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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에서 뽑기 직전에 순무
ⓒ 느릿느릿 박철
입동(立冬)지나 비가 오고나서 날씨가 새촘해지더니 벌써 이집 저집 겨울 김장이 시작되었다. 겨울 김장은 시골에서는 큰 양식거리를 마련하는 일이라 중요한 집안 행사가 아닐 수 없다. 김치 종류도 다양하다. 배추김치, 깍두기, 총각김치, 보쌈김치, 순무김치, 동치미(경기도에선 신건지라고도 함), 무짠지 등…. 흰쌀밥 위에 잘 익은 김치를 척 얹어 둘둘 말아먹으면 임금님 수랏상이 부럽지 않다. 또 김장하는 날 구수한 배추 된장국에 배추 속에 삶은 돼지고기를 싸 먹으면 끝내준다.

교동에서는 김장하는 날 배추로 된장국을 끓이지 않고 배추 절인 것과 양념을 솥에 넣고 물을 붓고 끓인다. 물이 자작해 질 때까지. 양념이 발효가 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맛이 좀 매운 편이다. 돼지고기나 멸치를 넣지 않는다. 그래서 맛이 담백하고 맛있다. 다른 반찬이 필요없다.

동지섣달 한밤중 밖에는 겨울 칼바람이 쇳소리를 내며 분다. 동네 개들이 이따금 컹컹 짖는 소리가 들린다. 광에 묻어두었던 김칫독에서 동치미 한 바가지 퍼내 출출한 김에 쭉 마시면 오장육부의 모든 몹쓸 것들이 다 씻겨나가는 느낌이다. 거기다 메밀묵이나 상수리묵이 있으면 묵을 잘게 썰고 그 위에 김치 송송 썰어 넣고 참기를 한 방울 떨어뜨려 비벼서 먹으면 긴 겨울밤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다.

내가 교동으로 이사 와서 눈독을 들인 것 중 하나가 ‘순무김치’였다. 옛날 배추 뿌래기 맛 비슷한 게 약간 쌉싸름하면서 톡 쏘는 맛이 난다. 유년시절이 생각이 난다. 그 시절에 늘 허기져 있었다. 늘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찾는다. 김장하는 날, 어머니가 배추 뿌래기를 깎아 주신다. 약간 매콤하면서 고소한 맛이 먹을 만하다. 배추 뿌래기를 서너 개 먹고 나면 트림도 나고 방귀도 나온다. 강화 ‘순무’가 바로 그 맛이다.

▲ 껍질을 깎아 먹으면 옛날 배추 뿌래기 맛이 난다. 약간 맵고 고소하다. 먹을만하다.
ⓒ 느릿느릿 박철
강화 ‘순무’는 강화 특산물이다. 강화 순무씨를 구해다 다른 지역에서 심어도 잘 자란다. 그러나 밭에서 수확한 순무로 김치를 담그면 순무가 다 물러서 먹을 수가 없다. 삶은 호박처럼 되고 만다. 전에 우리집이 경기도 화성에 살 때 실제로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순무는 완전 신토불이 식품이다. 요즘은 강화 순무가 브랜드화 되어 미국에 수출도 많이 한다.

순무김치를 담그는 법은 순무를 칼로 어슷어슷 썰어 양념을 하고 될 수 있으면 물을 많이 잡아야 한다. 순무에서는 물이 많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양념하는 것은 비슷하다. 기왕이면 거기에 밴댕이젓을 넣으면 최고급 순무김치가 된다.

우리 동네에서 순무김치를 잘 담그는 할머니가 계신다. 한정님 할머니시다. 이따금 순무 김치를 날라다 주신다. 고향이 황해도 연백이다. 16살 때 교동으로 시집을 오셨다. 교동으로 시집을 온 그 해 전쟁이 터졌다고 한다. 16살 때 민며느리로 시집을 오셔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는다. 언제나 웃으신다.

속이 참 넓으시다. 손님대접하길 좋아하신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많이 간다. 겨울에는 만두를 빚어 가끔 만두잔치를 한다. 날 오라고 해서 가보면 옆집 할머니들이 다 모이셨다. 만두 맛도 좋지만 할머니들의 구수한 말씀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는 그런 풍경이 더 좋다.

엊그제 겨울 김장용으로 순무김치를 한 양동이 갖고 오셨는데, 날이 따스해서 벌써 익었다. 아내가 한 접시 꺼내놓으면 금방 없어지고 만다. 애들도 잘 먹는다. 순무김치를 한 저름 입에 넣고 먹으면서 한정님 할머니의 사랑을 느낀다.

▲ 순무김치. 뜨거운 밥과 먹으면 다른 반찬 필요가 없다. 국물에 밥을 비벼먹어도 좋다.
ⓒ 느릿느릿 박철

겨울 김장이 끝나면, 집집마다 맛 좀 보라고 한 보시기씩 갖다 주신다. 끼니때마다 아내는 누구네 집에서 갖고 온 김치라고 보고를 하면 나는 그 맛에 흠뻑 빠져든다. 똑같은 재료와 양념으로 만든 김치이지만 그 맛은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마른 사람이 담근 김치는 맵고 짠 편이고, 뚱뚱한 사람이 담근 김치는 싱거운 편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 담근 김치는 잘 익은 다음에 먹어야 제 맛이 나고,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 담근 김치는 바로 먹어도 맛이 좋다.

집집마다 김장을 담그느라고 집 앞에 밭에서 뽑아온 배추가 쌓여 있다. 도시에 있는 자녀들에게 다 나눠주느라 김장을 많이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신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겨울은 김치의 계절이다. 쌀독에 쌀이 그득하고 김장독에 김치가 그득한데 무슨 걱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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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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