위협했다. 위협을 느낀 개프갠은 그제서야 정확한 위치를 자백했고, 경찰이 현장에 급파됐으나 아이는 물론 사망한 상태였다.

이듬해인 2003년 7월, 납치범 개프갠은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003년 1월, 검찰은 개프갠에게 고문위협을 지시한 프랑크푸르트 경찰서 부서장 볼프강 다쉬너와 직접 심문을 담당했던 경찰관 오트빈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고 2004년 11월, 두 경찰관은 협박 혐의로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정에 서게 됐다.

▲ 이번 사건을 지속적으로 다룬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인 짜이퉁 인터넷 사이트. 왼쪽의 사진이 프랑크푸르트 경찰서 부서장 볼프강 다쉬너다.
경찰의 고문위협 사실은 당시 독일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의 대표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던 유르겐 슈라이버(현재 시사주간지 <슈테른>근무) 기자와 <프랑크 푸르트 빌트>의 크로나우어 기자에 의해 밝혀졌다. 당시 슈라이버는 이 사건을 집중 보도하면서 가해자였던 개프갠, 개프갠의 변호사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수사과정에서 고문 위협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를 여론화했다.

이 사건을 여론화 시킨 공로로 두 기자는 독일 일간지 기자에게 수여되는 ‘바흐터상(파수꾼상)’의 2004년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특히 슈라이버는 현 독일 외무부장관인 요시카 피셔의 1968년 젊은 시절의 활동을 발굴 보도해 2002년 같은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담당 경찰들 “아이를 구하기 위한 행위였을 뿐”
납치범 개프갠 “그건 명백한 인권침해였다”


법정에 선 프랑크푸르트 경찰서 부서장 볼프강 다쉬너(61)는 법정진술에서 “아이가 사흘째 어디엔가 감금된 상태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죽어가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아이를 빨리 찾기 위한 행동이었으며 고문위협이 아니었다”고 자신의 행동을 적극 변호했다.

개프갠의 첫 번째 허위정보로 시간을 허비한 상태에서 ‘직접적 강압’을 통해 아이의 소재를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납치범이 붙잡힌 상태에서 아이가 사망한 사건으로 기록할 것인가의 두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는 또한 이를 실행에 옮기기 전 프랑크푸르트가 소재한 헤센지방의 내무부에 이를 보고했을 때 ‘긍정적 반응’을 얻었기 때문에 이를 ‘승인’의 신호로 이해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헤센 내무부는 <쥐트도이체짜이퉁>을 통해 “다쉬너에게 그런 지침을 내린 적이 없었다”며 다쉬너의 주장을 부인했다).

개프갠을 직접 심문했던 강력계 형사 오트빈은 개프갠에게 ‘물리적 고통을 가할 것을 고려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했을 뿐이며 그것이 개프갠의 자백을 받아내는 데 직접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심문과정 내내 시급한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생각했으며 개프갠이 그러한 모습을 연상하게끔 유도했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개프갠의 주장은 다르다. <타게스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종신형을 선고 받은 상태에서 재판에 참석한 개프갠은 “2002년 10월 1일, 경찰은 나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전문가’가 있다고 위협했으며 밖에서 들리는 헬기 소리를 가리키며 그가 오고 있다고 위협했다”면서 두 경찰관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개프갠은 심지어 “경찰이 ‘유괴범의 말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너에게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고 주장했다.

의견1 “위급한 상황에서의 정당한 행위였다”

▲ 변호사 전문뉴스 홈페이지에 실린 사건 관련 기사. 사진속 인물이 납치범 개프갠이다.
납치범에 대한 고문위협으로 현직 경찰관이 법정에 서게 된 이번 사건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유사한 사건의 수사과정에 선례가 된다는 점에서 언론, 법조계를 비롯한 독일 각계의 관심과 논쟁을 가져왔다.

