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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대입 수능시험이 끝나면 논술 시즌입니다. 논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논리 전개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객관적, 합리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논술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합리적 발전적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는 아주 훌륭한 교재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많은 독자가 본다는 신문인데다 가장 우수한 반면 교사기 때문입니다. 논리적 사고를 위해서는 합당한 논거와 논증이 필수적입니다.

앞으로 틈나는대로 조선일보 사설 칼럼의 논거와 논증 과정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조공원론]을 꾸려나가 보겠습니다. 저의 잡문이 이성적인 사회로 나아가는데 아주 작은 거름이나마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먼저 첫 회 교재는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옛 구호가 떠오르는 세상"이란 제목의 <조선일보> 2004년 11월 11일자 사설입니다.

▲ 사설의 논지

1. 가톨릭계 원로 정의채 신부가 명동성당 강연에서 현 정부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2. 올해 79세의 정 신부는 명동성당 주임신부와 가톨릭대 총장을 지낸 대표적 지성인이자 성직자다.
3. 그런 분의 눈에 이 정권이 이렇게 비쳤다면 이제는 정말 나라가 어느 지경에 와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4. 정 신부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 다수의 생각을 짚어낸 말이고 정권을 위한 약(藥)이 되는 말이다.
5. 국민들도 이제는 4대 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지를 다 눈치챘다.
6. 정권 386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는 무지·무경험·무능의 정치권력 지향적 386세대의 한풀이의 장이나 이상의 실천장이 아니다"라는 정 신부의 충고에 귀를 열어야 한다.

사설인지 속기록인지…

사설은 글쓴이의 주장이나 의견을 드러내는 논설문(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글)의 대표적인 글이다. 주장을 논리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타당한 논거를 제시해야 한다.

이 사설은 정의채 신부의 강연 내용을 논거로 삼은 셈이다. 논거로 삼은 내용이 적절한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 전에 논거라는 게 정 신부의 발언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논거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논거는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인데 한 사람 말에만 오로지 매달려 주장을 펴는 것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게다가 구성 형식도 기본에 못 미친다. 이 사설은 분량 대부분 정 신부 발언에 할애하고 있다. 정 신부 발언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필자는 "그래, 나도 동감이야. 어쩜 내 생각과 똑같아!"하는 식으로 글을 구성하고 있다. 이쯤 되면 논설문이라기보다 속기록으로 글의 종류를 분류해야 할 판이다(이런 식으로 논술문을 쓰면 교수들에게 빵점받을 가능성이 높으니 특히 주의하시길).

논거로서의 가치

특정인이나 그의 발언을 논거로 삼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중요한 전제가 있다. 첫째, 그 사람이 논거의 소재로서 가치를 지닐 만큼 역사적이거나 객관성 합리성을 인정받은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이 사설은 정 신부가 79세 원로라는 점, 명동성당 주임신부와 가톨릭대 총장을 지냈다는 경력, 그 때문에 대표적 지성인이자 성직자라는 점을 들어 논거로서 활용하기에 무리가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정 신부가 사설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한다면 비슷한 경력에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진 인물의 발언도 조선일보 사설의 논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조선일보가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대표적 지성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일보의 주장과 일치하기 때문에 논거로서 활용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사설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대표적 지성인인 정의채 신부도 동의한다"는 수준에 머물러야 그나마 온전한 글이 된다.

하지만 "대표적 지성인 정 신부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동의한다"는 식의 구성을 하고 있기에 논거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신부를 대표적 지성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나 그의 말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 글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정 신부의 말에 거의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들도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한 글이 논설문이라면, 이 글은 논설문으로서의 생명력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정 신부의 발언은 객관적이고 타당한가?

둘째, 논거로 인용한 사람의 말이 객관성과 타당성을 인정받는지가 중요하다. 논거는 자신의 주장을 최대한 객관화,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기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인용한 정 신부 발언 내용의 객관성을 짚어보자(이 인용문은 조선일보 사설에 근거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정 신부의 발언을 왜곡 인용한 것이라면, 이 검증 절차도 잘못된 게 될 수 있다. 자라 보고 놀란 적이 많아서…).

