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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현존 프랑스 최고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진작가 에두아르 부바(Eduouard Boubat)의 뛰어난 사진들에 자신의 글을 함께 실은 아름다운 사진에세이집이다.

영상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글의 전략인지는 몰라도 이처럼 사진과 글이 함께 만나는 책들이 요즈음 드물지 않다. 그러나 아름다운 글은 있되 그 아름다움을 눈앞의 현실로 생생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진은 드물고, 뛰어난 사진은 있되 그 프레임 바깥의 이야기들까지 풀어내는 통찰력 있는 글은 드물다.

<뒷모습>은 자칫 어느 한쪽의 권력 집중에 의해서 파경에 이르기 쉬운 글과 사진의 이러한 위험한 결혼이 보기 드물게 성공하고 있는 몇 안되는 책들 중 하나다.

그것은 같은 나라에서 동시대를 살면서(그러나 투르니에는 아직 생존해 있지만 부바는 1999년에 작고했다) 서로 공유하게 된 공통의 감수성 그리고 각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예술가의 뛰어난 예술혼이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두 예술가가 서로 상대방의 예술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두 사람이 함께 여행하면서 깊어지게 된 개인적 친밀감(두 사람은 캐나다를 함께 여행하고 그 기록을 <캐나다 여행수첩>이라는 책으로 남겼다)은 이 책 <뒷모습>의 예술적 성취를 한층 더 높여준 요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왜 하필 책의 제목이 <뒷모습>일까? 책의 첫 장에 투르니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로 표정을 짓고 손짓을 하고 몸짓과 발걸음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모든 것이 다 정면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그 이면은? 뒤쪽은 등 뒤는? 등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온갖 방해물(얼굴 표정, 손짓과 몸짓, 어떤 경우에는 가면)로 인하여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포착하기 위하여 그 모든 은폐막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뒷모습을 담아낸 것일 터이다.

“동성애자들은 멋진 인조유방을 만들어 붙일 수 있지만 견갑골은 그들이 남자임을 숨기지 못”하는 것처럼 부바와 트루니에는 진실을 드러내기 위하여 뒷모습에 주목한다.

그 뒷모습에는 인도의 비쩍 마른 농부가 보여주는 궁핍도 있지만, 우거진 열대식물의 잎사귀 사이에 누워있는 무르익은 여인의 살덩이도 있다.

그 뒷모습에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패션쇼의 무대 뒤에서 바쁘게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모델의 직업적인 무신경도 있지만, 가리는 체하면서도 사실은 앙큼하게 엉덩이를 주목시키는 튀튀(발레 스커트)를 입은 발레리나의 도발적인 관능미도 있다.

그 뒷모습에는 등에 업은 아가의 낮잠을 위하여 넓은 등으로 아가의 시선을 가려주는 엄마의 사랑도 있지만, 어른들이 빽빽하게 둘러싼 채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한사코 그 장벽을 뚫어보려는 아이의 호기심도 있다.

그 뒷모습에는 서로 열렬히 입술을 나누고 있지만 결국은 헤어질 운명의 젊은 연인들의 사랑도 있지만, 어깨동무를 하고 평생을 건너가는 어린 꼬마들의 우정도 있다. 우리들 삶의 이 모든 세목들을 뒷모습은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부바와 투르니에가 주목하는 뒷모습은 그러나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농부와 함께 밭을 걸어가는 소 두 마리의 뼈만 앙상한 뒷모습과 창틀에 앉아 햇빛 환한 정원 쪽에서 들려오는 잉잉대는 벌들의 소리에 귀쫑긋 기울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의 골똘한 뒷모습은 동물들 역시 뒷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사람들이 배를 진수시키기 위하여 바닷가에서 밀고 있는 배의 뒷모습과 서로 어깨를 감싼 채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대리석상의 뒷모습은 우리 삶 주변의 사물들 역시 뒷모습이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화단 저 끝에 아직도 분수를 품고 있는 그러나 이제 채소밭으로 변해버린 정원의 뒷모습과 에펠탑이 멀리 보이는 파리의 어느 거리, 벼룩시장이 끝나고 버려진 쓰레기들로 어지러운 광장의 뒷모습은 인생의 유전(流轉)과 부침(浮沈)에 대한 더 없는 상징처럼 여겨진다.

이 많은 뒷모습을 보고, 읽고, 생각해보니 나의 뒷모습은 과연 어떠한 모습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번도 나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내 뒷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미셸 투르니에와 에두아르 부바는...

이 책의 글을 쓴 미셸 투르니에는 현대 프랑스 문단의 가장 뛰어난 작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나이 43세 때인 1967년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으로 늦은 등단을 했지만 이 처녀작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받을 정도로 소설적 역량이 뛰어나 등단과 동시에 프랑스 문단에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다. 1970년에는 두 번째 작품인 <마왕>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하였으며, 1972년에는 아카데미 콩쿠르 종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 등과 함께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쌓은 철학적 소양은 그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탐색하는 그의 문체는 박학하고 재치 있고 구상적이어서 재미있게 읽힌다는 평을 받고 있다. 매년 노벨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이다.

이 책의 사진을 찍은 에두아르 부바는 미셸 투르니에보다 한 살 위인 1923년생으로 1999년에 작고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리 에콜 에스티엔느(Ecole Estienne)에서 사진요판술을 공부했고, 사진술은 독학으로 익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간’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타인들에 대한 관심에 역점을 둔 전후의 미술 성향과 조화를 이루었다. 생 제르멩 데 프레의 라 윈(La Hune) 서점에서 첫 전시회를 개최하였고, 1947년에 코닥 상을 수상하였다.

고급 예술지 <레알리테>와 오랫동안 협력, 1967년부터 독립작가로 활동하였고 1977년 사진 축제 ‘아를르의 만남’을 기획하였으며 1984년에 사진 부문 국가대상을 수상했다. 미셸 투르니에와는 <캐나다 여행수첩>, <가면의 황혼>, <열쇠와 자물쇠>, <뒷모습> 등의 책에서 함께 작업하였다.
“너그럽고 솔직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 내게 왔다가 돌아서서 가는 모습을 보면서…(중략)… 돌아선 그의 등이 그의 인색함, 이중성, 비열함을 역력히 말해주고 있었”음을 경험했던 미셸 투르니에의 고백처럼 내 뒷모습도 혹시 누군가에게 그러한 배신감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면은 가면을 써서라도 가릴 수 있겠지만 뒷모습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자신의 뒷모습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결코 가볍지 않은 책 <뒷모습>은 흥미롭게도 목차도 쪽매김도 없다. 그냥 등 하나로 단순소박하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뒷모습에는 요약도, 분류도, 순서도, 처음과 끝도 필요없다는 뜻일까?

어쩌면 <뒷모습>의 진정한 읽기는 책장을 다 덮고 나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뒷모습을 되돌아본 후 스스로 목차를 세우고 쪽매김을 할 수 있도록 책에서는 목차도 쪽매김도 하지 않은 것이리라 짐작해본다.

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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