독일일간지 <디벨트> 11월 18일자에서 다수의 형법전문가들은 “두 경찰관이 행했던 ‘강압적 압력’이 대단히 복잡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두 경찰관의 행위는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타게스슈피겔> 또한 11월 19일자에 “독일의 사회체제이론 권위자로 알려진 사회학자 루만 또한 법치체제에서 어떤 경우에도 인권의 불가침성과 그에 따른 고문금지 원칙을 포기할 수 없지만 일부의 경우 이러한 금기원칙이 포기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기고 있다”는 글을 실었다. 예를 들어 테러리스트가 공공장소에 시한폭탄을 설치했을 경우, 그것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밝혀내기 위해 테러리스트에 대해 고문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폴커 엡 마인쯔대학 형법교수도 독일 시사주간지 <디 짜이트> 12월 9일자에 실은 기고문에서 “두 경찰의 행위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한 정당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엡 교수는 “형법 32조에 따르면 납치사건이 발생한 위급상황에서 희생자를 구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가해지는 행위는 정당한 행위로 볼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아이를 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다쉬너의 행위는 정당한 것이었다”며 “두 경찰관에 대해 무죄가 선고돼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어떤 행위도 금하고 있는 기본법 1조에 동의하지만 두 경찰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은 앞으로 발생할 유사한 상황에서 희생자를 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반경의 제한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희생자의 도움요청을 거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해자를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국민 다수가 두 경찰관에 대한 처벌에 반대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법과 도덕이 상충하는 상황에서 법은 도덕, 인도적 측면을 무시하는 방향으로 반응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타게스슈피겔> 11월 19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 관한 여론조사 응답자의 60% 이상이 ‘두 경찰이 처벌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졌다.

의견2 “어떤 경우에도 고문은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현지 언론을 비롯한 독일 각계는 대체로 '어떠한 경우에도 고문위협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에서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극단적 상황에서 인질을 구하기 위해 경찰이 납치범에게 총격을 가할 수도 있지만 고문이나 고문 위협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

일부 예외적인 경우에 고문을 허용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도 현지 언론은 “그러한 극단적 상황을 상정해 고문을 정당화하는 것 자체가 아주 위험한 시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독일 기센대학 범죄학연구소 소장 법의학자 아서 크로이처 교수는 <타게스 슈피겔>을 통해 “어떠한 예외적인 경우에 따라 ‘한번쯤’ 고문을 허가하는 방향으로 나갈 경우, 고문을 허용하는 틈이 형성되고 그 틈새가 점점 커져 자칫하면 ‘댐’이 붕괴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고문을 예외적으로라도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고문을 가능한 방법으로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국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크로이처 교수는 “이번 사건이 법과 생명을 구하는 것 사이의 양심적 갈등에 해당되는 사건이지만 국제법상으로 전쟁이나 테러 상황에서도 고문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다”며 “다쉬너의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법 위반 행위”라고 주장했다. 비록 개인적인 결정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민주국가에서 그것을 허용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로이처 교수는 “두 경찰의 행위가 희생자가 살아 있다는 생각 하에 양심에 준해 행해진 선택적 행동이었다는 것을 고려해 상징적 처벌만 내려져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법원의 선택 ... 벌금형과 ‘인권침해’ 규정

▲ 독일경찰 노조 홈페이지. 경찰 노조는 이번 판결에 대해 법과 현직 경찰의 실제상황을 고려한 정확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했다. 화면 하단의 인물은 독일 경찰노조 대표 콘라드 프라이베르그.
지난 12월 20일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은 기소된 두 경찰에 대해 각각 10800유로, 3600유로 벌금형 및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판결을 내린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 판사 베벨 스톡은 기본법의 정신을 언급하며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록 범죄자라 할지라도– 수단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두 경찰의 행위는 납치범 개프겐의 인권을 명백히 침해한 행위라고 규정했다.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은 그러나 두 형사의 행위가 어린 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감안해 가벼운 벌금형을 선고한다고 밝혔다. 고문위협은 통상 6개월에서 최고 5년의 징역형에 해당한다.

프랑크푸르트 지방법원 판결에 대해 독일 경찰노조 베를린 대표 볼프강 스펙은 “법이 허용하는 범죄자 심문방법의 범위를 명확히 보여준 동시에 심문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수상황을 적절히 고려한 적합한 판결이었다”고 밝혔다.

반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 독일지부는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짜이퉁> 12월 20일자를 통해 법원이 ‘고문금지’를 분명히 한 것에 대해서는 환영의 뜻을 밝혔으나 두 경찰의 행위를 명백한 ‘고문’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감의 뜻을 나타났다.

독일인권연구소는 “두 경찰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은 법치주의 질서의 근간으로서 고문금지를 무조건 금지한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부적절한 판결”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현지 언론은 대체로 이번 판결이 적합하게 내려졌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독일 시사주간지 <디 짜이트> 12월 22일자는 “이번 결정은 법치주의 질서를 분명히 하는 동시에 두 현직 경찰의 정상을 참작한 적합한 판결이다”라고 평가했다.

두 현직 경찰이 사건 발생 이후 광범위하게 이뤄진 열띤 논쟁의 당사자였다는 점과 납치 살해범과 함께 나란히 법정에 선 것 자체가 적지 않은 처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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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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