(1) "민생이 최악인 상태에서 강행되는 4대 입법의 무리수는 지난날 독재정권과 다를 바 없고, 현재 이 사회는 이승만 독재 말기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가 나오던 시절을 연상케 한다"

객관성 검증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계보는 국민이 반대하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하고, 국민들은 곤봉과 최루탄으로 때려 잡았고, 언론은 지레 겁을 먹고 '찍'소리 못하고 찬양하기 바빴다. 반대 여론이 높다는 여론조사는 공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 날로 죽음이니까). 박정희는 3선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들을 중앙정보부로 끌고가 고문까지 자행했다.

노무현 정권과 여당은 4대 입법을 둘러싸고 언론을 통해 수없이 토론을 전개했다. 당내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히 나온다. 반대여론이 높다는 여론조사도 공표되고, 조중동은 반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이나 일반 국민이나 언론사나 독재정권 때처럼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과거 독재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다를 바 없다는 데 그 객관적 근거는 없다. 아주 주관적이고 편협한 주장으로 들린다. 이런 발언을 보면 '대표적 지성인'이 한 말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가 나오던 시절을 연상케 한다는 말도 객관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연상'이라는 말처럼 말 그대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연상 작용일 뿐이다. 민주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정 신부는 그렇게 연상할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갖고 있다. 그러나 주관적 연상작용을 사설의 논거로 삼는 것은 사설을 '우리의 주장'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2) "현 정권은 천하의 개혁은 다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요란한데, 빈 달구지의 소리가 더 요란하다는 속담이 있다. 최고 지성들 중에서는 그런 개혁을 '개혁으로 포장된 폭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객관성 검증 현 정권이 모든 개혁을 다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요란한가? 물론 그들이 개혁을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나라당도 늘 '개혁'이라는 말이 나오면 자신들도 개혁을 한다고 강조한다. 빈도는 적지만. 한나라당이 들으면 섭섭해할 말이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은 자신들이 진짜 개혁을 한다고 말한다. 집권여당이 개혁을 자주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천하의 개혁은 다 자기네가 하는 것처럼 요란하다"는 표현은 주관적 판단이 개입된 과장법으로 볼 수 있다.

"최고 지성들 중에서는 그런 개혁을 '개혁으로 포장된 폭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는 발언 역시 주관적이다.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그렇게 말할 자유도 있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정 신부가 '최고 지성들 중에는'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최고 지성(이 역시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중 일부의 의견이니 객관성을 온전히 확보했다고 볼 수 없다. 역시 사설의 논거로서는 부적격이다.

(3)"(4대 입법과 관련해) 여론 분열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안법 폐지에 집착해선 안 된다."

객관성 검증 역시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논리적 모순이 발견된다. 민주사회에서 100% 여론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5:5, 6:4가 대부분이다. 아주 드물게 7:3, 8:2의 여론이 형성되기는 한다. 이렇게 여론이 나뉘는 것이 여론분열이라면 북한이나 후세인의 이라크 같은 독재사회를 갈망한다는 말인가?

민주사회에서 살아가자면 나와는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여론분열로 간주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정 신부의 논리가 "다수 여론을 좇아서 국보법 폐지는 보류하고 여론지지도가 높은 다른 법들을 개정하자"는 것이라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4)"전교조의 구미에 맞게 사립학교법을 개정하면 종교계 사학재단의 무서운 저항에 부닥치게 될 것"(그러면서 '순교(殉敎)의 정신'을 거론했다고 이 사설은 기술)

객관성 검증 사립학교법 개정이 전교조의 구미에 맞게 하는 것인가? 그러면 현재의 법은 교장들의 구미에 맞는 법이라는 이야기인가? 법률을 만들거나 개정할 때는 찬반이 있기 마련이다. 특정 집단이 더 선호한다고 해서 그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라는 표현은 '대표적 지성인'다운 발언으로 보이지 않는다. "재단과 교장들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라고 표현했다면 더 객관성을 얻지 않았을까.

(5)(과거사 규명에 대해서도) "이 문제는 학문적 연구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옳은 길이다. 사회주의적 시각에서의 민족사관 정립은 후대에 다시 크나큰 시행착오적 오류였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될 것."

