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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트 첫째날

▲ 지프니 타러 가다가 만난 들꽃
ⓒ 최진호
늦잠에서 일어나 토스트와 야채볶음밥으로 아침을 맛있게 먹는다. 오늘은 유황온천으로 이름난 마이니트 마을에 가기로 한다.

트라이시클(오토바이를 개조한 삼륜차)에 짐을 싣고 시내로 나가니 마침 마이니트 마을에 가는 지프니(미군 지프차를 개조한 일종의 승합차)가 있긴 한데 승객이 없다. 이곳은 차 출발 시간이 딱 정해져 있지 않고 기사가 보아서 사람들이 웬만큼 탔다고 생각하면 출발하는 식이다.

삼십분, 한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한 열다섯 명 탔고 비로소 기사는 시동을 건다.

사람들은 예의 그 호기심 어린 눈길로 우리를 구경하고, 질세라 나도 웃음 띤 눈길로 그네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유심히 바라본다. 이빨 없는 사람들이 왜 이리도 많은지. 앞니 빠진 여고생 모습에는 짠한 생각이 든다. 가난한 이 사람들은 1만 페소(1페소는 약 21원) 이상을 내고 이빨을 해 넣을 수가 없는 것이다. 부족한 영양과 힘겨운 노동으로 이빨이 깨지거나 빠지면 그대로 살아갈 뿐.

▲ 마이니트 마을 가는 길에서 본 산간마을
ⓒ 최진호
이제 차는 만원이 되었고 지붕에까지 사람들이 탔다. 지프니는 시꺼먼 매연을 내뿜으며 산비탈로 산비탈로 힘겹게 올라간다. 삼십분쯤 가니 마을이 하나 나오고 20분쯤 더가니 멀리 산등성이에 마을이 앉아 있다. 마이니트이다.

무거운 짐을 메고 들고 힘겹게 비탈길을 올라 게스턴 게스트하우스(Geston Gesthouse)로 간다. 멀리 마을 한가운데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유황 냄새가 풍겨온다.

구멍가게를 겸하고 있는 아담한 게스트 하우스는 잠겨 있다. 우리를 보고 몰려든 아이들에게 주인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니 부끄러워하며 서로 등 뒤에 숨기 바쁘다.

▲ 게스턴 게스트하우스
ⓒ 최진호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니 집주인이 일행과 같이 온다. 마을에 있는 마이니트 초등학교 분교장인 게스턴 여사와 돌포 선생님, 그리고 게스턴 선생님의 손자인 브랜포드와 친척인 5학년 여자아이 쥬디이다.

게스턴 선생님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게스트하우스까지 운영하는 것이다. 게스트하우스라야 객실이 두 개뿐인 민박집 수준이다. 게스턴 선생님은 바기오에 사는 딸의 아들인 네살배기 브랜포드를 키우며,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쥬디와 함께 산다.

예순 살이 넘어 보이는 게스턴 선생님은 3층에 있는 객실로 우리를 안내하고는 침대를 정리하고 자리를 깔아주신다. 얼마나 반가워하시며 스스럼없이 대해주는지 마치 친어머니 같다.

아래로 내려가니 말쑥한 옷차림에 단정한 머리를 한 돌포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다가 앞장서서 마을을 안내해준다. 양철과 나무로 지은 소박한 집들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니 하얀 김이 점점 더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가다가 한 집에 들러 달걀을 산다. 온천물에 삶아 먹기 위해서란다. 물이 그렇게 뜨거운가?

▲ 용솟음치는 노천 유황온천
ⓒ 최진호
노천온천에 당도하니 유황을 함유한 하얀 물이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용솟음치며 사납게 끓고 있다. 돌포 선생님은 조심하라고 거듭거듭 당부한다.

얼마 전에 여기에서 서양인 관광객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는 바람에 중화상을 입고 목숨을 잃었으며, 온천 근처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 데어 죽은 아이만 해도 지금까지 열 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주의하라는 표지판 하나를 제외하고는 안전시설 하나 보이지 않는다.

3분쯤 지나 담가두었던 달걀을 꺼내니 완숙이 되어 있다. 달걀을 까 먹으며 돌포 선생님은 자상하게 설명해준다. 몇 년 전 지질학자들이 이곳을 조사 연구하고 나서 '이 온천은 화산의 일종으로 언제라도 폭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는데 한 번 폭발하면 그 위력이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본똑 시가지도 화산재로 뒤덮일 정도'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지며 자리를 뜨고 싶어진다.

