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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도치미 산에서 본 바다 풍경
ⓒ 강제윤
고향 보길도에 돌아온 지 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세연정 부근에 '동천다려'라는 둥지를 트는 일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생애 처음으로 나는 한 둥지에서 그토록 오래 살았습니다. 하지만 귀향 초기,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고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구에겐가 이런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돌아오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고 하던가요. 하지만 나는 20년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고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귀향이란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시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향이란 결코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고향이란 내가 태어나 자란 시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고향은 실재하는 곳이 아니며 귀향이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합니다."

정녕 그러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순간 나는 고향을 상실했고 다시 낯선 시공간 속에 던져져 있었습니다. 그 상실감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괴로워했던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고향을 잃은 대신에 아주 특별한 선물하나를 받았습니다.

보길도, 보길도라는 아름다운 섬에 깊이 빠져있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고향을 잃었으나 내 육신과 정신의 본향, 육신의 집인 동시에 정신의 거처이기도 한 공간을 얻었습니다.

보길도가 뭇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고산 윤선도를 통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고산의 유적을 찾아 보길도에 옵니다. 세연정을 둘러보고 동천석실과 낙서재, 곡수당 터 등 부용동 원림의 흔적을 돌아본 뒤 더러는 감탄하기도 하고 더러는 실망만을 안고 떠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 이 먼 섬까지 와서 고산의 유적만 좇다가는 사람은 보길도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보길도는 고산에 의해 아름다움이 발견된 섬이지, 고산이 만들어서 아름다워진 섬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왜 고산의 유적이 고대광실처럼 꾸며져 있지 않은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일쑤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서울 왕궁이나 경주의 박물관 같은 것일까요. 실상 사람들이 보길도에 와서 찾아야 할 것은 그런 인공의 조형물 따위가 아니라 고산이 그토록 감동했던 보길도의 자연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런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지금은 간척으로 망가져 원형을 잃은 황원포도 금강산 삼일포보다 명승이었다지만 무엇보다 고산이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보길도의 산이 있었습니다. 고산은 보길도의 산 속에서 선계를 발견했던 것이지요. 작은 섬답지 않게 보길도에는 적자산, 수리봉, 광대봉, 망월
봉, 미산, 뾰족산, 도치미, 북바위산 등 비단결 같은 능선과 깎아지른 절벽을 가진 명산 절승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보길도에 와서 산을 찾지 않고 해수욕장이나 둘러보고, 드라이브나 하다가는 사람들은 단언컨데 보길도를 다녀갔어도 다녀간 것이 아닙니다. 보길도의 주산인 적자산이나 부황리 뒷산 선바구에 올라보십시오. 맑은 날에는 한라산이 지척이고 추자도, 완도, 진도, 노화도, 소안도, 관매도, 횡간도, 넙도, 장수도, 기섬, 닭섬, 소섬 등 크고 작은 유무인도들이 점점이 떠있는 풍경이 그대로 선경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길도를 환상의 섬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보길도는 섬이 아닙니다. 바다 위에 떠있다 해서 다 섬은 아니지요. 보길도는 산입니다. 대륙으로부터 뻗어 나와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오른 장엄한 산입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보길도 찬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끝내 저 난 개발과 토목범죄들로부터 지킬 수만 있다 면 보길도는 수 천번을 자랑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나라 전체의 보물입니다.

그러나 보길도에 돌아와 살면서 나는 보길도의 앞날에 대해 그다지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도로 확장공사와 방파제 공사를 한몫에 수주한 토목 업체에 의해 망월산은 뭉텅이로 잘려나간 지 오랩니다.

도시에서는 시멘트를 걷어내고 자연하천을 되살리고 있는 판국에 40억의 돈을 들여 건천인 부황천을 시멘트로 바르고 호안블럭으로 쌓겠다는 것을 어렵게 막아놓자, 이번에는 270억원의 예산으로 가뭄에는 무용지물인 댐을 증축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다른 대안이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댐 공사만을 강행하겠다는 것을 또 어렵게 싸워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요즈음에는 또 363억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고산의 유적을 발굴 복원 중입니다. 문화유적을 보존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행위지요. 하지만 유적을 복원한다는 명분으로 산을 깎고 고목을 베어내고 하천을 파헤치고 바위를 들어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유적을 복원하지 않는 것만 못한 일입니다. 보길도는 자연 그대로가 고산의 유적이고 소중한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정책당국자들이 신주단지같이 떠받드는 관광산업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 보길도처럼 원시림과 자연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 된 곳은 흔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돈을 들여서 개발하지 않더라도 원 상태로 보존만 된다면 이보다 뛰어난 관광자원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고향은 더 이상 안식의 땅이 아닙니다. 이 땅 어디에도 귀거래사를 부르며 돌아가 한가롭게 노닐 고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귀거래를 꿈꾸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들 고향은 더 이상 돌아가 편히 쉴 곳은 아닌 것을. 그러므로 그대들, 지킬 수 없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그래도 기필코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지옥으로 갈지언정 고향으로 가지는 마십시오.

돌아갈 곳 없는 고통에 비한다면 지옥의 고통도 사소한 것. 지옥의 고통이야 마침내 돌아갈 고향이 있음으로 견디어 낼 수 있을 테지만 돌아갈 곳 없는 고통은 또 무엇으로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까."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에도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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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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