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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한국에 와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께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위안부 관련 법안의 국회 상정 과정과 경과 등을 보고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미 국회가 개회돼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었음에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적법한 배상을 요구하는 정대협 수요시위에 일본 국회의원으로서는 처음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왼쪽)이 참가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12일 정오,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545차 정기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갑작스런 추위 속에 살을 에이는 듯한 칼바람을 맞으며 구호를 외치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시위 참가자들.

그 속에 30여명의 취재진들의 주목을 받는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일본에서 온 오카자키 도미코(59. 여) 참의원.

지난 8일 방한한 오카자키 의원은 일본 국회위원 최초로 수요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시위대와 같이 일본 대사관을 향해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라고 외치기도 했고 함께 흐느끼기도 했다.

"수요시위가 있다는 것을 작년에야 알게 돼 미안하다"고 말한 오카자키 의원은 참가 할머니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오전 10시 30분, 숙소인 롯데 호텔에서 오카자키 의원을 만나 1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차분하고 단아한 모습. 시종 웃음을 머금은 채 인터뷰에 응했던 오카자키 의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통역은 일본 전후보상 실형 시민기금 김영희(재일교포)씨와 원폭피해자협회 곽귀훈옹이 맡았다.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요시위에 참여한 것이 이번 방한의 첫 번째 이유였다는 오카자키 의원은 "두 번째 이유는 노무현 정부에 위안부 문제 관련 법안 추진 과정을 보고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관련자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는 노 당선자 앞으로 위안부 문제를 주요하게 다뤄달라는 요청서를 보냈다고 했다.

▲ 12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545차 정기수요시위에 참가한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이 할머니들에게 '전시 성적강제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촉진법' 입법추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1990년 처음 국회의원이 된 뒤 이화여대 윤정옥(尹貞玉) 교수의 강연을 들으면서 위안부 문제에 눈을 떴다는 오카자키 의원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올바른 보상을 위해 2001년 1월부터 '전시성적강제피해자 문제 해결 위한 촉진법(이하 촉진법)'을 발의했다.

두 번의 폐안 과정을 거쳐 지난달 31일 세 번째로 국회에 재상정했다고 한다. 발의자는 13명이고 찬성하는 의원 수는 86명. 법안 통과를 위해서 참의원 과반수인 127명이 넘어야 한다.

오카자키 의원은 "촉진법은 국가가 공식 사과를 해야 하고, 세금으로 일본 정부의 배상이 있어야 하며, 이와 관련 총리를 중심으로 한 '촉진회의'를 열어 피해자 조사, 보상문제 등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중심"이라며 "힘들지만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며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일본 동북방송(TBC) 아나운서를 출신으로 시민운동에 뛰어든 오카자키 의원은 환경, 여성, 동티모르 문제 등 주로 소수의 약자를 위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특히 13년 동안 동티모르 문제를 다루면서 일본인 국회의원 최초로 동티모르를 방문하기도 했다.

"자기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일본 국민들에게 위안부 문제 등을 설득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보수적인 남자 의원들이 '그만둬'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통해 정의사회 구현의 첫걸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수요시위 참가를 통해 오히려 큰 힘을 얻었다"는 오카자키 의원. 그는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소수 약자를 위한 뜨거운 마음과 실천이 앞서는 차가운 이성의 소유자가 아닐는지.

"식어가던 위안부 문제 불씨 살릴 계기된 듯"

12시 10분 오까자키 의원이 일본 대사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30여명의 취재진이 일제히 몰려들어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이미 수요시위가 시작된 상태였기에 주최측에서는 취재진들의 무질서한 취재경쟁에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진 내부에서 나름의 '포토라인'을 만든 뒤부터 수요시위가 진행될 수 있었다.

이날의 중심은 역시 오까자끼 참의원. 시위가 계속되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진기자들의 경쟁은 지속됐다.

수요시위가 끝난 뒤 한 참가자는 "모든 이슈가 일본인에게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켰는데"라며 아쉬워했지만 "일본에서 훌륭한 일을 하시는 분인 것 같아 고맙다"고 말했다.

93년 일본 외무성 앞에서 배의 흉터를 보이기도 했고 미국 6개 대학 순회 강연을 나서기도 했던 황금주(83) 할머니는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온 결과가 조금씩 보이는 것 같다"며 "일본에 가면 저 사람이 자주 도와준다. 이렇게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정대협 김윤옥 공동대표는 "무엇보다 오까자끼 의원이 함께 참여하면서 할머니들에게 큰 격려가 됐다"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열기가 식어가고 있었는데 오까자끼 의원이 와서 다시 불씨를 살리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다음은 오카자키 의원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는 작년 9월 한국에 와서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그 때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께 우리가 추진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 관련 법안의 국회 상정 과정과 경과 등을 보고하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다.

