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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안법 연내 완전폐지를 주장하는 한총련 소속 대학생 2명이 28일 저녁 국회도서관 뒷편 공사장 타워크레인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어제 국회 앞 촛불 시위에 다녀왔습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변변히 굶지도 못했고, 변변히 투쟁 한번 제대로 벌이지 못한 탓에 밤샘 투쟁이라도 함께 해야 한다는 일말의 양심을 갖고 여의도로 향했습니다.

한총련 속보란에서 한총련 학생 두 명이 국회 앞 고공크레인 위에서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상황이 얼마나 위급하고 위험한지는 막상 여의도에 가서 알았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무엇인지 말해 주듯 강변 여의도의 바람은 말 그대로 칼바람이었습니다. 양말도 두 겹으로 챙기고 두툼한 잠바도 챙겨 입었지만 그 추위를 이겨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구요.

45m 높이에 있는 두 학생을 보며 느끼는 바가 참 많았습니다.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에 가깝고 금방 올려준 1.5리터 생수통은 그대로 꽁꽁 얼어버리고 만답니다. 오래도록 수배자의 몸이었고, 며칠간 단식으로 몸은 상할 대로 상해있고,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어찌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이라더군요.

밤 늦은 시간 집회를 마치고 서총련 남학생들만 모아서 크레인 가까이 가서 잠도 깨워주고 힘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어김없이 전경들은 길을 막아 나섰고, 상당히 먼 거리에서 희미하게 크레인의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거리까지 간 우리는 큰 소리로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습니다. 크레인에서 불빛이 보이더군요. 우리에게 대답 대신 불빛으로 인사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나더군요. 목이 메어 노래를 채 다 따라 부르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를 하면서 내 꼭 국가보안법을 내 손으로 끝장내리라 다짐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국가보안법 투쟁에 소홀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56년입니다. 국가보안법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벌써 56년이라고 합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고문으로 병신이 된 사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정신적 충격과 심리적 고통으로 여전히 상처를 품고 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빨갱이었고, 간첩이었고, 용공불순분자들었습니다.

조봉암 선생이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이 그랬고, 민주인사들이 그랬고, 진보지식인들이 그랬고, 거리로 나서는 청년 학생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모두 빨갱이고 불순분자들이었습니다. 통일이니 민주니 자주는 곧 빨갱이로 통했습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들이 있어 우리 사회는 민주화가 되었고, 주권국가로서의 면모를 서서히 갖추게 되었고, 통일이 머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광화문 거리에 인공기가 나부낀다고 조선일보는 떠들어댑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빨갱이들이 사회를 전복할 것이라고 한나라당은 떠들어 댑니다. 엄청난 상상력이자, 정신분열 환자와 같은 발상입니다. 하지만 이게 먹힌다는 것이 더 웃기는 겁니다.

이제 국가보안법의 생명은 몇 시간을 채 안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현대사의 가장 서글픈 역사의 오점을 이제 마감할 때가 되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제발 국가보안법이 사라지고 민주주의를 완성해 가는데 더 이상 피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여의도에는 20일, 30일 단식자들이 넘쳐 나고, 고공크레인 위의 두 학생은 자신의 목숨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부디 위의 명제가 통하지 않길 간절히 바랍니다.

환호와 기쁨으로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박물관으로 옮기길 바랍니다. 크레인 위의 두 학생에게 존경과 경의의 인사를 전하며 부디 몸 건강히 무사히 지상에서 뵙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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