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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부자의 말없는 대화 - "종철아, 이 애비가 살아있는 한 내 니몫까지 다 하마." "아부지, 참말로 고맙습니다."
ⓒ 박도
들어가는 말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민주화된 것도, 이만큼의 자유와 인권 신장이 된 것도,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로 여기던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금강산 뱃길이 열리고 경의선 끊어진 철로가 이어지고 금강산 가는 육로 길이 열린 것도, 교실에서 북에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눈치 보지 않고 가르칠 수 있는 것도, 모두가 다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 제단에 목숨을 바친 민주 열사들의 숭고한 희생 덕분이다.

씨앗을 뿌린 자가 그 열매를 거두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언제부터인가 씨앗을 뿌린 자와 그 열매을 거둔 자가 달랐다.

나는 이 땅의 한 작가로서, 씨앗을 뿌린 자에게 그 열매를 가져다 줄 능력은 없다.

하지만 언 땅에 씨앗을 뿌리다가 숨져간 거룩한 영령들의 가족 가슴에 담긴 한을 들어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할 수 있다는 소명감으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고 그 사연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겠지만 독자의 성원으로 이를 극복하리라 믿는다.

▲ 대학 뜰에 있는 고 박종철 군 흉상
ⓒ 박도
6월 항쟁에 불씨를 붙인 사람

한국의 봄은 맵고 잔인했다. 3.15, 4.19, 5.18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만 보더라도 대부분 봄철에 몰려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 봄 개학과 더불어 최루탄과 곤봉과 화염병이 난무했던 지난 세월이었다. 여름으로 넘어가는 6월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1987년 6.10 6월 항쟁의 불씨를 붙인 것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항쟁 16돌을 앞두고, 박종철 군의 아버지며 현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 이사장 박정기 씨를 찾았다.

지난 연말 한 원로 시인의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를 나눈 후, 곧 찾아뵙기로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지난 5월 9일에서야 이루어졌다.

마침 그날 학교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부지런히 유가협을 찾았다.

▲ 책상을 '탁' 치자 '윽' 하고 죽었다는, 소도 웃을 문제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이 건물 5층에서 박종철 군은 비명횡사했다.
ⓒ 박도
창신동 ‘한울삶’ 부근 찻집에서 만나 목을 축인 후, 곧장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동대문에서 택시에 오른 뒤 기사에게 “서울대학교로 갑시다”라는 말만 했는데, 기사는 서울역을 거쳐 남영동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남영동 대공분소 건물은 박종철 군이 고문치사한 원한의 장소가 아닌가?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차에서 내려 멀리서 사진 두 장을 찍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아버님은 겉모습만 조금 변했을 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박정기 씨, 1929년 생으로 올해 일흔넷이다. 경남 동래(지금은 부산광역시)에서 중농 집안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부산수도국에 들어간 이후, 날이면 날마다 수도 파이프나 만지면서 외골로 33년을 보냈다.

정년퇴임 후에는 목욕탕이나 차려 ‘목욕탕집 주인’으로 남은 인생을 마감하는 게 당신의 소원이었다.

그런 그가 1987년 1월 14일, 막내아들 종철 군을 잃은 뒤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태백산맥 같이 꿋꿋한 민주 투사로 당신의 운명을 확 바꿔놓은 것이다.

오후 4시 무렵,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인문대학 뜰에 세워진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 앞에 도착했다. 비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 '민주 열사 박종철의 비'
ⓒ 박도
독재의 아스팔트 발바닥을 태우던 1987년 6월 어느 날, 너의 모습이 일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다. 영영… 그러나 눈물 흐릿한 시야 바깥으로 겨울이 거대하게 빠져나가는 광경 또한, 들렸다.

그렇다. 나아가는 자 시간을 알고 역사를 느끼며 그 너머 죽음을 가슴에 미리 새긴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보다 희망의 나이를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원의 찰나, 찰나의 광경에 동참한다. 그것은, 그것이 너의 광경….

박종철, 여기 10년 동안 견고해진 눈물로 너를 세운다. 1997년 6월


얌체(염치) 있게 살자

당신은 두어 달에 한 번꼴로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그는 우선 비 앞에 참배객들이 두고 간 마른 꽃다발을 치운 뒤, 비 뒤에 놓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91. 10. 24. 종철이를 추모하는 벗들이”라고 새겨진 돌로 가서 새들이 남긴 하얀 배설물을 닦았다.

그는 이런 일들을 늘 해 왔듯이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대학 관리인처럼 스스럼없이 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묵묵하게 비 언저리를 깨끔하게 치웠다. 과묵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였다.

청소가 끝나자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 돌비석의 새 배설물을 닦는 아버지의 정성
ⓒ 박도
“내가 이 비를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만 오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요. 서울대학에서만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이가 여럿 되고 종철이 이전에 우종원, 최우혁, 김용권, 김성수 같은 이도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았는데, 우리 종철이만 이렇게 비까지 세웠으니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네?”

뜻밖에 말씀이었다. 천금보다 귀한 자식을 잃고도 행복한 사람이라니.

“사람은 한번 죽는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종철이는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으니 복이요, 그 복으로 내가 더 많은 자식을 얻었으니, 그 놈이 애비에게 잔뜩 복을 안겨주고 간 거지요. 여태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이도 얼마나 많은데….”

득도한 스님 같은 말씀이었다.

몇 장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눌 장소를 찾는데, 마침 지나던 한 여학생이 아버님에게 인사를 했다. 그 여학생은 ‘한겨레’에서 잠시 일할 때, 아버님을 뵌 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학생에게 마땅한 장소를 부탁하자 거기서 멀지 않은 교수식당으로 안내해줬다.

밥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인삼차 한 잔을 들면서 녹음기와 노트를 꺼내 놓고 대담을 시작했지만, 언저리의 소음 때문에 차를 마신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 일대를 그놈이 얼마나 쏘다녔겠어요. 아주 바지런한 놈이었거든요. 아직도 어디선가 "아부지'하고 그 놈이 달겨들 것 같은 착각에 빠져요.”

마침 가까운 등나무 아래 벤치가 있어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 종철 군도 생전에 친구들과 이 자리에 앉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게다. 아버님과 나는 등나무 그늘에 나란히 다정히 앉아 대담을 나눴다. 모두 말씀을 부탁드렸다.

▲ 삶과 죽음이 뒤바뀐 어느 부자의 다정한 모습, "철아, 이제야 내 니 맘 알겠다." "아부지가 지 맘 알아주니 여한이 없어예."
ⓒ 박도
“‘얌체 있게 살자’를 말하고 싶네요. 한 마디로 사람들이 너무 얌체가 없어요. 정치인이건 경제인이건 정부건 사회건 얌체 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부질없이 남을 탓하거나 자기 과시하거나, 그리고 정치모리배들의 얌체 없는 짓 때문에 나라가 엉망진창 아닙니까?

가진 자들도 나눌 줄 아는, 기본적인 양심도 없이 자기 부만 축적하겠다는, 얌체족들이 너무 많아요. 씨앗을 뿌리거나 심거나 가꾸지도 않고 열매만 따 먹는 것도 얌체 없는 짓이지요, 아무튼 얌체 있는 사회가 돼야지요. ” (계속)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1984년 3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했으며,
1986년 4월 11일 청계피복노조가 주도한 가두 시위 도중 연행, 구속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거처를 추궁받으며 고문을 당하던 중, 대의와 신의를 지키며 생을 마쳤다.

그의 거룩한 죽음이 그해 6월 항쟁의 기폭제로 민주화의 큰 물길을 돌린 계기가 되었다. / 박종철 평전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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