두 번째는 새로 출범하는 노무현 정부에 위안부 문제 추진 과정을 보고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관련자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기 위해 왔다. 노 당선자에게 위안부 문제를 한·일 관계의 중요한 안건으로 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요청서를 전했다."

- 한국 일정은 어땠나?
"지난 주 토요일(8일)에 민주당, 사회민주당, 공산당, 무소속 의원들 그리고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시민·사회 단체 사람들과 함께 한국에 왔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이미경 의원과, 한명숙 장관, 국회 여성 특별위원회 소속 의원 등 많은 분들을 만났다."

- 수요집회에는 어떻게 참석하게 됐나?
"조금 전 말한 것처럼 첫째는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정 상 나눔의 집이나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수요시위에서라도 그 분들을 만나고 싶었다.

지난 해 이곳에 같이 온 시민활동가 김영희(재일교포, 전후보상 실형 시민기금) 등을 통해 수요시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데 내가 작년 국회 질의에서 관방장관에게 한국에서 정대협에서 수요시위를 500회 이상했다는 사실을 아는지 물었는데 그는 모른다고 했다.

그 때 확실히 수요시위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에 두 번째 이유다.

사실 이미 국회가 개회됐기 때문에 어제 함께 온 국회의원들은 모두 귀국했다. 나도 오늘 중요한 일정이 일본에 있지만 할머니들을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 일정을 기쁘게 포기했다. 할머니들을 못 만난다면 어떻게 보면 내가 한국에 온 의미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작년 가을 한국에 와서 할머니들 만났는데 그 때 할머니들은 날 보고 무척이나 나무랐다. 그 때 눈물을 안 흘릴 수 없었다. 다시 와서 경과 보고한다는 약속을 꼭 지키고 싶었다."

- 정신대,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은?
"1990년 처음 국회의원이 된 뒤 이화여대 윤정옥(尹貞玉) 교수의 강연을 들으면서 위안부 문제에 눈을 떴다"

▲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
ⓒ 오마이뉴스 남소연
- '전시성적강제피해자 문제 해결 위한 촉진법(이하 촉진법)'에 대해 설명해달라.
"윤 교수의 강연 이후 1990년 일본에서 6월 국회 때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놓고 토의했다. 그리고 1991년 12월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재판 등 12건의 위안부 관련 재판이 진행됐다.

1993년 8월에는 당시 고노 관방장관이 담화에서 일본이 국가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여했다고 비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가 아니었다.

결국 일본 정부는 들끓는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부 주도로 민간 기금을 만들었다. 이것이 1995년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이 만들어졌다. 이 기금은 정부가 만든 민간기금이었다. 이 기금에 대해 대만, 한국 등에서 반대를 했다.

그 이유는 이는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고 단지 민간에 책임을 떠넘기는 것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 기금은 민간기금에 불과할지라도 단순한 민간 기금이 아니었다. 정부가 나서서 기금을 조성한 것이다. 어떻게 정부가 민간기금에 참여할 수 있나?

그런 와중에 1997년 시모노세키 재판에서 위안부와 정신대 관련해서 일본 국회가 법률을 만들고 배상해야 하는데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판결이 나왔다. 때문에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배상, 사죄하려고 뛰어들었다."

- 가장 중점적인 내용은 어떤 것인가?
"'촉진법'에서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첫째 국가가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 고이즈미 총리 등 책임 있는 사람이 공식석상에서 위안부, 정신대 문제와 관련 사죄를 해야 한다. 둘째는 일본 정부의 배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공표를 하면 바로 국가가 세금으로 보상을 해야 한다.

단 민간 자금이 들어가면 안 된다. 셋째 '전시 성적 강제 피해자문제 해결 촉진회의'를 만들어 피해자 조사, 보상 문제 등을 연구,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야 한다. 촉진회의는 총리가 중심에 있어야 한다."

- 쉽지 않은 과정이었을텐데
"위안부 관련 법안은 이미 6차례 상정됐지만 폐안된 바 있다. 이번 촉진법은 2001년 3월 21일 처음으로 심의에 들어갔다. 하지만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아 폐안됐다. 이후 2002년 1월 14일 재상정 됐다.

