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사가다와 본똑을 오가는 지프니
ⓒ 최진호
본똑에서 사가다로

나와 진솔이를 태운 지프니(지프를 개조한 일종의 승합차)가 치코 강변을 따라 달렸다. 비 맛을 본지 오래된 땅이라 흙먼지가 일어나, 가림막 없는 출입문과 창문으로 밀려들어온다. 내 앞에 앉은 청년을 따라 나도 스카프를 삼각형으로 접어 눈 밑으로 두르고 목 뒤에서 묶어 입과 코를 가렸다. 우리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 지역사람들은 그다지 우습지 않은 일에도 즐거워하며 웃음을 터뜨린다.

▲ 사가다 전경
ⓒ 최진호
강변을 벗어나서 지그재그로 힘겹게 산길을 올라간 차는, 본똑을 떠난 지 한 시간 뒤, 첩첩산중 울울창창한 아름드리 소나무 숲 속에 들어앉은 해발 1500m의 아담한 도시 사가다에서 멈춰 섰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물어 세인트 조셉 레스트 하우스(St. Joseph Rest House)를 찾았다. 도로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빨갛고 노란 꽃들로 수놓아진 꽃밭이 우리를 반긴다. 그 옆으로 난 길 따라 통나무 집 몇 채와 카페가 있고 조금 더 올라가니 빨간 꽃송이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부겐빌리아와 빨간 꽃줄기들이 축축 늘어진 키 큰 나무 뒤에 예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2층 목조 건물이 서 있다.

▲ 우리가 묵었던 세인트 조셉 레스트 하우스
ⓒ 최진호
우리는 그 건물 2층에 있는 더블룸에 자리를 잡았다. 방에 딸린 베란다에서 밖을 보니, 하얀 구름에 덮인 산 봉오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었다. 가지가지 꽃들과 소나무, 야자나무들이 아담한 건물들과 어울려 한 폭의 서양화 같은 사가다의 아름다운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온다.

무거운 배낭과 가방을 방에 둔 채, 카메라 가방만 달랑 메고 어슬렁어슬렁 시내 구경에 나섰다. 토요일 오전에 장이 선다는 작은 광장 주위에 뮤니시펄 홀, 보건소, 게스트하우스, 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이곳이 사가다의 중심가이다.

먼저 뮤니시펄 홀(Municipal Hall)로 갔다. 시청, 우체국, 법정, 관광 안내소, 은행, 경찰서가 들어 있는 일종의 종합청사이다. 하지만 각 기관들이 서너 평 정도의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는 작은 2층 콘크리트 건물일 뿐이다.

1층에 있는 관광 안내소에 가서 관광안내지도를 샀다. 자신을 사가다 환경가이드협회(SEGA, Sagada Environment Guide Association)에 속한 가이드라고 소개하는 잘생긴 24살 청년 에디를 만났다. 그에게 이 도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 숙소에서 바라본 뮤니시펄 홀
ⓒ 최진호
사가다는 마운틴 주에 속해 있는 인구 약 8000명의 작은 도시이다. 주민들은 본똑과 마찬가지로 이고롯족인데, 주로 배추, 당근, 감자를 재배하고 돼지와 닭 등 가축을 길러 수입을 얻는다. 벼는 자급자족할 정도만 짓는다. 지금은 관광에서 얻는 수입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사가다는 오지에 들어앉은 한 마을 정도 규모의 작은 도시이긴 하지만 어엿한 국제도시이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은 여행 비수기였지만 15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싸고 깨끗한 숙소, 저렴하고 맛있는 무공해 음식, 걸어서 갈 수 있는 동굴과 폭포와 산, 순박하고 따뜻한 인심을 찾아 여러 나라에서 사람들이 찾아 들어 오랫동안 머무른다고 한다.

이곳은 큰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편의 시설도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까닭에 물질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여행자'들의 천국으로 남아 있다. 소음과 오염, 소비와 경쟁 속에서 지치고 병든 영혼들이 소나무 향내와 솔바람 소리, 새소리에 안식을 얻고, 주민들의 따뜻한 인간미에 위로 받을 수 있는 여행자들의 천국 말이다.

▲ 세인트 메어리 성당
ⓒ 최진호
광장에서 본똑 쪽으로 3∼4분 걸어가니 세인트 메어리 성당이 나온다. 사가다에서는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이다. 로마 카톨릭교가 국교이다시피 한 필리핀에서는 드물게도 영국 국교인 성공회에 속한 교회이다.

