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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노바 바베/칼린디/실천문학사
ⓒ 실천문학사
불확실하고 혼탁한 시대를 반영한 탓일까. 요즘 내 화두는 온통 '인간'이다. 한 일간지의 표현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느 것 하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않은 건 없지만 세상 곳곳이 시끄럽지 않은 데가 없다 보니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고 싶고, 그리고 "근본이라면, 역시 인간"임을 터득한 것이다.

이러 저러한 좋지 못한 일로 사회면을 장식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과연 인간이 인간을 위한 희망이 될 수 있을는지 되묻는다. 한 가정을 넘어, 한 사회를 넘어, 그리고 한 나라를 넘어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된 인류 공동체를 상상하면서. 그래서일까. 이러한 삶을 꿈꾸며 자신의 온 생애를 던진 '성자(聖者)'들이 삶이 그리워진다.

이러한 내 답답한 그리움에 한 성자가 찾아왔다. 내 삶의 전형으로, 또는 삶의 희망으로 삼아도 좋을 그 이름, '걸어다니는 인도의 성자' 비노바 바베(Vinob Bh ve, 1895-1982).

바베는 어떤 인물일까. 어디서 태어나, 어떤 어린 시절을 보내고, 삶에 어떤 '결실'을 남겨놓았을까. 기본적인 신상 명세부터 시작된 비노바에 대한 관심은 금세 그의 사상까지 파고 들어가게 만든다.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간디는 평생 진리와 비폭력의 두 원칙으로 다양한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정치적 독립을 이뤄 낸 뒤, 이 같은 원칙에 따른 몇 가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이 소규모의 헌신적인 추종자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집단의 지도자가 바로 종종 아차리야( ch rya, 선생)라고 불리던 비노바 바베였다."

사실 바베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도 태생의 성자라면 서슴없이 모한다스 까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나 라빈드란다쓰 타고르(Rabindranath Tagor, 1861-1941)를 되뇌지만, 바베는 '누구냐'며 반문을 받기 일쑤다. 오죽하면 간디가 자신의 길을 묵묵히 따르는 바베를 위해 1940년 10월 5일 한 건의 성명서를 발표했을까.

"그는 그의 마음 속에서 불가촉천민이라는 생각의 흔적들을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정열을 가지고 공동체적 일치를 신봉하고 있습니다 … 그는 결코 정치적인 무대에서 주목을 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 (그러나) 그는 비폭력 저항이야말로 건설활동에 대한 두터운 믿음과 실천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철저하게 신봉하고 있습니다."

그렇다. 바베는 간디라는 거대한 그늘에 가려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1948년 간디가 예기치 못한 암살을 당한 뒤, 바베는 비폭력의 이론과 실천 분야에서 간디의 상속자요, 계승자로 널리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서 바베에 공정한 평가를 내리자면, 간디가 마려한 싸띠야그라하(satyagraha, 진리붙들기)와 아힘사(ahimsa, 비폭력), 그리고 스와라지(swaraj, 자치) 운동을 좀 더 철저히 실천시키고 사회 제도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바베의 사회적·정치적 관심은 간디와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공공의 복지'를 위한 운동인 사르보다야는 바베의 이름과 동의어였다. 바베는 사르보다야에 대해 "전체의 이익은 한 사람의 이익 안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하면서 항상 간디의 말을 되풀이했다. 해서 바베는 그의 온 생애에 걸쳐 간디의 주제들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정교화했는데, 그것이 부단(Bhoodan, 자발적인 토지헌납) 운동에서 절정을 이룬 것이다.

▲ 1953년 5월 11일자 타임 커버스토리
ⓒ 타임
부단 운동의 핵심은 사르보다야에 뿌리를 두었다. 그러나 부단 운동은 근본적으로, 비록 간디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바베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베는 부단의 목적에 대해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힘을 자각하도록 일깨우는 것이고,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발을 딛고 일어서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베에게 있어서 부단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을 집착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고, 마음의 일치를 가져오는 것이다.

바베는 세 단계의 혁명으로 부단의 특징을 기술했다. 우선 "마음이 변해야 하고, 다음으로 삶이 변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국가의 전체 사회 구조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부단 운동은 다나(d na, 기부) 개념과 관련해 바베에게 영감을 주었다. 다나는 바베에게 단순한 헌납 이상의 뜻을 지닌다. 다나는 야즈나(yajna, 희생)고, 삼비브호가(samvibhoga, 공평한 분배)고, 다르마(dharma, 사회를 향한 의무)였다. 그는 다나 개념을 발전시켜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시킨 것이다.

이 같은 부단 운동에 바베가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연한 경험을 통해서다. 1951년 3월, 바베는 사르보다야 사마지 대회에 참석차 안드라(Andhra)의 텔렝가(Telanga)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텔렝가 지역은 히데라바드 주의 일부였는데, 바베가 도보로 지나갈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유혈폭력에 따른 불안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바베는 이 곳에서 농사지을 땅이 필요하다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을 만난다. 바베는 이들이 겪고 있던 문제를 공적 모임에 나가 제기했고, 이때 라마찬드라 레디라는 부유한 농부로부터 약 천평의 땅을 헌납받았다.

이같은 관대한 행동에 바베는 깊은 감동을 받았고, 이를 기점으로 그는 그의 평생의 사업이 된 부단(Bhoodan, 토지헌납) 운동을 시작한다. 바베가 인간에게서 세계 공동체를 향한 평화의 씨앗을 발견한 순간이다.