정기 국회와 임시 국회 등에서 참고인 증언을 듣는 등 과정을 거쳤지만 역시 통과되지 않았다. 그래서 올 1월 31일 세 번째로 다시 국회에 내놓은 상태다.

발의자는 처음 7명으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13명으로 늘었고 이 법안에 찬성을 하는 의원의 수는 67명에서 86명으로 늘어났다. 참고로 참의원은 총 225명인데 이 중 과반수만 넘으면 법안이 통과된다."

- 입법 가능성이 있기는 있는 건가?
"일단 싸우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이번에 다시 폐안된다고 해도 몇 번이고 상정할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한일 협정으로 빚이 청산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한일 협정을 보면 위안부 문제는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라와 나라 사이의 빚 청산일 뿐이다. 일본과 피해를 입은 개인간의 관계까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보상을 받아야 한다.

UN 인권위의 경우 보고서를 통해 10여 차례나 일본 정부를 비판한 적이 있고 ILO(국제노동기구)의 경우 5번이나 시정을 권고했다. 받아들여질 때까지 계속해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

- 혹시 법안에 찬성하는 남, 여 비율은 어떻게 되나?
"총 225명의 참의원 중 여성의원은 15.4%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무래도 남성 의원의 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당에서는 여성의원이 다 함께 참가했다."

▲ 오카자키 도미코 의원
ⓒ 오마이뉴스 남소연
- 법안과 관련 다른 국가나 단체와의 연대는 없는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김영희씨나 기타 시민·사회 단체들이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러한 시민·사회 단체들은 지금까지 피해자들을 위문, 후원해왔고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앞으로 한국뿐만 이니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네델란드 등 단체들이 같이 네트워크를 추진하려 한다. 작년에는 5개국을 방문해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국가 차원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법안을 가지고 설명을 했고, 필리핀에서는 국회 결의를 했다. 한국은 110명의 국회의원이 이 법안에 찬성했다. 이번 방한 때 한국 여성 의원들이 한·일 양국 의원들이 함께 국제 심포지엄을 열자는 제안을 했다."

- 위안부 문제뿐만 아니라 원폭피해자 등 전후청산 문제들이 많이 있다. 혹시 관심이 있는 사안이 더 있는가?
"물론 관심이 있다. 평소에 내 사무실에는 여러 전쟁피해자들이 온다. 전후 문제는 위안부, 원폭피해자, 교과서 문제 등이 있다.

그런데 각 사안을 다루는 주부서가 외무성, 후생노동성, 법무성 등 각각 다르기 때문에 처리하는데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창구를 만들어 할 것을 요청했다. 이런 것들은 시민단체들과 긴밀히 협의하려 한다."

- 이전 활동을 보면 환경, 동티모르 관련 활동 등 소수, 약자들 위한 것들이 많던데.
"아나운서 시절 한 재일교포가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한 사건을 봤다. 그가 너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 같아 그 내용을 다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프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나중에 방송 관련 상을 탄 기억이 난다.

이후 나는 시민운동에 동참했다. 그 동안 소수의 차별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해왔다. 내 공약은 환경문제와 동티모르 문제의 처리였다. 시민 운동했던 것을 바탕으로 인권, 환경, 여성 차별 등의 문제를 위해 작은 부분이지만 노력했다.

그리고 동티모르는 인권 문제 등을 위해 지난 13년 동안 노력해왔다. 사실 일본의원으로는 처음으로 동티모르에 방문한 바 있다. 그곳에서 학살, 약탈, 여성 성폭력 등을 직접 목격했다."

- 일본은 보수적인 사회인 걸로 알고 있다. 오카자키 의원처럼 개혁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힘들지는 않은가?
"힘들다. 사실 일본 국민들은 자기들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죽고 패망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고 있다. 의원들 중에서도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피해를 줬지만 나도 피해자다.' 그래서 한일협약으로 청산했다고 쉽게 넘어가려는 지도 모르겠다. 의원 중에서도 같은 생각 가진 사람들이 많다. '촉진법'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심으로 찬성하는지는 알 수 없지 않은가."

- 여성의원으로 일하는 것은 어떠한가?
"가끔 보수적인 남자 의원들이 여성 문제와 관련 '그만둬'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간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에도 지지를 보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인 계획이 아니고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변화,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위안부 할머니 대부분이 고령이시다. 때문에 하루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위해 정의사회 구현의 첫걸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이를 계기로 일본 내부의 정의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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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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