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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佛)은 가장 낮은 곳, 곧 골에 있다는 뜻의 불곡사
ⓒ 이종찬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비음산 곳곳에 아카시아 꽃이 마악 피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카시아 꽃이 연갈색을 띠면서 지고 있다. 미처 그 향그런 내음를 맡을 틈도 없이. 문득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라는 최영미의 '선운사에서' 란 시 첫 구절이 떠오른다.

그래, 올봄에는 너무 일찍 찾아온 무더위 때문에 긴 겨울을 이겨낸 아름다운 봄꽃들이 정말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아주 잠깐" 눈 깜빡할 사이에 지고 마는 것만 같다. 혹여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올봄이 너무 짧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릴 적 어머니께서는 우리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지금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하루가 1년처럼 길게 느껴지겠지만 나이가 들면 1년이 하루처럼 빨리 흘러간다고. 그런가 보다. 이제 내 나이 사십대 중반을 훌쩍 넘기고 보니 그때 어머니의 말씀처럼 세월이 어찌나 빨리 흘러가는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 가운데 일렬로 네 기둥을 세운 독특한 모양의 불곡사 일주문
ⓒ 이종찬
통일신라시대의 고찰 불곡사로 향한다. 창원시 대방동 1036번지 비음산 새끼산 자락에 둥지를 틀고 있는 불곡사는 어머니께서 살아생전에 자주 다니시던 자그마한 가람이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불곡사에 다녀오실 때마다 맛있는 떡과 과일을 들고 오셔서 우리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때 우리 형제들은 불곡사에 도깨비 방망이라도 있는 줄로만 알았다.

우리들은 불곡사로 봄소풍을 갔을 때에도 불곡사가 아니라 불국사로 알았다. 그런 까닭에 수업시간에 경주에 있는 불국사에 대해 공부할 때 적잖이 헷갈리기도 했다.

그래, 그때 나의 어머니께서는 이곳 불곡사에 와서 무엇을 빌었을까. 외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신건강을 빌었을까. 아니면 슬하의 사남일녀가 모두 공부를 아주 잘하기를 빌었을까. 그리하여 사남일녀 모두가 출세를 해서 보릿고개가 와도 끄떡없이 끼니 때마다 하얀 쌀밥을 먹고 살기를 바랐을까.

▲ 불곡사 정문에는 불사가 한창이다
ⓒ 이종찬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터덜터덜 걸어 불곡사 일주문 앞에 다다르자 공사 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밧줄 하나가 처져 있다. 한때 금붕어가 연꽃 뿌리를 간지럽히던 작은 연못 자리에도 검붉은 흙더미가 제멋대로 쌓여져 있다. 그 위에는 '명부전 지장보살전 조성 중'이라는 현수막이 옛 추억을 순식간에 깡그리 지워버린다.

그래서였을까. 네 개의 붉은 기둥이 맞배지붕의 한가운데 일렬로 서있는 불곡사 일주문도 왠지 위태롭게 느껴진다.

나는 그동안 여러 가람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일주문을 보았다. 하지만 불곡사의 일주문처럼 이렇게 독특한 문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람의 일주문 하면 언제나 불곡사의 일주문이 먼저 머리 속에 그려지곤 했다.

1974년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33호로 지정된 불곡사 일주문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불곡사 일주문은 처음 창원부 객사의 삼문(三門, 대궐이나 관청 앞에 있는 세 개의 문)이었다고 한다. 이 삼문은 1822년 웅천향교로 옮겨졌다가 1943년에 우담화상이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고 전해진다.

▲ 여섯 마리의 용머리와 호랑이, 거북이 새겨진 불국사 일주문
ⓒ 이종찬
언뜻 보기에도 걸작품으로 보이는 불곡사 일주문은 단층의 화려한 맞배지붕을 우산처럼 머리에 올린 나무로 된 문이다. 동서 기둥 위에는 각각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가 올려져 있고, 중간 두 기둥 위에도 남북으로 각각 여의주를 입에 문 두 마리의 용머리가 올려져 있다.

동서남북에서 용트림을 하고 있는 여섯 마리의 용머리는 7m의 원통 소나무로 입체감 있게 조각되어 금방이라도 화려한 맞배지붕을 퍼득여 저 푸르른 창원의 하늘로 끝없이 날아오를 것만 같다. 게다가 동쪽 머리맡에는 거북이, 서쪽 머리맡에는 호랑이가 민화로 조각되어져 있다.

한동안 넋을 잃고 일주문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봄소풍을 왔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이때 마침 숲 근처에서 '호오' 하며 날아가는 장끼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일주문 왼 편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불곡사 앞마당으로 향한다. 불곡사 앞마당 입구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한 그루가 사천왕처럼 버티고 서 있다.

▲ 창원부 객사의 삼문(三門)이었던 불곡사 일주문
ⓒ 이종찬
불곡사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공사 때문에 여기저기 껍질이 벗겨진 동그란 나무들이 나이테를 자랑하며 장작더미처럼 쌓여 있다. 불곡사 정문이 있던 자리에는 인부들 서너 명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뼈대만 앙상한 지붕에 올라가 새로운 불사를 짓느라 길손이 찾아온 줄도 모른다.

비음산 불곡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명왕 때 진경대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 몇 년에, 왜 이곳에 가람을 세우게 되었는 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없어진 것을 1929년에 우담화상(1882~1968)이 이곳에서 비로자나불상(보물 제436호)을 발견, 불곡사를 다시 세웠다고 전해진다.

당시 불곡사에 열심히 다니시며 우담화상과 꽤 가깝게 지냈던 내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불곡사 비로전
ⓒ 이종찬
어느날, 우담화상이 예로부터 부처골이라고 불리는 이곳 비음산 계곡 근처를 지나는데, 어느 한곳에서 갑자기 발바닥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우담화상이 지팡이로 그곳을 툭툭 치자 이내 흙이 좌우로 흩어지면서 비로자나불상의 머리가 보였단다.

그때 비로자나불상을 얻은 우담화상은 곧바로 그곳에 정착, '불이 골에 있다'라는 뜻의 불곡사 간판을 내걸고 비로전을 세워 비로자나불상을 주불로 모시기 시작했단다. 당시 우담화상은 왜인들이 불곡사를 불태운 뒤 비로자나불상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임시로 그곳에 묻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물론 이 이야기는 내가 어릴 적 내 어머니에게서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불곡사란 이름도 우담화상이 새롭게 지은 것이 아니라 이미 문헌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 만약 우담화상이 이곳에서 비로자나불을 얻지 못했다면 지금의 불곡사가 어찌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 보물 제436호 비로자나불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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