바베는 이때의 감동을 판디프 자와알랄 네루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기만 하다면 어떤 문제라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했으며, 또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이것은 나에게 이론의 문제였고 신앙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을 현실 속에서 이해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그렇게 해서 부단 운동은 바베의 삶에서 모든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곧이어 부단 운동을 중심으로 그람단(Gramdan, 마을의 헌납), 삼빳띠단(Sampattidan, 돈의 기부), 그리고 심지어 샨띠 세나(Shanti Sena, 평화군)까지 실천적 활동이 이어졌다.

이처럼 바베의 평화적 혁명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괘도에 오르고, 바베는 10여년 동안 인도 전역에 걸쳐 부단 순례길이라는 대장정에 오른 것이다. 10여년의 순례 결과, 정확한 수치를 내기는 어렵지만, 400만 에이커 이상의 땅이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부되었고, 그람단도 1971년에는 17만 마을 이상이 집계되었다고 한다.

▲ 부단 순레길에 오른 비노바 바베
ⓒ 김용태
사실 바베가 실천에 옮긴 부단 운동은 궁극적인 지향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관심을 같이했다. 바베나 공산주의자나 모두 궁극적인 국가의 소멸을 지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베는 자립 마을 공동체의 그물망으로 구성된 인도의 미래를 꿈꾸면서, 이를 '평화적 혁명'으로 이룩하고자 했다. 이 같은 기본 이념 아래, 비노바는 공산주의자들을 만나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최소한 이것만은 인정을 해야 한다. 여러분이 지금 목표로 삼고 있는 그 이상은 아직 어떤 나라에서도 실현된 일이 없고, 따라서 언제 실현될 수 있을지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설사 우리가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무력이 필요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인도가 독립을 얻고 참정권이 보장된 지금 무력에 먼저 호소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무력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서 비노바는 "만약 비폭력과 사르보다야에 따른 실천적 행동들이 어떤 효과나 결과를 얻지 못하다면, 그때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주장도 했다.

"미래에는 세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경쟁하게 될 두 가지 이념들이 있으니 그것은 공산주의와 사르보다야다. 오늘날에는 다른 이념들이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르나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다. 공산주의와 사르보다야는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에 못지않게 대립되는 점도 많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이 사르보다야다."

그러나 현재 인도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돌아보건데, 바베의 부단 운동은 실패처럼 느껴지기만 한다. 불가촉천민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빈부격차는 높기만 하다. 정신적 고양만을 추구하기엔 인도의 현실적 삶의 고통이 크기만 하다. 어쩌면 모든 '휴머니스트'가 그렇듯이, 바베도 너무 인간을 믿었고, 너무 인간의 선함 만을 믿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바베는, 오늘날 다시 환생을 한다해도, '휴머니스트'가 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떠한 비관적 상황에서도 바베는 인간 마음 속에 담긴 희망을 빛을 지피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베가 후손들에게 남겨준 부단 정신, 곧 "마음이 변하고. 다음으로 삶이 변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국가의 전체 사회 구조가 변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 돈을 벌어들이는 자는 또한 걱정과 근심도 벌어들인다. 그는 돈은 벌어들이지만, 돈 보다 더 소중하고 귀중한 같은 피를 나눈 동포들의 사랑, 그리고 친구와 이웃의 사랑과 같은 중요한 것은 잃어 버리고 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돈을 가진 자들이 불행한 이유이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행복하지 않다. 이에 대한 처방은 무소유의 안전한 토대 위에 그것의 질서와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의 생애
온 삶을 공공의 복지를 위해 매진

비노바 바베는 1895년 8월 11일 봄베이 콜라바 지역 가고다에서 브라만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노바는 바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1906년에서 1916년까지 다녔다.

비노바의 아버지는 비노바와 그의 형제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영국에 유학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비노바는 십대 후반에 일찌감치 고행자적인 생활에 기울어 있었던 터라 공부를 포기하고 중요한 학교졸업장마저 불태웠다.

이 무렵 비노바는 신성한 땅 '베나레스'에 자리잡은 힌두대학교에서 행한 간디의 취임 연설을 읽는다. 그는 바로 간디 선생과 교류를 했는데, 특히 종교와 정치 관련 문제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나눈다.

간디와 바베 간에 많은 편지들이 오간 뒤, 바베는 마침내 1916년 6월 코찰랍 아쉬람(Kochrab Ashram)에서 간디를 만나게 된다. 간디와 함께 아쉬람에 있는 동안, 비노바의 관심은 산스크리트어와 인도 문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파니샤드 Upanishads> <바가바드 기타 Bhagavadgita> <브라함 수트라 the Braham Sutra> 샹카라의 < Bhashya on the Sutra > <마누스므리티 Manusmriti> 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Yoga Sutra> 니냐냐와 바이쉐쉬카의 <수트라 Sutra> <야즈나발끼야 스므리티 Yajnavalkya Smriti>를 연구했다. 그러나 비노바가 아쉬람에서 학문적 연구만 한 것은 아니다. 비노바 자신은 간디 선생의 '건설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다른 일들 가운데서, 특히 '건설 프로그램'은 카디(khadi)와 마을 산업, 교육, 공중보건과 공중위생의 발전을 포함했다. '건설 프로그램'에서 비노바의 주 임무는 간디 선생의 목표, 곧 사르보다야(sarvodaya, 공공의 복지)를 완성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비노바는 사띠야그라하(saty graha)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운동과 연루돼 6차례나 체포돼 수감되기도 했다.

1982년 11월 5일, 바베는 가벼운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의사들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회복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바베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쁘라요빠산(Prayopasan, 자이나교 전통으로 금식을 통한 죽음 선택)을 준비했다. 결국 1982년 11월 15일, 비노바 바베는 숨을 거두었다.
/ 김용태

비노바 바베

칼린디 지음, 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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