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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세봉 장군 석상
ⓒ 박도
왕청문

6시 50분, 저물녘에 닿은 곳은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지역으로 자주 오르내리는 왕청문(旺淸門)이었다. 이곳은 1919년 3월 서간도 지역의 3․1 만세운동 시위로 일제 관헌에 의해 여러 사람이 살상되었으며, 1920년대에는 국민부 본부가, 1930년대에는 조선혁명군 본부가 있었다.

이미 땅거미가 진 어둑한 시간임에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항일투쟁 중,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절명한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석상을 찾고자 왕청문 소학교(한 교문에 소학교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었음)로 갔다.

운동장 한편에 화강암으로 양세봉 장군의 흉상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그분은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항일 명장으로 특별 예우를 받고 있었다. 우상 숭배를 배격하는 중국에서 조선인의 석상 수립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했다.

나는 참배에 앞서 땅거미가 지는 어둑한 시간이라 서둘러 카메라 셔터부터 부지런히 눌렀다. 카메라 플래시를 차에다 두고 갔기에 하는 수 없이 조리개를 최대로 열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앵글을 잡아 셔터를 눌렸다.

흉상 아래 화강석에는 검은 글씨로 ‘抗日 名將 梁瑞鳳(항일 명장 양서봉)’이라고 새겨졌는데, 이 석상은 동북 조선족들의 성금으로 세웠다고 석상 뒷면에 씌어 있었다.

▲ 양세봉 장군
ⓒ 박도
항일 명장 양세봉

양세봉은 1896년 6월 5일(음력), 평북 철산군 세리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다른 이름은 서봉(瑞鳳), 윤봉(允鳳)이며 호는 벽해(碧海)이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하여 서당에서 소사로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글을 깨쳤다. 일제의 침략 이 이 지역에도 미쳤다. 일제는 선량한 주민에게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본 소년 세봉은 그때부터 항일 의식이 싹텄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년 세봉은 자기도 안 의사와 같은 인물이 되고자 결심했다.

16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 살림을 맡아 가계를 꾸려 나갔다. 20세 때 결혼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국내에서 생활하기가 곤란했다.

이듬해 겨울,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인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 갔다. 1919년 봄, 신빈현 홍묘자로 이사하여 살던 중에 만주 땅에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청년 세봉은 흥동학교 이세일과 함께 한인들을 모아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22년에는 독립단 대장인 김명봉․정창하 등과 독립단 소속 지방 공작원이 되었다. 그때 양세봉은 독립단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독립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 해 겨울, 국경을 넘어와서 의주․삭주․귀성군의 경계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천마산대(天摩山隊)에 가입하여 창성군 대유동 경찰서, 금광사무소와 영림창을 습격하였다. 이곳에서 군수물자와 금괴를 빼앗아서 군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봄, 일제의 토벌이 극심해짐에 따라 천마산대는 남만주 유하현으로 이동해서 ‘광복군 총영'과 합류하여 광복군 철마별영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양세봉은 검사관으로 임명되어 불량한 병사들을 선도하는 군기 확립에 온힘을 쏟았다. 아울러 의용군의 훈련도 강화시켜 정규군 수준으로 끌어올리자, 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으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았다.

1924년에는 양세봉은 남만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 개편한 참의부에 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5월 16일에는 참의부 소대장으로 국경을 넘어 평북 초산과 강계에서 일경과 교전하여 수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며, 5월 19일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국경지역인 압록강을 순시한다는 정보를 들었다.

양세봉은 제2중대 제1소대장 한웅권과 합세하여 일제의 경비가 미치지 않는 만주 쪽 강 절벽에다가 저격병을 배치하여 사이토 총독이 압록강 경비선을 타고 지나갈 때 사격을 가했다. 비록 사거리가 멀고 경비선이 전속력으로 달려서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사이토 총독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 석상에 새긴 '항일 명장 양서봉'
이런 양세봉의 용맹이 알려지자 곧 참의부 제3중대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11월, 길림에서 결성된 통합군단 정의부(正義府)에 들어가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일제 군인 경찰 등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그 무렵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에 따라 통일전선이 형성되고 국내에서도 좌우익의 통합체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등, 연합전선을 추진하는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928년 5월, 만주지역에서도 정의부를 주축으로 전민족유일당 조직회의가 열리자 양세봉은 민족유일당 결성과 삼부 통합운동 등 민족운동 세력의 단합을 위해 헌신했다.

