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미국을 방문중인 노무현 대통령의 예상치 못한, 그러나 '준비된 발언'이 논란을 빚고 있다. 12일 저녁(현지시간) 뉴욕 피에르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소사이어티 주최 연례 만찬에 참석한 노 대통령은 "미국이 53년 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치범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관련
기사
"미국 없었다면 나는 수용소에..." 北체제 겨냥한 노대통령 발언 파문

물론 이러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을 씻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가 여러 차례 같은 약속을 반복해도 아직 저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다시 이 자리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해 보겠다"면서 '정치범 수용소'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불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오히려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부시 행정부의 비위를 맞춘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미국 못지 않게 북한을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이에 따라 한미관계 못지 않게 남북관계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대통령이 직접, 그것도 선정적인 방식으로 북한 정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체제 문제를 거론한 것을 북한 정부가 그냥 넘길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2년 4월 최성홍 당시 외통부 장관이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북강공책이 먹혀들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에 대해 북한이 "사대 굴종 발언"이라며 강력 반발하면서 남북회담이 취소되는 등 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었다.

이번 노 대통령의 발언이 최성홍 전 장관의 발언보다 강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공개적인 자리에서 최고지도자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반발은 더욱 격렬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 '맹목적 친미'의 길로 가나

노무현 정부의 출범을 상세히 보도할 만큼 북한은 노정부에 대해 기대를 걸었었다. 그러나 대북송금 특별검사제가 한 차례의 거부권 행사도 없이 공포되는 것을 보고 반쯤 등을 돌렸다. 그리고 과거 팀스피리트 훈련에 버금가는, 그리고 최근 유례가 없는 강화된 형태의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노무현 정부가 한마디 말도 못하고 수용하는 것을 보고, 또한 이라크전 파병을 강행하는 것을 보고 조금 더 등을 돌렸다.

기실 2003년 2월 25일 출범 후 불과 한 달 사이에 보여준 노무현 정부의 세 가지 중대한 전략적 실책, 즉 대북 송금 특검제 공포, 강화된 형태의 한미합동군사훈련 실시, 이라크전 파병 등은 노무현 정부의 국가 전략이 김대중 정부 때의 균형을 잃고 미국 쪽으로 급격히 경도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음모론'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특검제 역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사건의 발단이 된 4억 달러 대북지원설의 최초 출처는 미 의회조사국 전문위원인 래리 닉쉬가 미국 정보기관들이 흘린 정보를 바탕으로 2002년 2월 작성한 '한미관계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를 뒤늦게 입수한 <월간조선>은 같은 해 5월호에 대북비밀 지원 의혹설을 보도했고, 그 해 가을 정기국회에서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이 공개적으로 이를 폭로하면서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부시 행정부는 현대의 금강산 관광 사업이 북한의 무장을 돕고 있다는 의혹을 이유로 이 사업에 딴지를 걸고자 했었고, 이에 김대중 정부가 순순히 미국 말을 따르지 않자, 여러 경로를 통해 압력을 행사했었다. 그리고 우방국인 한국 정부의 아킬레스건을 잡을 수 있는 대북 비밀 지원설을 흘림으로써 남북관계를 상당 부분 지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렇듯 남북관계가 상처받은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번 뉴욕 발언은 북한의 대남 불신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이는 93-94년 당시 남북관계의 악화가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역사적 교훈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하고 있다. 북미간의 위기 상황에서 남북관계마저 악화되면, 위기 완화의 안전판마저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부시와 '코드'를 맞추려나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범 수용소 발언 외에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과거 합의를 저버린 전력이 있다는 것을 순진하게 보지 않는다", "나는 북한을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는 않는다"는 등의 대북 강경 발언을 했다.

2001년 3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비교적 자주적 입장을 고수했다가 부시 행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작심이라도 한 듯, 부시 행정부의 비위를 맞추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선 후보 때는 물론, 인수위 때의 모습과도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다.

물론 안팎으로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서, 또한 미국에서 노무현 정부의 대북·대미관에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집권후 인식과 발언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행보를 보면,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대한 깊이 있는 고뇌의 흔적을 볼 수가 없다. 정세가 혼란스러울수록 무게중심을 잡고 일관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스스로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혼란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노 대통령의 '부시 비위맞추기'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부시와 코드를 맞추겠다"는 의지는 결과적으로 부시 대통령을 견인하겠다는 것보다는 부시의 대북관에 동조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시의 대북강경책에 노무현 정부가 정당성을 부여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대북정책, 미사일방어체제(MD) 등을 놓고 한미간에는 상당한 갈등과 긴장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미국과의 불편을 감수하고 비교적 자주적 입장을 견지하고자 했던 것은, 부시의 대한반도 정책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시에 동조하고 나서면 남북관계는 물론 한반도 전체에 엄청난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원칙과 소신이 쉽게 흔들리는 지도자는 나라 안에서는 물론이고 나라 밖에서도 가볍게 보일 수밖에 없다. 부시 행정부가 김대중 정부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었던 배경에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흔들림없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관계의 갈등은 단순히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와 부시 행정부가 추구하고자 하는 한반도에서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쉽게 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부시의 비위를 맞춰 가면서까지 갈등을 풀려고 하면, 이 과정과 결과는 우리의 양보할 수 없는 가치의 훼손을 그 대가로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노무현 정부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