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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등학교 3학년 선생님들은 수시 원서 접수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쁩니다. 수시는 말 그대로 수시로 대학 신입생을 뽑는 제도입니다.

현재 고3 수험생에게 대학교에 지원할 기회는 차수로 3차례 주어집니다. 1학기에는 1학기 수시, 2학기에는 2학기 수시 그리고 수능 시험을 쳐서 지원하는 정시 모집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수시는 내신 성적으로, 정시는 수능 성적으로 가는 제도입니다.

그래서 고3 입시지도를 할 때 내신 성적에 비해 모의고사 성적이 별로인 학생은 수시 전형으로, 모의고사 성적이 좋은 학생은 정시 모집에 지원할 것을 권유하게 됩니다. 학생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많아져서 좋을지 모르겠지만, 수시 제도 덕분에 고3 선생님들은 1년 12달 입시를 치르는 기분입니다.

2학기 수시 시즌을 맞아 입시 상담을 하다보니 별 웃지못할 일도 많이 겪게 됩니다. 기필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야겠다고 떼를 쓰는 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낮을 만한 대학을 찾아달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수시에서는 커트라인의 개념이 없지만 입시와 커트라인은 제도의 차이를 떠나 뗄 수 없는 연상작용을 하게 만듭니다. 서울 안 대학을 그렇게 생각하던 학생이 어느 날 나에게 묻는 것입니다.

"선생님 낙성대학교는 높아요?"

서울대학교 옆에 있으니 서울대학생 남자 친구라도 잡을 수 있겠다고 말하는 여학생 앞에서 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한참동안 얼굴을 쳐다봐야 했습니다. 참 우습게도 2호선 낙성대 역을 한양대 역과 똑같은 대학명이 붙은 지하철역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필코 2호선을 탈 것이다."

학생들이 학기 초에 써 놓는 것 중에 인기 있는 다짐 문구의 하나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2호선에는 대학교 이름이 붙은 역이 많습니다. 서울대 입구, 홍대 입구, 이대 입구, 건대 입구, 한양대 역이 있습니다. 여기에 신촌역에서 내려 걸어 다닐 수 있는 연세대와 서강대까지 포함하면 2호선은 대학을 위한 지하철 노선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듯 보입니다.

이맘 때 바빠지는 것은 고등학교만이 아닙니다. 덩달아 바빠지는 대학교들이 있습니다. 고 3교무실에는 여러 대학교 교수님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주요 대학들은 아니고 지방에서 학생들 유치하기 힘든 대학들의 교수님들이 찾아옵니다.

들고 오는 선물도 가지가지입니다. 탁상용 시계, 수건, 치약, 마우스 패드 등 갖가지 선물이 들어옵니다. 고3 담임을 몇 년씩 하신 분들은 안면이 익숙한 교수님이나 교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관광지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서는 학교 기숙사를 저렴하게 빌려 줄 수 있다며 휴가철에 놀러 오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이런 청탁 아닌 청탁을 받는 교사 처지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학생들은 성적이 낮아도 서울 근처에 있는 전문대를 가면 갔지 지방으로 가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이러셔도 별 소용이 없다고 오시는 교수님께 말씀을 드려도 대학교에 돌아가 보고를 해야 한다면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아가기도 합니다.

물론 서울 안의 대학도 지방 대학만큼은 아니지만 홍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 입시설명회를 가면 고3담임에 대한 대접이 융숭합니다. 재단이 운영하는 1급호텔이 있는 대학은 선생님들에게 호텔 뷔페를 대접하기도 합니다.

제가 고3이던 1988년만 해도 성적이 너무 안 좋아서 배치표에서 가장 낮은 대학보다도 모의고사 성적이 낮아 고민했던 기억이 있는데, 요즘은 좋아졌다고 해야 할지 나빠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어이없는 학생이 지방의 4년제 대학에 합격하는 일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담임교사가 아니었는데, 어느 학생 하나가 고3담임과 수시원서를 쓰는 모습을 보고 시쳇말로 돌아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원서 양식에 영문 이름을 쓰는 곳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담임선생님이 학생에게 '너 솔직히 이야기하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저러시나? "너 영어로 이름 쓸 줄 아냐 모르냐?" 저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학생의 대답이었습니다. "첫 글자는 아는데 뒤에 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그 학생은 한 달 뒤엔가 합격 소식을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영어로 쓸 줄 모르는 학생이 지방의 한 4년제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것이었습니다. 지방의 어느 대학의 공과대학교수가 이런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학생들에게 인수분해를 가르치려고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온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설프게 학생들 학력 저하나 대학의 구조조정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방의 대학은 일부 국립대를 제외하고는 생존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학의 커트라인은 포항공대와 지방 대도시 국립대를 제외하고는 서울과의 거리에 비례해서 결정됩니다. 이러한 기준표에 의해 학생들 입시 상담을 할 때면 제가 선생님이 되면서 꿈꾸었던 교육은 저 멀리 사라져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를 잘 하는 학생도 있고 못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공부에 취미가 없는 학생에게 왜 공부를 강요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부를 하기 싫으면 너에게 맞는 적성을 찾아가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학부모도 학생 자신도 대학은 꼭 갈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수분해를 못하는 학생이 공과대학에 입학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텐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 2008학년도 대입시 개선안이 발표됐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교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편안에 대하여 너무 시큰둥합니다. 왜냐하면 또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교육을 보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교육은 현재의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죽어라 하고 싫어하는 학생들이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하는 것은 학벌 카스트 제도를 누구보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과 학생들이 이공계 대학보다 의대를 선호하는 것도 간단한 이치입니다. 이공계 졸업하는 것보다 의대 나오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기 좋기 때문입니다. 교육에 대하여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모두들 교육이 이 모양이 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란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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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사회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고등어 사전(메디치미디어)>, <나의 권리를 말한다(뜨인돌)>, <세상을 보는 경제(인포더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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