1929년 4월 정의부를 주축으로 새로운 군정부인 국민부가 조직되자 양세봉은 제1중대장이 되었다. 그는 일제의 주구기관인 선민부(鮮民府 : 재만 조선족 친일단체. 민족운동 세력의 탄압에 앞장섰음)를 토벌하는 것을 주임무로,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밀정을 처단했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의 동북지방 침략이 본격화되자, 양세봉은 왕청문의 중국인 실력자 왕동헌(王彤軒)의 요녕농민자위단과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맞서 싸웠다. 양세봉은 항일전선에 나선이래 초지일관 용맹하게 투쟁한 경력을 인정받아서 35세의 나이로 조선혁명군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 양세봉은 일제와 결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화현 강전자에 속성사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면서 요녕농민자위군과 조선혁명군이 연합하여 일본군과 200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치렀다. 마침내 한중 연합작전으로 영릉가(永陵街) 전투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은 국내에도 여러 차례 소부대를 밀파하여 일제 군경을 습격하거나 군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조선혁명군은 1932년에 16차에 걸쳐 100여 명, 이듬해 10차에 걸쳐 140여 명을 국내에 침투시켰다.

일제는 양세봉 조선혁명군 총사령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음모를 꾸민 바, 그 한 가지가 현상금을 걸어서 돈에 눈먼 밀정을 총동원시켰다.

일제의 밀정 박창해는 중국인 ‘왕(王)’이란 자를 매수하여 그를 통해 중국군 사령관이 군사문제를 협의하고자 양세봉 장군을 만나자는 흉계를 꾸몄다.

밀정 박은 사전에 일제와 모의한 바, 양 장군이 그 흉계에 말려들면 환인현 소황구의 골짜기로 유인키로 했다. 양세봉은 왕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곳으로 가던 중 갑자기 옥수수 밭에서 뛰쳐나온 수십 명의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양세봉은 투항을 거부하다가 그 자리에서 집중 사격을 받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양세봉이 순국하자 동지들은 일제가 모르게 산 중턱에다 평장(平葬)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탐지하여 묘를 파헤치고 양 장군의 시신을 꺼내 목을 잘라서 통화현 시내에 내걸었다고 한다.

양 장군의 흉상을 우러러볼수록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남의 나라 땅에 이렇게 훌륭한 석상이 동포들의 손으로 세워지다니… 그분의 위대한 생애와 조선족들의 갸륵한 정성이 눈물겹다.

“동북의 조선족들이 조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인 석상이에요.”

김 선생은 참배를 마치고 차에 오르면서 정작 조국에서는 아직도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선열에 대한 예우가 소홀함을 섭섭해했다.

하긴 해방 후 그동안 사이비 애국자들이 판을 쳤으니 그들에게는 양 장군과 같은 진짜 독립운동가가 오히려 눈에 가시였을 게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만주에서 양세봉 장군을 두 차례 뵌 적이 있었던 허은 여사는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가슴 아픈 일화를 전하고 있다.

한번은 양세봉 씨가 대낮에 집에 불쑥 왔다. 밤낮으로 가정도 돌보지 않고 밖에서만 활동하던 이가 대낮에 집에 와서는 느닷없이 부인을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녀이며, 석주 이상룡의 손부인 허은 여사. 두 가문의 파란만장한 항일 행적을 다 풀어놓지 못한 채 이승을 떠났다.
갑자기 그러니 방으로 들어가는 부인이 그만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왜 그렇게 가슴이 벌떡거리느냐고 남편이 물어서 겁이 나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양 장군은 혁명가의 아내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디에 쓰겠냐고 하면서 가만히 보듬어 주면서 한바탕 방사를 치렀다. 그래놓고는 또 훌쩍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열 달 후, 그 아내는 사내아이를 낳았다. 시동생이 아이의 출생 소식을 전해 주려고 수소문해서 형님을 찾아갔다.

양 장군이 “그래 뭐 낳았냐?”고 해서 아들이라고 하니, “그깟 일로 먼길을 뭐 하러 왔냐? 빨리 돌아가라.”고 하면서 딱 하룻밤 재워 보냈다. 먼 곳까지 길을 묻고 물어 찾아갔는데….

양 장군은 일본 놈들이 알면 당신 아들도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미리 알았나 보다. 일본군이 양세봉 장군을 죽일 때 세 살 박이 그 아들을 같이 죽이지만 않았다면, 후손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끔 신문에도 그 분의 활약 얘기가 나던데 후손이 없어 아직 유해는 못 찾은 것 같다. 독립운동가들이 대개가 이런 형편이었으니 어찌 후손이 귀하지 않겠으며, 후손이 있은 들 교육이나 제대로 받고 살았겠는가?
-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7시 30분, 만족 자치현인 신빈에 도착해서 흥경빈관에 들었다. 늦은 점심에다 강행군으로 심신이 지쳐 저녁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김 선생이 빈관 밖에 나가서 만두를 사 왔다.

별미로 두어 개 먹고 오랜만에 더운물에 샤워를 하니 온몸이 녹초가 됐다. 빈관 옆 공원에서는 무슨 행사인지 폭죽소리와 만족(滿族) 특유의 풍악소리, 사람들의 함성이 호기심 많은 나그네를 불렀다.

하지만 내 몸이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라, ‘수면 후’인가 보다. 출국 후 가장 일찍 잠든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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