성당 옆의 농구 코트에서 만난 중년의 미수아리씨와 이야기를 나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교회는 사가다에 사랑의 공동체를 구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고 한다. 교육, 환경, 의료, 소비자운동 등 여러 방면의 활동으로 주민들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미수아리씨는 말했다.

▲ 세인트 조셉 병원
ⓒ 최진호
성당 주변의 여러 사업장들에서 이 교회가 주민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성당 옆에 서 있는 세인트 조셉 병원과 소비자 조합, 성당 뒤 쪽의 세인트 메어리 고등학교, 그리고 우리가 묵고 있는 세인트 조셉 레스트 하우스 등을 교회가 세워 운영하고 있으며 신문도 발행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내 한 쪽에서 다른 쪽 끝까지 걷는데 30분이나 걸릴까? 돌아다니는데 차도 필요 없고 또 실제로 시내를 운행하는 교통수단도 없다. 이따금 시외를 오가는 차들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한적한 시내는 조용하고 하늘은 높고 공기는 투명하며 보이는 것들은 맑고 뚜렷하다. 사람들의 표정에선 여유가 묻어나고 마을에는 평화와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다.

샴록 카페에서 바나나 팬 케이크과 스파게티에 맥주 한 병을 곁들여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즐긴 뒤, 어둠 속에서 간간이 비추는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 숙소로 올라온다. 진솔이는 일기를 쓰고 나는 오늘 일정을 정리한다.

밤의 고즈넉함에 잘 어울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고요함을 타고 울려온다. 밤 9시를 알려주는 성당의 종소리이다. 이 시간 이후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통행을 자제하여 '이웃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자'고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맺은 평화와 안식의 종소리이다.

▲ 토요일 오전 장 풍경
ⓒ 최진호
토요일이다. 오전에 장이 서는 날이다. 뮤니시펄 홀 앞 작은 광장에서 열린다. 그래서 그 곳 이름도 '토요일 오전 장터'이다. 아침 산책을 나가니 새벽부터 상인들이 광장에서부터 성당에 이르는 도로 가에 자리를 잡고 좌판을 벌이느라 부산하다.

아침을 먹은 뒤, 진솔이와 나는 느긋한 걸음으로 시장을 구경한다. 과일, 야채, 곡식 등 농산물과, 옷, 신발부터 장난감, 가전제품까지 없는 게 없다. 구멍가게를 빼고 이렇다 할 상점이 없는 사가다 주민들은 이 장터에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구입한다.

▲ 장보는 서양인 여행자
ⓒ 최진호
햇빛을 가린 울긋불긋한 차양과 파라솔 아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낙네, 엄마 장사를 도우러 나온 어린이들, 카메라를 들이대자 웃음을 터뜨리면서 이빨 없는 쪼글쪼글한 입을 가리며 손사래 치는 호호할머니, 집에서 잡은 돼지를 통째로 놓고 뭉텅뭉텅 썰어 파는 청년들,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골고루 사는 장기 체류자인 듯싶은 중년의 서양 남자….

▲ 장에서 콩을 파는 할머니들
ⓒ 최진호
우리는 삶은 옥수수를 뜯어먹으면서 장터 구경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리처럼 물건을 팔려고 소리치는 사람도, 붙잡는 사람도 없다. 이들은 물건을 팔기보다 곁에 앉은 장돌뱅이 동료들과 웃음 터뜨리며 한가로이 이야기 하는 것에 더 많은 흥미를 느끼는 듯하다.

길게 늘어져 있었던 내 그림자는 어느덧 내 발 밑으로 돌아왔다. 벌써 한 낮이 된 것이다. 장이 파하고 있다. 장 구경하면서 주전부리한 삶은 옥수수, 룸피아(잡채를 넣어 튀긴 만두), 바나나로 점심을 대신한 우리는 성당 주위 소나무 숲 속에서 어슬렁거린다. 농구 코트에서는 어른과 아이들이 어울려 공을 따라 신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 옆 잔디밭에선 앙증맞게 생긴 여자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 사가다에서 만난 들꽃
ⓒ 최진호
자기네 부족 말인 깐까나이어로 재잘대며 뛰어 다니던 한 아이가 우리를 보더니 유창한 영어로 "Why are you smiling?"한다. 밝고 명랑하게 뛰어 노는 천사 같은 아이들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나 보다. 나도 "You are smiling, too"라고 했더니, 아이들 모두 깔깔대며 웃어댄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하늘로 울려 펴진다. 내 마음도 종달새처럼 하늘로 날아오른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거의 날마다 오마이에 들어오는 중독자이지요. 특별히 자신있는 글쓰기 분야는 없고 글재주도 없지만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여행기를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