객관성 검증 과거사 진상규명을 '사회주의적 시각에서의 민족사관 정립'으로 동일시하는 데 동의하지 못할 사람도 많다. 먼저 '사회주의적 시각에서의 민족사관'이라는 개념에 대해 정의하고, 그 개념과 기준에 비추어 과거사 진상규명이 그에 합치함을 입증해야 정 신부 발언이 객관성을 갖게 된다. 거두절미하고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논리적 사고를 지향하는 지성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6)"조선·동아의 독자가 많은데 법을 만들어 신문 보는 사람을 보지 말라고 할 것인가?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 신문 부수를 조정하려는 것은 편협한 사회주의 혹은 독재의 수법이다."

객관성 검증 신문 시장점유율 규제에 대해 찬반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사회주의 혹은 독재의 수법으로 연결한 것은 지성인답지 못한 논리 비약이다. 과거 정권부터 우리는 특정 기업의 시장 독과점을 막고 있다. 011이 잘 터진다고 해서 마음껏 시장을 점유할 수 없도록 상한선을 두고 있다. 이는 미국 일본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유경쟁이라고 해서 독과점이 허용되면 더 큰 문제가 생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 신부의 주장대로라면 미국 일본 그리고 노무현 이전의 정권들도 사회주의 혹은 독재의 수법을 버젓이 써왔다는 게 된다. 논리적 타당성을 얻으려면 독과점 규제는 자본주의에서 절대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인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미국, 일본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면 웃음거리가 될 테니 독과점의 완전 허용을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일반 제조품에서는 독과점을 규제하되, 신문산업에서는 완전 자유경쟁을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해야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7)(정 신부는 이 정권이 이렇게 잘못된 길을 가게 된 원인을 '아직도 사회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는 수구 중의 수구인 정권 핵심의 386세대'에서 찾으면서)"인류 사조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수십 년 앞서가고 있다"

객관성 검증 상당히 복잡한 문제다. 정권 핵심의 386을 골라내고, 이들의 사상을 파악하고, 이를 사회주의 이념과 비교분석해 봐야 객관적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런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고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색깔공세'라고 볼 가능성이 많다.

대표적 지성인이라면 사회주의 이념이란 무엇이고, 정권 핵심의 386이 이와 일치하는 언행을 한 사례를 들어가며 그 연관성을 입증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조작을 일삼는 선동가와 별반 달라보이지 않는다.

(8)"국가는 무지·무경험·무능의 정치권력 지향적 386세대의 한풀이의 장이나 이상의 실천장이 아니다"

객관성 검증 정권 핵심의 386세대가 무지하다는 점을 입증하지 않은 채 발언한다면 지성인답지 못한 인신공격, 명예훼손이 된다. 무경험은 어떤 경험이 없다는 말일까? 대학교수 출신이 정권 핵심에 들어갔을 때 무경험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아마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기에 무경험이라고 말한 것일까? 그렇다면 40대 초반이 주류를 이루는 서구사회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까? 역시 객관성을 갖기는 힘든 주장으로 들린다.

'386세대의 한풀이의 장'이라는 표현은 섬뜩한 느낌마저 준다. 그들에게 어떤 한이 있을까? 독재정권에 탄압받은 한이 있을까? 그래서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것이라면 긍정적인 한풀이가 될 것이다. 그들의 한이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한풀이를 하고 있는지 제시하여 그에 대한 설득력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모두 생략된 채 '한풀이의 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시 지성인답지 못한 방식이다.

논거 없는 사설

이상에서 보았듯이 정 신부의 발언들은 민주국가에서 한 개인이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다수 공감을 얻기에는 객관성과 설득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정 신부의 발언은 논거로 사용하기에 별로 적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단순한 논거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의 발언에 의존해 글을 전개했으니 이 사설은 논리적 글이 아니라 일방적 주장을 늘어놓는 사적인 글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 사설이 '자신의 주장'으로 표현한 대목은 아주 적다. 논리라고 하여 타당성을 검증하기에도 부족하지만 이번에는 논리성을 짚어보자.