▲ 어미 돼지와 이야기 나누는 아이들
ⓒ 최진호
날이 어둑어둑해져 숙소로 돌아온다. 집에는 꽤 큰 풀장이 있는데 계곡 따라 흘러온 뜨거운 온천물을 가득 채워 놓았다. 야아, 뜨거운 물에 몸 담가 본 지 얼마만이냐? 우리는 부랴부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든다. 한 5분 있으니 얼굴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고 물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람에 몸이 식어 추워진다. 물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듭하니 냉온욕이 따로 없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객실 옆에는 취사도구를 갖추어 놓았지만 달리 준비해 온 것도 없고 마을에 식당도 없어 선생님네 가족과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다.

푸실푸실한 밥에 반찬은 생선탕 한 가지. 필리핀 사람들은 대개 반찬 한두 가지를 놓고 식사를 한다. 붕어 비슷한 물고기를 소금만 넣고 끓인 듯 비린내가 풍긴다. 진솔이는 인상을 찌푸리고, 나는 진솔이 입막음하려고 "국물이 참 시원하지 않냐? 맛있다, very delicious"를 연발하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래도 접대용으로 마련한 특식인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과자 한 보따리와 맥주 여러 병을 챙겨 옥상에 올라가 이야기꽃을 피운다.

돌포 선생님은 서른 살 총각으로 본똑에서 주립 사범대학을 나와 초등학교에 5년째 근무 중인데 이 마을에서 자취를 하며 주말마다 본똑 본가에 간단다. 형제자매가 십 남매인데 그 중 대학까지 나와 반반한 직장 가진 사람은 자기뿐이라서 만 페소쯤 되는 월급으로 부모님을 부양하며 동생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다 보니 밤이 꽤 깊었다. 돌포 선생님은 다음 날 자기 학교에서 식사를 함께 하자며 우리를 초대한다. 뿐만 아니라 저녁 식사는 자기 집에서 하잖다. 돌포 선생님은 밤길을 밝혀 집으로 돌아간다.

온천욕으로 데워진 몸과 사람들의 인정에 훈훈해진 마음으로 우리 잠자리는 따뜻하기만 하다.

마이니트 둘째 날

잠에서 깨어나니 겨우 5시가 좀 넘었다. 온천욕의 유혹에 수영장으로 내려가니 게스턴 선생님은 벌써 목욕을 마치고 타월로 몸을 감싼 채 걸어오고 있다. 물을 가득 채워놓았으니 진솔이도 깨워 어서 수영하라고 성화시다. 밝고 쾌활하고 따뜻한 그 분의 목소리에 내 마음도 덩달아 유쾌해진다.

진솔이를 깨우니 여느 때와는 딴판으로 벌떡 일어나 어서 수영하러 가자고 한다. 브랜포드도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서 우리와 함께 물놀이한다. 게스턴 선생님이 쟁반에 무언가 가지고 오신다. 나를 위한 커피와 진솔이 마실 차이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져간 튜브를 브랜포드에게 선물한다. 브랜포드는 입이 함지박만해지면서도 할머니 등 뒤로 숨기 바쁘다.

아침 식사는 정말 맛있다. 볶은 밥에 햄 부침개, 어묵 튀김, 그리고 어린 콩을 깍지째 잘라 볶은 것이다. 진솔이가 무척 좋아하는 것들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은 쥬디와 브랜포드를 데리고 학교에 가고 우리는 방에서 일기도 쓰고 과자도 먹으며 한가함을 즐긴다.

11시 넘어 카메라 가방만 메고 학교에 간다.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니 마을 끝 무렵 산등성이에 학교가 앉아 있다. 단층 건물 두 동에 배구 코트가 운동장을 대신하고 있는 아담한 분교이다.

▲ 교실 밖으로 나온 게스턴 선생님네 반 아이들
ⓒ 최진호
벌써 오전 수업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집에 가다가 우리 뒤를 따라 학교로 되돌아간다. 우리를 보고 웅성대는 소리에 교실에 있던 선생님과 아이들이 고개를 내민다. 돌포 선생님이 나와서 우리를 교실마다 데리고 다니며 인사를 시켜준다.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교실 안은 빛나고 있다.

"우리는 꼬레아에서 왔어요. 여러분 꼬레아 알지요? 필리핀과 꼬레아는 친구 사이랍니다. 만나서 참 반가워요."

아이들은 큰 박수로 우리를 환영해준다.

