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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똑가는 길에서 본 산간마을
ⓒ 최진호
본똑 가는 길

여기는 필리핀의 여름 수도인 바기오(Baguio). 마닐라에서 버스로 꼬박 9시간 넘게 달려왔다.

오늘은 본똑(Bontoc)에 가는 날, 아침 8시 버스를 타러 당와 트랑꼬 버스터미널로 간다. 진솔이(12살 난 내 아들)는 버스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먼지를 뒤집어쓴 빛바랜 6, 70년대식으로 골동품 창고에서 굴러 나온 것 같다.

기사 자리 옆에 엔진룸이 볼록 튀어나와 있고 차체 한가운데에 접이식 문이 달린, 30~40년 전 서울의 시내버스 모양. 깨진 유리에는 얼기설기 테이프를 붙여놓았다. 과연 7~8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이 굴러 가 줄지.

버스 안으로 들어가니 지금까지 보아왔던 필리핀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얼굴과 몸집을 한 사람들이 타고 있는데 주로 노인들이다. 몸집이 작고 얼굴 윤곽은 우리와 비슷한데 더 검다. 이 사람들이 산악지방 원주민인 이고롯족이다. 바리바리 싼 야채, 옷가지, 목재, 철재 등 건축자재에 닭 몇 마리도 우리의 동행이다.

▲ 산길에서 본 이름모를 들꽃
ⓒ 최진호
8시간의 먼길에 오른다. 버스는 해발 1500m를 넘나드는 산들의 8, 9부 능선에 걸린 산길을 따라가며 찌우뚱 짜우뚱 곡예를 펼치기 시작한다. 왼쪽 오른쪽으로 춤추며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유리창으로 내다보니 찻길이 보이지 않는다. 차가 공중에 떠 있다. 진솔이는 불안 불안해하고, 나는 ‘살만큼 살았잖아’라고 생각하며 애써 평온을 찾는다.

인간 적응력의 놀라움이여! 두어 시간 탔나? 이제 우리는 차의 곡예를 즐기기 시작한다.

바기오에서 본똑에 이르는 할쎄마 하이웨이(Halsema Highway). 이름만 하이웨이일 뿐, 포장도 온전치 않고 차선도 없이 두 대가 겨우 비켜 지나갈 수 있는 시골길이다.

하지만 이 길을 가는 7, 8시간의 여정 자체가 스릴 있으면서 선경이 이어지는 기막힌 여행이다. 버스 맨 앞 운전석 건너편 자리에 앉으면 여행이 배나 더 즐거울 텐데, 우리에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 산길에서 본 이름모를 들꽃
ⓒ 최진호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마다, 용트림치며 힘차게 뻗어나간 산줄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구름이 내려와 앉은 산등성이 여기저기에는 라이스 테라스(rice terrace)라고 부르는 계단식 논밭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아스라이 보인다.

이렇듯 산과 구름과 논밭과 꽃과 사람들로 인해 우리 여행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오히려 이 길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쉬운, 즐겁고 행복한 것이 되었다. 괴테가 그랬다지. ‘사람이 여행을 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행하기 위해서’라고.

옆자리에 앉아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걸어온다. 자기 이름은 루이스이고 본똑에서 농사를 짓는데 바기오에 다녀오는 길이란다. 우리와 이야기할 때면 누구나 그랬듯이 ‘Japanese, Chinese, or Korea?' 바로 그 질문으로 말을 시작한다. 그런데 허름한 입성에 초라한 몰골을 한 그의 입에서는 정확한 발음의 유창한 영어가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교육의 힘이었다. 부잣집 자식들만 다닐 수 있는 사립학교에서만 영어로 가르치는 필리핀 거의 대부분 지역과 달리, 북부 루손의 몇몇 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모든 활동과 수업이 영어로 이루어진단다. 그래서 초등학생부터 노인들까지 영어가 정확하고 유창하다고 한다.

사실 그랬다. 우리가 여행했던 본똑, 사가다, 바나우에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참 잘했다. 그뿐인가? 필리핀의 국어인 따갈로그어, 북부 루손의 보편어인 일로까노어에 각 고장의 고유어까지 모두 4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언어의 천재들이다.

