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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변대학 구내에 있는 '항일 무명 영웅 기념비'
ⓒ 박도

▲ 연변렬사기념관
ⓒ 박도

9일째 2004년 6월 2일 수요일 맑음

연변렬사기념관


애초에 계획 일정보다 답사 코스를 하루 먼저 마친 셈이다. 그것은 통화에서 연길로 곧장 이동하였기에 오는 도중에 청산리 전적지를 둘러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에 비행기 예약을 마친 상태라서 조기 출국이 번거로워 예정대로 귀국하기로 해 연길 일정에 다소 여유가 생겼다.

▲ 혁명렬사기념탑
ⓒ 박도
09:00, 출국 후 처음으로 아침시간을 여유롭게 보내고 느지막이 박물관으로, 연변렬사기념관으로 갔다. 그 새 시내에 있던 민속박물관을 연길공항 근처로 옮겼는데 건물은 번듯하고 공간은 넓었지만, 5년 전보다 볼거리는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었다.

거기서 연변렬사기념관으로 갔다. 기념관 광장에는 혁명렬사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는데 '혁명렬사 영생하리(革命烈士永垂不朽)'라는 장쩌민 주석의 친필을 새겼다.

기념관 안은 혁명 열사들의 생애와 그분들의 투쟁 모습을 새긴 동상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중국 대륙을 누비면 군데군데 무슨 무슨 기념탑이나 혁명열사 동상 석상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나라에서는 가장 높이 받드는 곳이 열사기념관이나 혁명기념탑으로, 도시에서 가장 경관이 좋은 곳에다 세우고 언저리 조경을 잘해 두었다. 아마 국민정신 교육을 위해 이런 사업을 최우선으로 했나 보다.

▲ 연변렬사기념관 내부 전시물
ⓒ 박도

▲ 기관총을 든 허성숙 렬사
ⓒ 박도

▲ 왕덕태 렬사
ⓒ 박도

13:00, 연변의대 학장을 역임한 강남구 선생이 오셔서 항일역사를 들려주고, 필자에게는 <연변관광자원과 이용>이라는 책자를 주고 가셨다. 곧 이어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 김춘선 소장이 오셔서 항일 역사에 대하여 대담을 나눴다.

▲ 강남구 전 연변의대학장
ⓒ 박도
▲ 김춘선 연변대 민족역사연구소장
ⓒ 박도

16:00, 연변대학을 둘러보면서 뒷산에 마련된 항일무명 영웅 기념비를 참배했다. 이 기념비야말로 진짜 애국자를 추모하는 거룩한 비이리라.

일제하 우리 독립군들은 대부분 배고파 굶어서 죽고, 추위에 얼어서 죽고, 일제의 총에 맞고 칼에 베여 죽었다. 이 이름 모르는 충혼을 기리는 기념비에 우리 일행은 오래 고개 숙였다.

▲ 연변대학
ⓒ 박도

이 비극은 언제 끝나려나

19:00, 김시준 선생이 저녁을 사겠다면서 안내한 곳이 연길시 신흥가에 있는 류경반점이었다. 이곳은 북한에서 직영하는 곳으로, 난생 처음으로 북한 일품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더덕구이, 된장찌개, 명태조림 등을 시켰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김치는 내 평생 가장 맛있게 먹은 김치로, 입안에서 슬슬 녹았다.

접대원들이 반찬 나르기를 끝내고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반갑습니다' '찔레꽃' '휘파람' '다시 만나요'…. 노래가 한 곡 끝나면 손님들이 계산대에서 꽃다발을 사서 그들에게 안겼다. 이 선생도 김 선생도 필자도 꽃다발을 접대원에게 안겨줬다.

▲ 류경반점의 접대원들
ⓒ 박도
"남과 북의 동포는 만나서 노래 한 곡 같이 부르면 금세 겨레의 동질성이 회복됩니다"라고, 먼저 경험한 워싱턴에서 만난 심재호 선생(심훈 아드님)의 말씀이 실감났다.

우리가 떠날 때 문간까지 따라온 접대원들의 "선생님들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요"라는 작별 인사말에 울컥했다.

내 딸 같은 그들을 대하면서도 주뼛주뼛해지는 것은 우리들 마음 속에도 분단의 선이 그어져 있기 때문일 거다. 갈 때와는 달리 아픈 마음으로 연변대빈관으로 돌아왔다.

이국 땅에서 뜻밖에 북녘 동포를 만나고 헤어지니 마음이 오래도록 애잔했다. 제3국에서 제 동포를 만나는 것도 실정법에는 위반일 거다. 한 세기 전에 나라를 빼앗긴 비극이 아직도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다. 아! 이 비극은 언제 끝나려나.

어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이 비극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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