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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실 폭발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강지훈 연구원이 목맺힌 소리로 발언을 하고 있다. 
 
지난 13일 오후 3시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노천극장에서 열린 '고 조정훈 연구원 1주기 추모식'과 '추모시비' 제막식 직후 있었던 일이다.

추모시비 제막식 후 여러 방송사의 카메라들은 고 조정훈 연구원의 아버지 조동길 공주대 교수를 추모시비 앞에 세워놓고 녹화 촬영을 하기에 바빴다. 조 교수는 번갈아 작동하는 카메라 앞에서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 촬영을 끝으로 방송사들의 카메라들은 일시에 모두 사라졌다. 추모식에 참석했던 유족, 친지들, '카이스트'의 교수와 교직원들은 모두 자리를 떴다. 금세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보도진은 한 명도 없었다.

추모시비가 세워진 둔덕과 풍동실험실 사이에는 아스팔트 공간이 있었다. 노천극장에서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둔덕 바로 아래 공간에는 별도의 추모제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천막이 쳐지고 여러 개의 의자가 놓여지고, 풍동실험실 바로 앞에는 여러 가지 악기와 앰프가 설치되고...

그리고 추모시비 제막식이 진행되는 시각에 수십 명의 학생들이 천막 앞에 모여 섰다. 그들은 별도로 마련한 현수막을 펼쳐 들었다. '풍동실험실 폭발사고 1주기 추모제'라는 글자들이 쓰여진 현수막이었다.

바로 턱 앞에서 그 광경을 보면서도 거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학생들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예정된 녹화만을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뜨는 방송사 직원들을 보자니 삭막해지는 느낌이었다.
 
▲ "안전없이 연구 없다! 실험실 안전을 보장하라!" "피해학우에겐 책임 있는 보상을, 학생에게 안전한 실험실을!" 등의 피켓을 목에 걸고 카이스트 본부를 행하여 시위 행진을 하는 대학원생들 

일반 매체의 보도진은 물론이고 카이스트의 교수와 교직원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카이스트 대학원총학생회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가 별도로 마련한 '풍동실험실 폭발사고 1주기 추모제' 행사는 시작되었다.

먼저 실험실 폭발사고 희생자를 위한 묵념을 했다. 그리고 사회자가 내빈 소개를 했는데 외부 참석자는 부상당한 강지훈 학생의 어머니 소안순(60)씨, 전국과학기술노조 부위원장 최영석씨,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윤선희씨, 이렇게 3명이었다.

이어서 한 학생이 카이스트 대학원총학생회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의 활동사항을 보고했다.

2003년 5월 13일의 풍동실험실 폭발사고를 계기로 대학원총학생회(이하 원총) 산하에 학생안전대책위원회(후에 안전쟁취특별위원회로 이름을 바꿈)가 결성된 이후 그들은 참으로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일들은 어찌 보면 눈물겨운 '자구책'이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는 바쁜 생활 속에서 그들이 스스로 시간과 노고와 비용을 바쳐가며 한 일들이었다. 왜 그런 일들을 학생들이 스스로 해야 하는지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거기에 우리 이공계 대학의 현실이,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맹점 같은 것이 집약되어 있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어서 지난해 실험실 폭발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강지훈(28) 연구원이 휠체어를 타고 마이크 앞으로 나와서 발언을 했다. 그는 컴퓨터로 써서 프린트해 온 것을 또박또박, 더러는 울먹이기도 하며 읽었다.

'KAIST 대학원총학생회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풍동실험실 사고 1주기 추모제 참가자 일동' 명의의 '요구사항'들을 눈여겨보면서 우리나라 이공계 대학,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후진적 상황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사항들이 하나도 마련되지 않고 있었다니, 한마디로 놀라운 일이었다.
 
▲ 카이스트 찬양동아리 "프레이저"의 "추모공연" 장면 

행사는 카이스트 개신교 신자 학생들로 이루어진 찬양동아리 '프레이저'의 '추모 공연'으로 이어졌다. 한바탕 노래 마당이 펼쳐진 다음 학생들은 여러 개의 피켓을 목에 걸고 행진을 시작했다. 카이스트 본부로 가서 학교측에 대학원생들의 '요구안'을 전달하는 것으로 행사를 마치게 된다고 했다.

찬양동아리 프레이저의 추모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기자는 대학원총학회장 김동근씨에게 물었다. 왜 일반 매체 보도진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느냐, 왜 방송사의 카메라를 하나도 붙잡지를 않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일반 매체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겠어요? 또 방송사 카메라들은 저녁 뉴스에 추모식 기사를 내보내려면 마감 시간 안에 서둘러 들어가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을 테고…."

기자는 휠체어에 앉아 쓸쓸한 모습으로 프레이저의 추모 공연을 보고 있는 강지훈씨에게 가서 말을 걸었다. 그는 양손에 손가락 끝이 나오는 장갑을 끼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는 발목이 절단되었고, 왼쪽 다리는 무릎 위가 절단되었다고 했다.

전북 익산 출신인 그는 전북과학고 입학 이후부터 12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를 해왔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해서 과학자의 꿈을 키워왔는데 이제는 후회가 생긴다고.

"제가 이런 불구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과학 전공을 후회한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이공계의 연구 환경이 너무도 열악한 것에서, 어쩌면 우리는 소모품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서지요."

박사 과정을 거의 마치고 논문만을 남겨둔 시점에서 부상을 당한 그의 앞길은 어둡기만 하다. 학교에서는 그를 골칫거리로 여기고 학교로 돌아오는 것조차 바라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 시위 행진에 앞서 현수막에 적힌 구호를 외치고 
 
병원을 세 번 옮겼다고 했다. 충남대 병원과 서울대 분당 병원을 거쳐 현재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병원마다 특징이 있어서 단계별 치료에 따라 의료진의 소개에 의해서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지금도 약간의 통증은 늘 있지만, 날이 궂기라도 하면 심한 통증을 겪는다고 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요즘에는 의족을 단 상태에서 보행 연습을 한다고 했다.

강지훈씨는 2남 1녀 중의 막내인데, 일년 동안 그의 병상을 지켜주고 있는 이는 어머니 소안순씨다. 아버지 강민부(61)씨는 행정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후 향리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아내가 노상 막내아들의 병상을 지키고 있는 관계로 직장 생활을 하는 아직 미혼인 큰아들과 함께 모든 살림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부자가 살림하며 살고 있는 집 생각을 하면 걱정이 크지만, 병상에서 통증 때문에 신음하고 있는 막내를 보면 한시도 병상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어머니 소안순씨는 일년 새에 자신이 바짝 늙었다는 말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비록 두 다리를 잃었지만 의족을 달고 걸을 수라도 있게 되면 계속 공부해서 과학자의 꿈을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도 하며….

"엘리트 집단이라고 하는 카이스트에서도 실험실 부상자에 대한 처리가 이렇게 비인간적인데 일반 산업재해 현장의 상황은 어떠하겠습니까? 저는 제 문제가 저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문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잘 처리되고, 우리 나라 이공계 대학들의 연구 환경이 개선되고, 제가 계속 과학도의 꿈을 키워갈 수 있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강지훈씨는 기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는 두 손으로 휠체어 바퀴를 굴려 시위 행진을 시작한 동료 대학원생들 속으로 합류했다.

태그:#조정훈, #카이스트, #강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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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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