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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시장으로 갔다. 시골 장이지만 갖출 건 다 갖춘 장이다. 시장 난전에서 부새 조기 한 손하고 생갈치 두 마리를 사서는 소금을 쳐 달라고 했다.

남자 손에 생선봉지가 들려도 이제는 무덤덤하고 생선가게 여주인도 생긋생긋 웃으며 칼질을 정성껏 해 주었다. 지난 태풍에 떨어진 풋감으로 주말에는 감물염색을 해야지.

▲ 떨어진 풋감
ⓒ 이학근

광목도 사야하고 감즙을 낼 분쇄기도 구해야 했다. 포목점에서 광목을 고르는데 열 마 이내면 옷 한 벌이 되는데, 포목집 아주머니는 광목 한 필을 꺼내놓고는 국산광목이라며 연신 코로 옷감 냄새를 맡으며 한 필을 다 가져가라고 하신다.

한 필에 7만 원 받아야 하는데 다 가져가면 6만 원에 주겠다고 한다.내가 광목 감을 만져보자 뭐 내가 질을 감별할 능력도 없지만 내 느낌에 제법 두툼하고 질감이 고운 것이 국산 같아서 반 필만 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꼭 다 팔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런 광목을 구하려도 해도 요즈음은 쉽게 구하기 힘든 거라고 또 권한다.

못 이기는 척 하며 돈을 다 드리고 한 필을 구하고 보니 이제 더 이상 광목 구할 일은 없어 잘 했다 싶다. 쇄기란 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가정용 녹즙기가 바로 즙도 짜고 분쇄도 하고 마늘도 갈고 국수도 뽑는 그런 거였다.

▲ 감즙에 광목천 담그기
ⓒ 이학근

주말 아침, 햇살이 여간 좋은 날이 아니다. 일단 헌옷으로 갈아입고 냉장고에 보관된 감 두 자루를 꺼내서 물에 살랑살랑 씻어 평상에 내어놓고 조각 낸 감을 녹즙기에 넣고 갈아내었다. 금방 대야 하나에 가득 감 즙을 토해낸다. 삼베 주머니에 즙을 담아 맑은 감물만 짜내어서 받아 놓았다.

아침에 한번 삶아서 늘어 논 광목을 감물 속에 집어넣고 박 박 문질러서 감물을 들었다. 7마씩 자른 광목 두 개를 마저 들여 마당 빨래 줄에 널었다. 감즙은 천연 코팅재인가 보다. 손등에 묻은 액이 마르니 마치 셀로판 코팅같이 되어 매끄럽고 반짝인다.

감물 염색을 하여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나도 확실하지 않다. 먼저 한 벌쯤 내 개량한복을 만들어 볼 것이고 나머지는 꼭 무얼 만들어 보겠다는 것도 아니다. 감물 염색한 옷감이 통기성이 좋고 질기다고 하여 사람들이 선호하니 나도 만들어 입고 싶을 따름이다.

태풍에 감이 떨어지기에 아까워서 용도를 찾았다고 보는 편이 맞기도 하다. 한 주 동안 보관하면서 그 사이에 물러져 버린 감은 따로 가려 빈 통에다 담았다. 오후에 감 밭에 들어가서 땅에 떨어져 홍시가 되고 있는 감들을 두 자루 더 주어다 담아 두었다. 감 식초를 만들어 볼 참이다.

감 식초가 되면 내년 봄에는 감나무에다 감 식초를 뿌리면 화학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될지 모르기에 해 보는 것이다. 여기저기 사람들에게 듣고 보고 한 것이 있어 초보 농부가 하나씩 하나씩 깨우치는 과정이기도 하다.

▲ 광목천 빨래줄에 널기
ⓒ 이학근

빨래줄 하나에 긴 옷감을 널어놓자니 빨래 집게를 총총 매달아야 하고 줄이 아래로 축 처지고 말았다. 대나무 장대 대신에 나무 막대를 구하여 끝에다 못을 박아서 빨래줄 받침대를 만들어 세우니 바람에 빨래가 춤을 춘다. 이리 한바탕 흔들리고 저리 한바탕 흔들리고 가을 바람에 벼가 잘 익는 까닭이 바로 이런 햇살과 서늘한 바람기운이지 싶다.

잠시 여가를 살펴 텃밭의 익은 고추를 한 소쿠리 땄다. 아무래도 고추 속을 잘라서 말리는 편이 손쉬운 방법 같아, 따서 바로 가위질을 하여 대자리에 늘어 마당에 놓았다.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얼마나 대견한지 고운 제 자식 쳐다보는 마음이다.

▲ 산중 햇살에 고추 말리기
ⓒ 이학근

내가 고추를 이리 애지중지 따서 모으는 이유는 물론 제 손으로 농사지은 결실인데 애착이 가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께서 도회지에 앉아서 산청 산막에 '고추, 고추, 고추 수확을 하여 볕에 말려야 하는데…'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지난 추석에 가면서 그 동안 모아둔 고추를 가져다 드렸는데 고추 빛깔이 너무 곱다고 좋아하셨다. 그래서 남은 고추도 모아서 드리겠노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전화로 주중에 따서 가져오라고 하신다.

집에 계시는 당신이 옥상 볕에다 말리신다는 것이다. 내가 따로 효도는 못해도 소일거리 만들어서 심심하지 않도록 해 드리는 효도는 잘 한다.

고추를 말려보니 시장에 나오는 태양초가 정말 얼마나 진짜 태양초이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정말로 이렇게 태양으로 말리는 고추라면 가격이 천장부지로 높을 것인데 그리고 농약에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고추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이지 싶기도 하다.

▲ 산막 추녀에 달린 풍경
ⓒ 이학근

여름 내내 쏟아지던 비도 이번 태풍으로 그치고 계절도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냇가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청아하게 들린다. 이제 물 속에 들어가서 목욕 하기는 힘들어졌다. 집 앞 개울물이 철 철 철 흘러 넘쳐 빨래터를 만들어 놓았다.

흘러내린 돌들이 가지런히 자리를 잡아 저절로 빨래 돌이 되고, 디딤돌이 되고, 자리 돌이 되었다. 산모퉁이 돌아온 바람 한 자락 불어와, 처마 끝에 지나면서 풍경 한번 흔들어주니, 그렁그렁 푸른 하늘에서 쪽빛 같은 눈물방울이 뎅그렁 뎅그렁 귓전에 쏟아진다.

아! 가을,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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