▲ 수업 중에 우리를 환영해 준 아이들
ⓒ 최진호
아이들은 집으로 점심 먹으러 가고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밥과 반찬을 지어 함께 먹는다. 생선으로 갖가지 요리를 하는데 우리를 위해서 진수성찬을 준비한다고 한다. 숯불을 피워서 바나나 잎으로 싼 생선을 구워 이니하우를 만들고, 생선을 끓이고 졸여 빡시우와 시니강이라는 음식을 요리한다.

우리도 선생님들 따라 접시에 밥과 생선 토막을 담아 손으로 먹는다. 서툰 손놀림으로 국물 적셔 밥을 뭉치고 생선뼈를 발라먹는 우리 모습에 선생님들은 연방 웃음을 터뜨린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마이니트 초등학교는 각 학년이 30명 안팎의 한 학급씩으로 이루어진 분교이다. 선생님들은 여덟 분이 계시며 병설 유치원도 딸려 있다. 국어인 따갈로그어, 수학, 사회, 예능, 실과, 영어를 가르치는데 국어인 따갈로그어를 제외한 모든 수업을 영어로 한단다.

▲ 식사 중 포즈를 취한 선생님들. 유니폼이 이채롭다.
ⓒ 최진호
어느덧 오후 수업시간이 되어간다. 선생님들과 주소를 교환하고 나서 우리는 서운한 표정으로 헤어진다.

숙소에 돌아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풀에 뛰어든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 온천 수영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은 것이다.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 빨리 가는 것인지. 이것이 시간의 상대성인가?

벌써 해가 떨어지고 게스턴 선생님 일행이 내려온다. 간밤에 약속했던 대로 우리는 돌포 선생님의 자취방으로 간다. 방은 참 조촐하다. 문명의 이기라고는 가스레인지뿐, 흔한 침대도 없는 마룻방에 부엌 겸 거실 하나. 선생님은 게스트 하우스 냉장고에 맡겨 두었던 생선을 가져와 부지런한 손놀림으로 요리한다.

▲ 마이니트 마을에서 만난 들꽃
ⓒ 최진호
식사준비가 다 되었다. 메뉴는 국물 없게 바짝 조린 생선 세 마리. 어린 콩을 깍지째 채 썰어 기름에 볶은 것, 그리고 짭짤하게 끓인 라면과 밥이다. 돌포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진수성찬을 마련한 것이다. 평소에는 설탕과 소금을 탄 물을 반찬 삼아 먹는다고 한다. 현금 수입 없는 부모님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교 보내자니 극도로 절약할 수밖에 없단다.

맥주잔을 기울이며, 어젯밤에 이어 우리 이야기는 계속된다. 돌포 선생님은 모순으로 가득 찬 조국 필리핀을 개혁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조만간 교직을 포기하고 NGO에서 소비자 운동 분야에 투신할 예정이라고 한다.

친구들은, 그에게 더 나이 들기 전에 외국에 나가 한밑천 장만해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단다. 나도 이삼십대에 학생운동과 인권운동 부문에서 활동했던 경험이 있는데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힘껏 돕겠다고 약속한다. 우리는 친구가 되어 앞으로 서로 연락하기로 한다.

죽이 맞은 우리는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밤이 꽤 이슥했고, 돌포 선생님은 날마다 수업 지도안을 써서 학교에 제출해야 한단다. 그게 보통 일이 아니어서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날도 있다고 한다.

횃불을 든 돌포 선생님의 인도로 숙소에 돌아오니 과연 10시가 넘은 그 때까지도 게스턴 선생님은 수업지도안을 쓰고 계신다. 옆에서 브랜포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고 쥬디는 수학 공부를 하고 있다.

▲ 게스턴 선생님과 손자 브랜포드
ⓒ 최진호
돌포 선생님은 돌아가고 우리는 과자를 한 보따리 안고 방으로 올라간다. 과자를 먹으며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마음이 따뜻한 착한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진다.

가난하지만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고 밝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선생님들과 아이들과 마을 사람들. 그네들의 눈에서 욕심과 악의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화난 목소리로 큰 소리 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자기네 삶에 만족하며 남에게 베풂을 즐거워한다. 그네들의 모습을 보니, 욕심과 행복은 반비례함을 알겠다.

"그러기에 진솔아, 부처님은 말이야,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라고 하셨던 거야."

마이니트 마을의 밤은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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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거의 날마다 오마이에 들어오는 중독자이지요. 특별히 자신있는 글쓰기 분야는 없고 글재주도 없지만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여행기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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