우리가 루손섬 북부를 여행하는 한국인 부자(父子)라고 했더니 루이스는 자기네 지역과 종족에 대해 자상하게 이야기해준다.

▲ 산에 방목하는 물소, 표정이 참 예쁘다.
ⓒ 최진호
이고롯(igorot)이란 ‘산에 사는 사람’이란 뜻을 가진 현지어란다. 그러나 이고롯족이라고 하면 거주 지역에 따라 본똑(Bontoc)족, 깐까나이(Kankanai)족, 이발로이(Ibaloi)족으로 나누어지는 부족 전체를 가리킨다고 한다. 약 15만명 정도가 산악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돼지와 닭을 치며 살아간단다.

자기네 동족은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 정책에 끝까지 저항하여 그들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고 고립된 산간 지역에 살아온 까닭에 다른 종족과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순수한 혈통을 가진, 독립적이고 자주정신을 가진 종족이라고 자랑한다.

바쁘다. 루이스의 말에 귀 기울이랴, 하나라고 놓칠새라 창 밖의 경치에 눈 기울이랴. 루이스 말을 통역해 달라고 조르던 호기심 많은 진솔이는 어느덧 내게 기대어 평화로운 잠을 자고 있다.

60살은 족히 넘었을 흰머리 차장 할아버지는 근무에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7시간은 넘게 왔을 텐데 손잡이를 꽉 잡은 채 빈 좌석에 엉덩이 한 번 걸치는 법 없이 내내 서 있으면서도 환한 웃음을 잃지 않고 승객들의 무거운 짐도 날라준다. 앉아 있는 내가 다 미안하며 짠한 생각이 든다.

차는 능선에서 골짜기로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다. 야자나무인지 바나나나무인지 잎 넙죽한 열대 식물들이 자주 나타난다.

▲ 트라이시클과 지프니가 달리는 본똑 중심가
ⓒ 최진호
드디어 본똑이다. 마운틴 주(Mountain Province)의 주도(州都). 산이 얼마나 많아서 마운틴 주인가. 이리 보아도 산, 저리 보아도 산이다.

본똑은 산 가운데로 흐르는 치꼬강이 만들어낸 계곡에 들어앉아 있는 인구 5만의 조그만 도시이다. 한 주의 주도라기엔 아담한 규모이다. 칙칙한 빛깔의 고풍스런 건물들로 보아 오래된 도시임을 알겠다. 도시가 작아서인지 택시나 시내버스는 없고 트라이시클(오토바이 옆에 승객을 태울 수 있게 장치한 세 바퀴 차량, 독일군 오토바이를 생각하면 될 듯)이 시내 운송을 맡고 있다.

우리는 트라이시클에 짐을 싣고 리지부룩 호텔로 간다. 말이 호텔이지 하룻밤 200페소(1페소는 약 22원)의 게스트 하우스이다.

숙소에 짐을 부리고 카메라만 챙겨 동네 구경에 나선다. 필리핀 여느 곳과 같이 이 동네도 젊은 실업자들로 넘쳐난다. 거리 여기저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우리가 나타나자 그 큰 눈들로 뚫어져라 바라본다. 무료한 중에 큰 호기심거리가 나타난 것이다.

"Hello" "Hi" 우리가 웃으며 인사하니 그네들은 우리보다 몇 갑절 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화답한다. '어디서 왔느냐?' '너희들 여기서 무슨 재미난 이야기하고 있냐?' '가족이 몇이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며 놀다보니 날이 저물고 하늘엔 별이 하나둘 돋아난다.

방에 돌아와 진솔이 수학 공부를 거들어주다가 아래 식당에서 맨 밥 두 덩이를 사와서 가져간 고추장에 비벼먹고, 우리는 입은 옷 그대로 각자 침낭에 들어간다.