(1)"그런(대표적 지성인이자 성직자인) 분의 눈에 이 정권이 이렇게 비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무리 나라에 대한 걱정과 충고를 '한 줌 기득권 세력의 저항'으로 몰아붙이면서 굳이 외면해왔던 이 정권도 이제는 정말 나라가 어느 지경에 와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논리성 검증 이 사설의 논리를 들여다보자. "정 신부의 눈에 현 정권이 이렇게 비치고 있다 -> 정 신부는 한줌 기득권 세력이 아니다 -> 그러므로 정 신부의 발언을 다수 의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된다.

먼저 정 신부를 기득권 세력으로 볼 것인가 아닌가. 판단의 근거는 대학총장을 지냈다는 점, 성직자라는 점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대학총장까지 지냈으면 기득권 세력으로 보는 사람도 많을 것이지만, 아주 드물게 그렇게 보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반면 성직자기 때문에 기득권 세력이 아닐까? 원론적으로는 그러하지만 성직자 중에도 기득권에 안주하는 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정 신부가 '한 줌 기득권 세력'의 외부에 있다고 단언하기에는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

또 정 신부의 눈에 이렇게 비쳤으니 현 정부가 되돌아봐야 한다는 것도 논리적 비약이다. 정부는 대단한 지위의 국민이건 평범한 국민이건 모든 국민에게 귀를 열어두어야 한다. 다수 국민의 뜻이 이러저러 하니 스스로 되돌아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정 신부가 말했기에 귀기울이라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귀족사회도 아닌데 빈약한 논법으로 들린다.

(2)"(정신부의 말)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 다수의 생각을 짚어낸 말이고, 정권을 위한 약(藥)이 되는 말이다."

논리성 검증 앞에서 검토해 보았듯이 정 신부의 발언이 하나하나 국민 다수의 생각을 짚어낸 말이라는데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사설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저 자신의 주장과 비슷하기에 국민 다수의 의견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닐까?

(3)"여권은 4대 입법에 '개혁''정의' 등 온갖 좋은 말을 끌어와 치장하고 있지만, 국민들도 이제는 이 법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 하는지를 다 눈치챘다."

논리성 검증 "다 눈치챘다"는 식의 표현은 논설문에서 피해야할 주관적 서술. 현 정권이 이 나라를 끌고 가려는 방향이 무엇인지 지적하고, 이에 공감하는 비율이 얼마인지를 제시하는 방식이 되어야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글이 된다. 사설에서(비단 조선일보 뿐 아니다) 흔히 "국민들은…", "모두…"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주 본다. 객관적 수치로 입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매우 비논리적인 접근이다.

(4)"정권 386과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는 무지·무경험·무능의 정치권력 지향적 386세대의 한풀이의 장이나 이상의 실천장이 아니다'라는 정 신부의 충고에 귀를 열어야 한다."

논리성 검증 정부가 귀를 열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한다. (이 사설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감하는 대목). 정부는 항상 국민의 소리에 귀를 열어야 한다. 하지만 정 신부의 충고에 귀를 열라고 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 하필 정 신부에게만 귀를 열어야 하나?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국민의 인정이 있든지, 그의 발언내용을 논리적으로 객관성을 입증했다면 혹시 모르겠다. 그게 아닌한 한 인물의 발언에 귀 기울이라고 사설을 쓴다면 넌센스다. 조선일보 사설이 정 신부 대변자임을 입증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논술 준비생들을 위한 팁

논술문이나 사설이나 자신의 주장 또는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글(논설문)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논설문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논지)이 분명하게 있어야 하고, 그 논지의 객관성과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논거를 제시한다.

논거는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료임을 명심하자. 이 사설에서처럼 논지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내 의견도 그래" 식으로 서술했다가는 점수를 기대하기 힘들다.

사설을 교과서로 삼아 논술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설은 좋은 교재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답습해서는 안된다. 옥석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이 사설을 그대로 흉내냈다가는 대학 가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이 사설처럼만 쓰지 않는다면 최소한 기본점수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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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1997 : 한국일보 사회부/편집부 기자, 런던특파원, 뉴미디어 총괄팀장 소비자주주협동조합 http://cresume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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