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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우 여주군청 건설과장이 이 집에서 살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당시에 살던 본채
ⓒ 이장호
명성황후가 태어나 8세까지 살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2번지의 명성황후 생가는 조선시대 숙종 13년인 1687년 왕의 장인인 민유중 선생의 묘막(墓幕)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중기 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유서 깊은 명성황후 생가에서 살아보면 어떨까 하는 궁금증을 안은 채,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이충우(여주군 건설과장)씨를 만나보았다.

▲ 명성황후 생가의 전경 오른쪽의 비각은 '명성황후탄강구리비'고 뒤로 보이는 작은 산에 민유중 선생의 묘가 있다
ⓒ 이장호
명성황후 생가에서의 생활을 묻자 이충우 과장은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은데 겨울에 무지하게 추웠다”는 말로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했다.

이충우 과장이 명성황후 생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여주군청 문화관광과에 근무하던 지난 1985년. 신혼이던 이충우 과장은 여주읍내에 전셋집을 찾고 있었고 여주군은 여흥민씨 문중으로부터 이 집을 매입한 후 관리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충우 과장은 “당시 군에서는 관리인을 따로 두기 어려운 형편이었고 누군가가 관리는 해야 되는 상황이어서 전세보증금도 안 들어가니 우리가 들어가 살자고 아내를 설득했다”고.

막상 살다보니 겨울엔 방안에 떠 놓은 물도 얼을 정도로 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겨울나기가 힘들어서 처음에 부인에게 원망도 많이 들었다고.

이 집에 사는 동안 일본 대사가 바뀌면 찾아오고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일본의 잘못을 알고 있는 뜻있는 일본지식인과 학생들 그리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와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며 “아내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명성황후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교수 등 연구하는 분들과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관련한 책도 사서 읽게 돼 결국 아내가 명성황후에 대해선 박사가 되었다”며 껄껄 웃는 이충우 과장의 모습에서 명성황후생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묻어난다.

명성황후 생가에 살다보니 경기도 관계자들을 비롯해 명성황후 생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명성황후에 대한 해설은 자연스럽게 부인 강정옥(45세)씨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 명성황후의 일대기와 당시의 시대상황 등을 전시해 놓은 기념관
ⓒ 이장호
“이충우 과장은 “외부에서 여주군에 명성황후 생가의 안내를 부탁하면 아내가 명성황후의 일대기와 집의 내력 등의 설명을 도맡았다”며 “아내가 비공식 여주군 문화유산해설사 1호”라고 자랑한다.

이충우 과장 가족은 본격적인 복원이 이뤄지기 전인 지난 1991년까지 6년을 명성황후 생가에서 살았으며, 이 집에서 큰 딸 상희(연세대학교 재학 중)와 작은 딸 상빈(대원여고 3학년)을 낳았다.

명성황후 생가 터의 영험함 때문인지 몰라도 큰딸 상희씨는 당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특목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고, 작은 딸 상빈양도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야무지다고 집안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아이들도 지금은 명성황후 생가에서 살았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친구나 주위사람들에게 명성황후 바로 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고 말하는 이충우 과장은 명성황후 생가를 비롯한 여주의 문화유적과 역사에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명성황후 생가는 지난 1973년 7월10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되어 당시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안채 27평으로 1976년에 안채가 중수되었으며, 1996년에는 행랑채와 사랑채·초당 등이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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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주에서 지역신문 일을 하는 시골기자 입니다. 지역의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해 탐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이런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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