본똑 박물관과 말릭꽁 마을

▲ 본똑 박물관
ⓒ 최진호
레스토랑에서 토스트, 계란프라이와 차로 아침을 먹은 뒤, 트라이시클 타고 본똑 박물관으로 간다. 시청 밑, 본똑 초등학교 한 켠에 자리잡은, 독특한 겉모습의 박물관은 꽃밭 속에 앉아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이고롯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수백 점의 흑백 사진들과 전통적인 생활용품, 옷,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들은 대부분 에두아르도 마스페레(Eduardo Masferre)라는 전설적 사진작가가 찍은 것인데 그는 스페인계 혼혈로 20세기 초부터 이곳 본똑에서만 반세기를 살며 산악부족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아왔다고 한다.

수천 년 전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곳 높고 험한 깊은 산 속으로 들어와 맨 손으로 가파른 산등성이를 깎아 논을 일구어 벼농사를 지으면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이웃 부족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가며 강인하게 살아간 그네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말릭꽁 마을과 라이스 테라스1
ⓒ 최진호
이제 말릭꽁(Malegcong) 마을로 간다. 라이스 테라스로 유명한 작은 마을이다. 걸어서는 세 시간이 걸린다는데 우리는 운 좋게도 하루에 두세 번 다니는 지프니를 탈 수 있었다. 지프니는 수십년 된 미군 지프를 개조한 일종의 승합차이다.

차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물린 엄마들이 타고 있다. 지프니는 지붕에까지 사람들을 태우고 그네들의 보따리, 가스통 등속을 매단 채,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높이 높이 올라간다. 한 40분 갔을까, 마을이 나오고 사람들을 따라 우리도 내린다.

▲ 말릭꽁 마을의 아이들
ⓒ 최진호
마을을 빠져 나와 산길로 접어드니, 눈 앞에 라이스 테라스의 장관이 펼쳐진다. 뚝 길을 따라가다 논에서 뚝 보강 작업을 하던 파비안이라는 아저씨를 만난다.

그는 수수한 웃음을 지으며 라이스 테라스를 설명해준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라이스 테라스. 논둑을 이으면 약 2만Km로 지구 반 바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로서 이 마을과 바나우에 바타드 마을의 것이 제일 유명한데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 말릭꽁 마을과 라이스 테라스2
ⓒ 최진호
안개 구름이 휘감아 도는 산등성이 여기 저기 라이스 테라스가 보이고 옹기종기 마을들이 깃들어 있다. 산, 구름, 나무, 꽃들과 어우러져 그림처럼 아름답다.

그러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돼지, 닭 등 가축의 역겨운 냄새에 숨쉬기조차 거북하고, 나무와 양철 따위로 얼기설기 지어진 엉성한 집에, 힘겨운 농사일로 여윈 몸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그래도 그네들의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고 상냥하고 친절함을 잃지 않는다.

▲ 시장에 나온 달걀. 자연색인 빨간 달걀이 이채롭다.
ⓒ 최진호
마을 어귀에서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려 지프니를 타고 본똑 시내로 돌아온다. 시장 구경에 나섰는데 마침 닭전에서 닭을 잡고 있다. 닭을 칼로 푹 쑤시자 피가 뭉글뭉글 솟아나는 모습을 본 진솔이는 질겁을 하며 애써 외면한다. 이때를 놓칠새라 나는 나의 채식주의에 격렬히(?) 저항해온 진솔이에 대한 교양의 기회로 삼는다.

"봐라, 그래도 치킨 좋아할 거냐? 저렇게 잔인하게 닭 죽이는 모습을 보고도? 넌 닭고기가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줄 알았지? 모든 생명은 똑같이 소중한 것이니 귀하고 불쌍하게 여겨야한단다."

녀석은 뭘 좀 깨달았는지 말이 없다.

저녁거리로 망고, 푸른 오렌지, 사과, 우유와 빵을 사서 트라이시클을 타고 숙소로 돌아온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지난 1월 필리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여행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 글은 <월간 골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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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거의 날마다 오마이에 들어오는 중독자이지요. 특별히 자신있는 글쓰기 분야는 없고 글재주도 없지만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서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나 여행기를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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